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들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의 미신은―다른 방면에서 보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그것은
의식하고 있는 생명 그 자체의 본질에 따르면―한층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나의 벗, 나의 형제는 나와 마찬가지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와 마찬가지로 생활하기를 그쳤다. 그의 생명은 그의
의식이었고, 그의 육체적 생존 조건 속에 발생하고 있었다. 즉 그의
의식의 현현(顯現)을 위해서는 장소도 시간도 없는 것이며, 그것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이치가 된다. 나의 형제는 있었다. 나는 그들과
교류(交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없고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할 수 없다.
「그와 우리들 사이에는 모든 연쇄(連鎖)가 끊긴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그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도 역시 뒤에 남는 자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찌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외부적 교류가 두절(杜絶)된 것에서 죽음의
실재성의 가장 틀림없는 입증(立證)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친근한
사람들의 육체적 생존의 휴지(休止)되는 것 이상으로 명백히 죽음에 대한
관념의 망상성(妄想性)을 씻어주는 것은 없다. 나의 형제는 죽었다.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의 관찰에 허용된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의 표현이 나의 눈 속에서 사라지고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아직 나비가 되어 날아가지 않은 고치의
번데기는 곁에 텅빈 깍지가 되어 딩굴고 있는 고치를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지! 고치가 만약 생각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이웃을 잃어도
그야말로 그 무엇으로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나의 형제는 죽고 그 고치는 빈 깍지로 남아
있다. 나는 내가 여태껏 흔히 보아 오던 형태로는 그를 보지 못하나,
그가 나의 눈에서 사라진 것이 그에 대한 나의 관계를 아주 없애 버리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소위 말하자면 그에 대한 우리들의 추억이 남아 있다.
추억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손이나 얼굴이나 눈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그의 정신적 형상에 대한 추억이다.
이 추억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 지극히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생각되는 말은 대체 무엇일까? 결정체(結晶體)동물의 형태가 사라진다.
추억은 결정체나 짐승 사이에는 없다. 그런데 내게는 나의 벗이나 형제애
대한 추억이 있다. 그리고 이 추억은 나의 벗이나 형제의 생활이 이성의
법칙과 일치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사랑에 있어서 나타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뚜렷한 것이다. 이 추억은 결코 간단한
관념이 아니다. 이 추억은 일찌기 형제가 이 지상에서의 생존 중에 그
생활이 내게 작용한 것과 같이 내게 작용하는 그 무엇이다. 이 추억은
그의 생활을 에워싸고, 그가 그 육체적 생존에 있어서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작용한 것처럼 그 사후에도 다름없이 내게 작용하는, 눈에
보이지 않은 비물질적인 분위기(雰圍氣)이다. 이 추억은 내게서 그의
사후인 지금도 역시 생전에 내게서 요구하던 것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내게 이 추억은 그의 생전에 그것이 있었던 것보다도 그
사후에 한층더 의무적인 것이 된다. 나의 형제에 깃들고 있던 이
생명력은 사라져버리지도 감소해 버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우기
같은 것으로서 조차도 남지 않고, 도리어 크게 되고, 이전보다 한층
힘차게 내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의 생명력은 그의 육체의 사후에 있어서도 그 생전과 같이 아니 그이
상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그 생명력을 나의 형제가
육체적으로 생존해 있던 때와 같이 나의 신상에 느끼면서, 나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내게 명시(明示)해 주는 그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가지고
어떠한 근거에서 내가 나의 죽는 형제는 이미 생명이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는 일찌기 동물로서 살고 있던
세계에 대한 낮은 관계, 즉 현재 내가 아직도 그 속에 있는 낮은 관계에서
나와버린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전부다. 나는 또 말할 수 있다.
내게는 지금 그가 있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중심을 부정해 버릴 수
없다. 나는 사람이 나를 사로잡은 데 대해서 그 반사(反射)되는 표현만을
보아왔다. 그 반사되는 면이 어두워졌다. 나는 이미 그가 나를 어떻게
사로잡고 있는지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나의 전 존재로써 그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 따라서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나의 죽은 형제, 내게는 보이지 않는 이
생명은 내게 작용할 뿐만 아니라, 내 속으로까지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특수한 산 자아는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가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로 되는
것이다. 그는 마치 세계에 대한 관계를 건설함에 있어서 그가 올라갔던
계단에까지 나를 끌어 올려 주는 것 같기나 한 것 같다. 그리고 내게는
나의 특수한 산 자아로서 그가 나의 눈에서 사라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나를 뒤로 끌어당기면서 이미 한 걸음 딛고 있는 계단이 한층 더 분명히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나는 육체적 주음에 의해서 잠든 형제의
생명을 나를 위해서 의심한다. 따라서 그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
뿐이랴! 나의 눈에서 사라진 세계에 대한 생명의 이 작용을 관찰할 때
나는 더욱 확실히 나의 눈에서 사라진 이 생명의 실재성을 확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죽었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의 생전과 마찬가지 아니 그 이상 몇 갑절 더한 힘을
가지고 작용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 작용은 이성과 사랑의 도수(度數)에
비례해서 모든 생물처럼 성장하고 증대해서 결코 정지하는 일이 없고, 또
중단될 줄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는 아득한 옛적에 죽었다. 그의 육체적 생존은 짧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의 육체적 개성에 있어서는 분명한 관념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할 정도이지만, 그의 합리적이고 사랑에 가득 찬 생명의 힘, 그의
세계에 대한―다른 그 누구의 것도 아닌―관계는 아직도 그의 이 세계에
대한 관계를 자기의 내부에 받아들여 그것에 의해서 생활하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 위에 작용하고 있다. 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일찌기 예수의 육체적 생존과 결합해서 이 같은 그의 생명의
계속과 생장을 구성하고 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우리들은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생명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라고. 그리고 아무리 뜻도
없는 이러한 말은 입에 올리면서 우리들로서는 우리들이 무엇인지, 이
힘은 살아있는 예수 자신이라 것 이상으로 뚜렷하고 확실한 것을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을, 자라서 떡갈나무가 된
도토리 주위에서 쉴새없이 일하고 있던 개미들도 틀림없이 말했을 것이다.
