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

象 元

별관신사 2012. 11. 2. 01:55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혼돈하면서도 이루어지는 무엇인가가 천지보다
먼저 있었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 들을 수도 없고,
형태가 없어 볼 수도 없으나,
홀로 우뚝 서 있으며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두루 어디에나 번져 나가며 절대로 멈추는 일이 없어,
천하 만물의 모체라 할 수가 있다.


吾不知其名, 强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겠다.
억지로 자호를 지어 도라 부르고,
억지로 이름을 지어 대(大)라 할 뿐이다.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人亦大.
域中有四大, 而人居其一焉.


그것은 크므로 어디에나 번져 나가고,
어디에나 번져 가가므로 안 가는 곳 없이 멀리 가고,
멀리 가므로 결국은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런고로 도가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또한
사람도 크다.
이 세계에는 큰 것이 네 개가 있는데, 그중에는 사
람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법도로 삼고 따르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따르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고 따르지만,
도는 자연을 따라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선 도는 인식을 초월한 존재다. 인간이 무어라
표상하거나 또는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걷잡을 수
없는 실재다. 없는 것이 아니고 있다. 있을 뿐만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서 우주.천지.
만물이 끝없이 생성화육된다. 그래서 도라는 본체는
알 수 없으나 그 결과나 조화를 가지고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혼돈한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시간적으로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물론 천지라는 현상세계가 형성되기 전부터 있었다.
즉 도는 모든 현상계나 조화의 시원이다. 도가 있으
므로 해서 우주도 돌고 또 있고 모든 현상이 나타나
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천지보다도 앞에 나왔다>라고 했다.

이렇듯 도는 우주.천지.만물의 시원이며 실재다.
그러나 우주.천지.만물 그 자체는 아니다. 현상계의
만물은 도에서 나왔고 도를 따라 생육화성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바로 도는 아니다. 도는 모든 것
속에 있고 모든 운행의 주재자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 매였거나 모든 것의 운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항상 모든 것 속에 있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 즉 비현상적 실재, 무한한 존재로 있다. 따라서
사람은 인식할 수가 없다. 비현상적 즉 형이상적
절대자이기 때문에 유한한 현상적 존재인 인간의 감
관으로서는 지각할 수가 없다. 즉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듯 도는 인식을 초월한 실재다. 그러나 언제
까지나 변하지 않고 있고 어디에나 나타나 작용하고
그 활동 운행이 끝남이 없다. 즉 도는 <홀로 우뚝
서 있으며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두루 어디에나
번져 나가며 절대로 멈추는 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도는 <천하 만물의 모체라 할 수가 있다.>

여지껏 도라고 했으나 이것은 방편상의 호칭이다.
사람이 말하고 글에 표기하려니 억지로 도다, 또는
크다(大)하고 표상한 것이다. 따라서 제1장에서 <말
롤 표상할 수 있는 것은 항구불변의 도가 아니다>라 했다.

여기까지를 다시 한번 추리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도의 본체는 혼돈한 무엇이며 현상계보다
먼저 있으며 그것은 우뚝 홀로 있으며 영원히 변하
지 않는다. 즉 도체(道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일원적(一元的) 절대이다. 그러나 그 도용(道用), 즉
도의 작용은 영원한 태고 때부터 쉬지 않고 어디에나
어느것에나 미치고 있다.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만물의 창조주이자
섭리의 주재자인 하느님과 같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남성적 인격자로 하느님 아버지라고 하지만 노자는
<천하 만물의 모체라 할 수가 있다>고 했다.
다음에서 도의 작용은 뻗어나갔다가 다시 되돌아
온다고 했다. 즉 도는 우주. 천지. 만물을 커버하고

작용하므로 그 작용은 크다. 크므로 멀리까지 미친
다. 멀리까지 뻗어나가지만 도의 작용은 직선적으로
멀리 뻗어나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도의 작용은
원을 그리며 순환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즉
봄에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나 다시 지고
시들게 한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다시 돈다. 돌지 않

으면 영원할 수 없다. 언제까지나 갈 수 있는 원리는
한곳에서 도는 차륜이다. 차륜은 돌지 스스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차체를 실어다 멀리 가게 한
다. 이렇듯 도는 돈다. 이것은 순환으로 파악한 [반
(反)]의 뜻이다. 한편 모든 생육화성은 항상 순환하
면서 그 근원으로 복귀하게 마련이다. 모든 물건의
시발점은 무(無)다. 유는 이미 있는 것이므로 있기
전의 시발점은 역시 무다. 물론 이 무는 고(空:
nothing이나 emptiness)은 아니다. 제1장에서 말한
<유현하고 또 유현한> 도의 무다.

사람을 예로 들자. 어머니 모체 속에서 태아가 형
성된다. 그 시초는 생명의 신비다. 오늘의 의학에서
정자다 난자다라고 하지만 그 심오한 본질은 알 수
가 없다. 또 정자나 난자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전에는 어떠한 것인지? 태아가 출생한다. 영아
가 유아로 자라나고 성인이 되고 다시 노인이 되고
더 있다가는 죽는다.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

지만 죽으면 결국 인체는 흙으로 화한다. 다시 말해
서 자연 속의 그 어떠한 요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알 수 없는
것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것이 노자의 복귀(復歸)
다. 반(反)이다. 여기에 [대(大)→서(逝)→원(遠)→ 반(反)]의 뜻이 있다.

이상과 같이 도체(道體)와 도용(道用)과 아울러
도의 체용(體用)도 결국은 도를 떠나지 않고 순환
복귀한다는 [反]을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천지 및
사람(天. 地. 人) 삼재(三才)가 다 도를 중심하여
돌고 복귀하고 도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 지. 인도 도를 따라 <크다(大)>.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사람은 일차적으로 땅을 본
뜨고,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따른다. 그러나 도
는 절대다. 절대는 타력적 작용을 받지 않는다. 스
스로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자연이다. 따라
서 <도는 자연을 따라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다>라
고 했다.

이말은 도를 따라서 만물이 크게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즉 [대(大)→서(逝)→원(遠)→반(反)]
하는 무한순환(無限循環)이 스스로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하느님을 인격적 절대자로 보는 그리
스도교와 틀린다. 노자는 만물의 생육화성은 무목적
적(無目的的)인 순환, 스스로 이루어지는 자연의 작
용, 무목적적 조화라고 보았다.

우주는 광대하다. 몇 만 광년의 별이 무수히 있다.
그러한 우주의 도를 생각할 때 노자의 직감적으로
파악한 철리의 심오함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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