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죽음은 공간적 육체와 시간적 의식을 멸망시키기는
하나, 생명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각 존재의
특수한 관계를 멸망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생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들을 놀라게
하는 환영에 한 걸음 다가가서 그것을 만져 보기만 해도, 그들로서도
환영은 끝내 환영이고 실재가 아님을 간파할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항상 사람들 중에서 그들이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그들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그렇게 그들은 느끼고 있다―자기의 특수한
자아(自我)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육체는 해체(解體)되고 자기의 자아는 멸망할 것이다. 자기의 이 자아는
자기의 육체 속에 몇 해를 두고 살고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 자아를 존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아는 그들의
육체적 생활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육체적 생활의 절멸과
더불어 그것도 멸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결론은 극히 보편적인 것이고 그것에 관해서 의심 따위를 품은
사람은 결코 없을 정도의 것이지만, 사실은 그들 제멋대로의 결론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물질주의자나 정신주의자라고 자부를 하면서도 그들의
자아는 몇 해든 그 살아온 육체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아주
젖어버렸으므로, 그들의 머리에는 그러한 단정의 가부(可否)를 확인해
보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나는 59년 동안 살아왔다. 그 동안 내내 나는 나의 육체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해 왔다. 그리고 내가 나를 의식하는 이 일이야말로 나의
생활이었다고 내게는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내게 그렇게
생각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것은 59년도, 5만 9천년도,
59초도 아니다. 나의 육체는 비록 그것이 그 생존의 시간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나의 자아의 생명을 결정짓지는 못한다. 만약 생활의 각 순간에
있어서 나의 의식 내에서 나라는 것은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생각도 하고 느끼기도 하는 어떤 것, 즉 세계에
대해서 전혀 특수한 모습으로 상대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라고. 그리고
나는 그저 이것만을 자기의 자아로 인정한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언제 어디서 나는 태어났을까? 언제 어디서 나는 현재 생각하듯이
느끼기도 하고, 생각하기 시작도 했다든가 함에 대해서 나는 좀처럼 아는
바가 없다. 나의 의식은 나에게 그저 이렇게 말할 따름이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가 세계에 대해서 현재 있는 것 같은 관계를 가지고
여기에 있다」라고. 나의 출생, 나의 어린 시절, 청년시절의 많은 시간,
중년시절 기타 매우 가까운 시절의 일에 관해서도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일이 있다. 만약 내가 무엇인가 기억하고 있다던가 혹은
나의 과거 중에서 무엇인지 상기(想起)한다 하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또
상기하는 것은 거의 남에게 관해서나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을 상기하는
식이다. 그리고 보니 나는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나의 생존의 모든
기간을 통해 내가 항상 하나의 나였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첫째로 나
일개의 육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현재도 없다. 나의 육체는 언제나
무엇인가, 비물질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부단히 흐르고
있는, 그리고 이 무엇을 통해서 흐르고 있는 육체를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하나의 물질이었고, 현재도 역시 그렇다. 나의 전 육체는 몇
십번이고 변화해 왔다. 그 어느 하나도 옛 모양을 남기고 있는 것이
없다. 근육도, 내장도, 골격도, 모든 것은 변화되어 왔다.
나의 육체가 하나인 것은 그저 변화해서 마지않는 이 모든 육체를
하나의 것,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어떤 비물질적인 것이었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비물질적인 그 무엇이란 우리들이 의식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즉 그것 하나가 모든 육체를 함께 지탱해서 그것을
하나의 것,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다른 만물로부터
구별하는 이 의식이 없다면 나는 나의 생명도, 남의 생명도, 그 무엇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 언뜻 생각하면은 모든 근본인 의식이 영원
불변의 것이 아니면 안되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이다.
의식도 역시 변하기 쉬운 것이다. 전 생애를 통해서 지금도
수면(睡眠)이라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매일 수면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극히 간단한 일같이 생각되나, 만약 수면
중에는 전혀 의식이 중단되는 때도 가끔 있다 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된다.
날마다 깊이 수면을 하는 동안에는 의식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가 후에
또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동안에도 이 의식은 육체의 모든
것을 함께 유지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서 인식하는 유일한 근거다.
이를 테면 의식의 정지(停止)와 더불어 육체도 또한 해체(解體)되고 그
독립성을 잃어버려야만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연적
수면에서도, 인위적 수면에서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모든 것을 하나로 유지하고 있는 의식의
정기적(定期的)으로 상실되어 육체는 궤멸(潰滅)해 버리지 않을 뿐더러,
이 의식은 그 위에도 또 육체와 마찬가지로 변화한다. 10년 전하고
현재는 나의 육체의 물질 중에 무엇 하나도 공통된 것이 없는 것처럼, 즉
같은 육체가 아닌 것처럼 내 속에도 같은 의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
살 때의 나의 의식과 현재의 나의 의식은 지금의 나의 육체의 물질과,
30년 전의 그것이 변해버린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의식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수 없이 적게 나눌 수 있는 연속적인 의식의 열(列)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하나로 유지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의식도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중단되기도 하고, 변화되기도 하고 그
무엇인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고 있듯이 자기 하나만이
의식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육체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에게는 같은 육체도 없고,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이 육체를 구별하는 것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항상 하나인 의식은 없고, 있는 것은 그저 서로 무엇으로
선가 매여져 있는 연속적 의식의 일련(一連)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자기를 자기로서 느끼는 것이다.