도토리는 자라서 떡갈나무가 되고, 그 뿌리로 땅을 꿰뚫고, 가지나
새로운 도토리를 떨어뜨리고 빛이나 비를 막아서 그 주위에 살고 있던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린다. 『그것은 도토리의 생명이 아니다」라고.
개미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들이 그 도토리를 끌고 굴속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끝난 그의 생명의 결과다」라고.
나의 형제는 어제 죽었던 혹은 천년 전에 죽었다 한들, 그의 육체적
생존기 안에 작용한 그의 생명력 그 자체는 나의 눈에 보인 그의 일시적
육체적 생존의 이 힘이 중심이 우리들의 안전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내부에, 수백,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 내부에 한층 더 힘차게 작용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내 앞에서
불타고 있는 풀의 빛을 본다. 이 풀은 다 타버렸으나 빛은 더할
따름이다. 나는 이 빛의 원인을 모르고서는 무엇이 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풀을 태운 것과 같은 불이 지금은 먼 숲이나 내게는
보이지도 않는 그 무엇을 태우고 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다.
게다가 이 빛은 내가 지금 그것을 볼 뿐만 아니라, 그 하나가 나를
인도해서 내게 생명을 주는 그러한 것이 된다. 나는 이 빛에 의해서 살고
있다. 어찌 그것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생명력의 힘이
지금은 내게 보이지 않는 다른 중심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 힘을 느끼고 그것에
의해서 움직이고, 그것에 의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심은 어떠한
것일까? 이 생명 그 자체는 어떠한 것인가? 나는 알 수 없다. 만약
추측하기를 좋아하고서 분규(紛糾)를 일으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인생의 합리적 이해를 구하고
있다면 명료 정확(明瞭正確)에 만족할 것이지, 애매(曖昧)한 제멋대로의
추측을 그것에 결부시켜서 모처럼의 명료 정확성을 해침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그것에 의해서 살고 있는 모든 일이 나 이전에 살아
있었음과 까마득한 옛적에 죽어버린 사람들의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면, 따라서 생명의 법칙을 준봉하고, 동물아를 이성에 종속시키고,
사랑의 힘을 나타내온 모든 사람이 그 육체적 생존이 소멸한 뒤에도 남의
내부에 살아왔고 현재도 살아있음을 알면 충분한 것이다. 어리석고
무서운 죽음의 미신이 나를 결코 괴롭히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사후에까지 작용을 계속하는 힘을 남긴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들은 왜 이러한 사람들이 그 개성을 종속시키고 생명을 사랑에
양보하면서, 일찌기 생명의 절멸이 불가능함을 한번도 의심해 볼 수
없었고, 의심해 본 적도 없었는가 하는 이유를 관찰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삶의 영원성에 대한 그의 신념의
근본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자기의 생활에 파고들어
자기 내부에서도 이러한 근본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그는 생명의 환영(幻影)이 소멸된 뒤까지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때 이미 그 육체적 생존은 항상 결코 멈추지 않을
참된 생활로 한 걸음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그 육체적 생존에 있어서
이미 그가 다가가고 있던 생명 중심으로부터의 광명(光明)속에 살고
있었고, 생전에 벌써 이 빛이 광선이 그의 주위 사람들을 비치고 있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개성을 부정하고 합리적 사랑의 생활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일을 역시 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그것이 예수이든, 소크라테스이든, 선인이든, 이름도 없는
인간이든, 자기 희생자이든, 노인 청년 부인이든―그리고 그 활동의
범위가 아무리 좁든 간에 만약 그가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개성을
부정하고 생활하고 있다면, 그는 이런 점으로 보아 이미 그 생애에 있어서
하등의 죽음이 없는 것이다. 또 그것을 확립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이 인생의 유일하고 긴요한 일로 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생활을 이성의 법칙에 대한 종속과 사랑의 발현(發現)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 생활에 있어서 이미 한편으로 그가 다가가고 있는
생활의 새로운 중심의 빛을 보고, 다른 편으로는 이 빛이 그를 통해서
주위의 사람들 위에 일으키는 작용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가지 일이 그에게 생명의 불감성과 불멸성, 영원의 강화성(强化性)에
대한 의심할 바 없는 신앙을 준다. 불사(不死)에 대한 신앙은 그
누구에게서도 받을 수 없으며, 또 자신에게 불사를 설득할 수도 없다.
불사의 신앙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불사가 존재해야 할 것이며, 불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생활을 그것이 불사인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미래의 생활을 믿을 수 있음은 그저 자기 인생의 노역(勞役)을
다할 그 생활 속에서 이젠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건설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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