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군 사이에 페스트 전염병이 돌게 되었을 때는 트로이를 포위한 지
아홉 해가 지나가던 무렵이었다. 아이올로스 때도 그랬듯이 관례에 따라 아가
멤논은 군의 공식 점쟁이인 칼카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리스의 왕들이 모인
자리에서 칼카스는 이번 전염병은 아폴론이 보낸 것으로, 아가멤논이 태양신의
신관의 딸인 크리세이스를 강제로 납치했던 일을 벌주기 위해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칼카스는 크리세이스를 자기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만 페스트가 멈춰
질 거라고 덧붙였다. 아가멤논은 늘 자기만 죄인으로 지목되어 손해 봐야 되는
일에 넌더리를 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크리세이스를 돌려주는 일을 거절했다. 하
지만 다른 왕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동의하 고 말았는데, 다른 왕들의 볼
모로 잡혀 있는 여자들 중에서 크리세이스를 대신할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상해주어야만 한다고 공표했다. 아킬레우스는 이러한 태도를 아주 못마땅해
했다. 사실 그는 아가멤논의 권위를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여신의 아
들이었던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자기보다 출신도 낮고, 전투적인 면에서도
뒤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가멤논의 변덕에
진저리가 난다며,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자기는 집으로 돌아가 버리겠다고 선
언했다. 자존심이 상한 아가멤논이 대꾸하기를, "갈 테면 가게나, 자네 없이도
우린 잘 해낼 수 있어. 하지만 그 전에, 내가 크리세이스 대신 선택할 여자가
바로 자네 포로인 아름다운 브리세이스라는 사실만은 알아두게."브리세이스는 아
킬레우스의 포로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부이기도 했다.
아가멤논이 그녀를 빼앗겠다고 호언하자 아킬레우스는 모든 자제력을 잃고 칼을
뽑아 그를 치려고 달려들었다. 오디세우스가 말로써 달래보려 했지만 단호히 거
부되었다. 아이아스가 자신의 힘센 팔로 그를 막으려 했지만 분노로 힘이 배가
된 아킬레우스는 그를 열 걸음 뒤로 곤두박질치게 던져버렸다. 올림포스에서 이
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아테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스인들이 둘로 갈라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일에 끼여들기로 했다. 만일 그녀의 즉각적인 도움이 없었다
면 아가멤논은 진짜로 당했을 것이다. 아테나는 아킬레우스의 눈앞에 안 개를
드리워 상대방을 볼 수 없도록 했고, 그렇게 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갖
도록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처받은 아킬레우스의 마음은 여전했다. 그리하여
왕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떠나 자신의 텐트, 아니 막사로 몸을 피했다. 흔히 알
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 왕들 특히 아킬레우스는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충
분히 지어낼 수 있었던 목재 막 사에서 기거했다. 몇 시간 동안 네스토르와 오
디세우스는 아가멤논이 그의 무모한 계획을 포기하도록 설득조의 웅변을 늘어놓
았다.
"아킬레우스는 최고의 전투가요. 그가 없이는 결코 이 전쟁에서 이 길 수 없
어요. 우리들의 포로 중에서 한 사람, 아니 몇 명이라도 가져가고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에게 그냥 놔둡시다."
고집 세고 거만한 아가멤논은 굽히려 들지 않았다. 그래 서 약속한 대로 크리
세이스는 자기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 동시에 브리세이스를 앗아오기 위해 아
킬레우스의 막사에 2명의 전령을 보냈다. 그들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브리세이
스를 수호하는 일쯤은 아킬레우스로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스토르와 오디세우스는 다시금 중재에 나섰고, 아가멤논은 군대의 최고지휘
자이니 모두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걸 아킬레우스에게 강조했다.
아킬레우스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승복할 수밖에 없었고, 헛되이 자기에게 매
달리는 사랑하는 브리세이스를 눈물 속에 떠나 보내야 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이같은 권력의 남용에 굴복할 수밖에 없지만, 이후로 이 전쟁은 나 의 전쟁
이 아니다. 나는 내 궁전과 아버지와 국민들을 남겨둔 채, 아내를 도둑맞은 메넬
라오스에 대한 우정 때문에 여기에 왔다. 하지만 이 번에는 내 동반자를 도둑
맞았고, 그 범인이 아가멤논이니 더 이상 나한테 뭘 기대하지는 말아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내 막사에, 내 부하들은 그들의 막사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스 군 전체가 용감한 헥토르와 그 부하들에 의해 모두 학살당한다 해도 난
새끼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그리고는 막사 앞에 자리잡고 앉아 태연
한 모습으로 칠현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의 이같은 선포에 오디세
우스와 네스토르는 당황스런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가 부른 것
도 아닌데 호기심 때문 에 그 자리에 끼여 있었던 야비한 테르시테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평소의 비열함을 발휘하며 아킬레우스가 방금 암시한 새끼손가락
을 가지고 저질스러운 농담을 해댔던 것이다. 인간의 분노는 예측 불허의 폭
발력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오랜 동안 질질 끌어왔던 분노는 불가사의한 이유
들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폭발적인 점화를 하게 된다. 앞 수많은 세월 동
안 아킬레우스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테르시테스의 오만불손을 대꾸하지 않고
들어 넘겼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냥 참고 넘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노여움에 사로잡힌 아킬레우스는 테르시테스에게 덤벼들어 그의 목을 낚아채
어 오얏나무처럼 흔들어댔다. 공포에 사로잡힌 비겁한 테르시테스가 자기 말을
취소하겠다며 용서를 구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아킬
레우스 의 분노는 그 마지막 불꽃을 다 태울 때까지 휘몰아칠 따름이었다. 극도
의 분노에 휩싸인 아킬레우스는 테르시테스에게 결정타를 가함으로 써 그의 숨
을 끊어버렸다.
"항아리를 너무 자주 샘물가에 가져가면 깨지게 마련이지"라고 네스토르가 격
언조로 말했다. 이러한 짧은 추도사를 보충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테르시테
스의 비겁함과 건방짐을 빗대어 말했다.
"많이 짖어대는 개치고 무서운 개 없더라."
분노를 가라앉힌 아킬레우스는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 다시 앉아 칠 현금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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