우리들의 육체는 같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변화되는 그 육체를 같은
우리들의 것으로서 인식함은 시간적 연속이 아니라 그저 변화하고 있는
의식의 일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미 몇 번이고 이들
육체의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부단히 육체를 잃고 나날이
잠잘 때마다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매일, 매시간, 자신 속에 이
의식의 변화를 느끼면서도 좀처럼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죽음에 의해서 잃게 됨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 자아는 우리들이 자기의 것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 육체에 있음이 아니라, 무엇인지 더욱 다르게 연속되는 의식의
전열(全列)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그 무엇 속에 있어야만 되는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이 시간적으로 연속되고 있는 모든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나의 근본적인 이 특수한 자아, 나의 육체의
생존이나 그 속에 생기는 의식의 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
시간적으로 연속되는 여러 가지 의식을 마치 축(軸)이라도 끼듯이
하나하나 끼고 가는 이 특수한 자아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극히
심원(深遠)하고 현명(賢明)한 것 같이 여겨진다. 더구나 그것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거나, 하루에 20번 쯤은 그 대답을 입에 떠올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좋아. 저것은 싫어.」 이 말은 극히
간단하기는 하나, 그 속에야말로 일체의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특수한
자아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결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을 싫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아인 것이다. 왜 한사람은 이것을
좋아하는 데 다른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가? 그것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이 한가지 일이야말로 각 개인의 생명의 근본를 이루고
시간적으로 달라지는 각 개인의 의식 상태를 하나로 매어주는 그것이다.
외계는 만인의 위에 똑같이 작용하지만, 사람들이 받는 인상(印象)은 전혀
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에 있어서까지도 무한하게 세별(細別)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상의 수에 의해서나 그들의 힘에 의해서도 끝없이
여러 가지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으로부터 각자의 연속적 의식의 일련은
꾸며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든 연속적 의식이 결합하는 것은 그저
같은 사실에 있어서도 어떤 인상은 그의 의식의 작용하고 다른 인상은
작용하지 않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어떤 인상이
사람에게 작용하지 않는 것은 그저 그가 이것은 조금이나마 좋아하지만,
저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임에 자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이 많고 적은 정도의 결과로서만 어떤 연속(連續)의
의식(意識)이 인간 속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것을
조금이라도 사랑하고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특질만이 흩어지고
끊어지는 모든 의식을 하나로 모으는 인간이 특수한 근본적 자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특질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발달되는 것이기는
하나 우리들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알 수 없는 과거 속으로부터 이미
완성된 것으로서, 이 생활 속에서 우리들에게 가져온 것이다.
어떤 것은 조금이나마 사랑하고 다른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이
특질은 흔히 성격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이 말에 의해서 가끔 이해되는
것은, 곳과 때의 어떤 조건의 결과를 형성하는 각 개인의 성질의
특수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조금이나마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간의 특질은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이
사람에게 작용하기도 하고 않기도 하는 것은, 인간이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어떤 것을 사랑하고 다른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극히
결정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일로부터 만이 똑같은 공간적 시간적 조건 속에 태어나서 키워진
사람들이 그 내적 자아에 있어서는 극단으로 상반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따위 일이 가끔 일어나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우리들의 육체 속에 결합되어 있는 제각기 서로 다른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켜 주는 것은,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에서 독립된
것이기는 하나 극히 한정적인 그 무엇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손으로서 공간도 시간도 넘어선 영역으로부터 이 세계에 가져온 것이다.
세계에 대한 어떤 특수한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이 무엇이야말로 나의
참된 현실적 자아이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은 이 근본적
특질로서이다. 내가 남을 아는 것도 (만약 그들을 안 다치고), 그것은
그저 세계에 대한 일종의 특수한 관계로서 만이다. 사람들과 진실한
정신적 내왕으로 들어갈 때에 사람들은, 그들의 외관에 좌우됨이 없이 곧
그들의 본성(本性)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세계에 대한 관계는 어떤가,
무엇을 어느 정도로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가, 또 사랑하지 않는가를
알려고 애쓸 것이다.
만약 내가 개개의 동물, 즉 말 개 암소 등을 알고 그들과 진실한 정신
교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내가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의
겉모양에 의함이 아니라, 그들의 각각이 서 있는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에 의해서 그들의 각각이 무엇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그것도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아는 데 의한 것이다. 만약
내가 여러 가지 특수한 동물의 종족을 알고 있다고 하면, 엄밀히 따져서
내가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은 그 외관에 의함이 아니라, 그들의 각각―사자
물고기 거미―세계에 대해서 공통된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사실에
의함이다. 모든 사자는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좋아하고, 모든 물고기는
다른 것을 좋아하고, 모든 거미는 또 다른 것을 좋아한다. 그저 그들이
각각 다른 것을 좋아함으로써만이 그들은 나의 관념 속에서 다른 생물로서
식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직 이러한 동물의 하나하나의 세계에 대해서 그 특수한
관계로 식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의 증거가
아니라, 그저 한 마리의 개개의 거미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가 내가 현재 있는 세계에 대한 관계와는 먼 것이라는 것,
따라서 나는 아직 실비 오 페리코가 개개의 거미를 이해했던 것처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서, 또 세계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일의 근본은
내가 현재 그 속에 있는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이며, 그 결과로서 나는
세계에 대해서 각각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다른 생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는 이 생활에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이 육체에 의해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또 시간적으로 계속해서
일어나는 의식과 함께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의 시간적 의식에 의해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나의 육체는
멸망해 버릴지도 모르고, 나의 시간적 의식 그 자체도 절멸될지 모르지만,
내게는 일체의 것의 창조주인 나의 특수한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는 절멸될 리가 없다. 그것이 절멸될 리가 없음은
그것만이 오직 하나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나의 계속해서 일어나는 의식의 연속도 알지 못했을 것이며, 나의 육체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나의 생명도 다른 어떠한 생명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의식의 절멸은 이 생활에서 발생된 것도 시작된
것도 아닌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로서의 절멸(絶滅)의
증명(證明)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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