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내가 <사랑은 내일도 어제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별관신사 2015. 10. 24. 05:21

내가 <사랑은 내일도 어제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아무 중심이 없을 때 사랑이
있다>고 할 때, 그 말은 나에게는 정말이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다. 당신은 그걸 인용하고
그걸 어떤 공식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타당성이 없다. 당신은 스스로를 위해

그것을 알아야 하며,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보는 자유, 모든 비난, 모든 판단, 모든 동의와
반대로부터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며-또는 듣는 것도 그렇다-보는
것과 듣는 것은 같은 것이다. 만일 당신의 눈이 근심걱정으로 눈멀어 있다면, 당신은 황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연과의 접촉을 잃었다. 문명은 점점 대도시를 향해

가고 있다-우리는 점점 더 도시인이 되어 가고 있고, 밀집한 아파트촌에서 살고 있으며, 저녁
하늘이나 아침 하늘을 바라볼 공간조차도 거의 갖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는 상당한
아름다움과의 접촉을 잃고 있다. 우리가 해뜨는 거나 해지는 것, 달빛, 혹은 물 위의 빛의

반사를 얼마나 못 보고 있는가에 대해 당신이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자연과의 접촉을 잃으면 우리는 자연히 지적 능력을 발전시키게 된다. 우리는 수많은 책을
읽고, 수많은 미술관과 연주회를 가고, TV를 보며 그밖에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용하고 예술에 관해 많은 생각과 말을 한다. 왜 우리는 예술에
그다지도 의존하는 것일까? 그것은 도피의 한 형태이며 자극의 한 형태인가? 만일 당신이
자연과 직접 접촉한다면-만일 당신이 날으는 새를 보고, 하늘의 모든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보고, 언덕 위의 그림자들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당신은 어떤
그림을 보기 위해 미술관으로 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당신 주위의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더 잘 보기 위한 자극을 얻으려고 약물에 의지하는 것일 것이다.

매일 아침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했던 종교적 교사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아침 강단에
올라가 막 얘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와 창가에 앉더니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새는 온가슴을 다해 노래했다. 그러다가 노래를 그치고 날아가 버리자 선생은

말했다. <오늘 아침 설법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