노자(老子)

上善若水

별관신사 2012. 11. 2. 02:06

도는 원래가 하나의 혼돈한 실재이므로 선 ? 악 이나 강 ?
약의 분별도 있을 수가 없다. 즉 이름이 없다.
선 ? 악이나 강 ? 약 같은 대립은 인간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 관념이지
본래의 도에서는 그러한 상대적 대립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구분하고 차별하고 분별하려고 한다.
나와 남을 가르고, 삶과 죽음을 나누고, 선과 악을 차별 짓는다.
그리고 인간들은 오직 나와, 삶과 선만을 좋아하고,
남과 죽음과 악을 미워한다.

그러나 나와 남, 삶과 죽음, 선과 악은 바로 하나이며, 위치를 바꿔볼 때는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인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도를 모르고 하나만
고집하고 한쪽으로만 나가려 하기 때문에 많은 미망(迷妄)이 생기고, 결국은
멸망하고 만다. 자연의 도를 따르면 살고, 거역하면 죽게 마련이다.
도는 만물을 조화 속에 언제까지나 생성화육하는 것이다.

천지간 만물 중에서 가장 도를 잘 따르는 것은 물이다.
노자는 제 8 장에서 <최고의 선은 물 같다>고 하고 이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줄 뿐 일체 다투지 않고, 남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해 있으므로 거의 도와 가까운 존재다>라고 설명했다.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 자신이 처하(處下)한다는 일은 어렵다.
인간 사회에서는 자기에게 힘이나 공이 있으면 자랑하고
높은 자리를 독차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도를 터득한 성인은 안 그렇다.
제 10 장에서 <천지만물을 낳아 양육하고도 자기의 소유로 삼지 않고,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고, 으뜸이면서도 지배자 노릇을 안한다.
따라서 현덕이라 한다>고 하였다.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둥근 그릇에 넣으면 둥글고 모진
데 넣으면 모진다. 많이 모아도 물이요, 작게 갈라 놓아도 물이다.
뜨겁게 끓여 증발해도 물이고, 얼어도 물이다. 다시 말해서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를 잃지 않는다.

또 물은 언제나 아래로 처진다.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은 서로 모여서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한 방울의 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강물이나
바다는 위력이 있고 크다. 한 방울의 물은 가장 약하지만, 노도는
무섭다. 즉 가장 유약한 것이 가장 강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언제나 강하기만을 바란다.
강하면 꺽이고 굳으면 부숴지게 마련이다. 제 42장에서
노자는 <강하고 포악한 자는 제 명에 죽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제36장에서는 <유약이 강강을 이긴다>고 하였다.

무위자연의 도를 따라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고집하려고 함으로써 자기
이외의 세계를 잃게 된다. 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유한한
존재다. 나만을 고집하고 남과 전체를 무시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한한 세계를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순간적인 나를 버리고 영원히 대자연과 더불어 생성화육하는 것이
바로 무위자연의 도에 복귀하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극기복례(克己復禮)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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