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공포는 인간이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관계를
혼동시키는 데서 생긴다.
그렇다. 만약 인생을 그 참된 의의에 있어서 생각해 본다면, 죽음의 이
이상스러운 공포는 무엇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가를 이해하기조차
곤란해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일로서, 만약 그대가 도깨비 같은 것이 어두움 속에서
그대를 위협하는 것을 잘 살펴본다면 두 번 다시는 그같은 유령 적인
공포를 일으키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잃는데 대한 공포는, 그저 인생이 인간에 대해서는
단순히 세계에대한 그의 합리적 의식이 그에게는 알려져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특수한 관계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또 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눈에는 보이는 두 가지 다른 관계, 즉 세계에 대한 그의 동물적 의식과
육체의 관계 속에 나타나 있는 일에서 생기는 것이다. 대체로 일체의
존재물이 인간에 대해서 나타나는 것은 첫째, 세계에 대한 그 합리적
의식의 관계로서, 둘째, 세계에 대한 그 동물적 의식의 관계로서, 셋째,
세계에 대한 그 육체의 물질적 관계로 서이다. 세계에 대한 그의 합리적
의식의 관계야말로 그의 유일한 생명임을 이해하지 않고, 인간은 자기의
생명이 아직도 세계에 대한 눈에 보이는 동물적 의식 및 물질의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개성 속에서 세계에 대한 그의
동물적 관계와 그를 조직하고 있는 물질의 관계가 깨뜨려짐과 동시에
세계에 대한 자기의 합리적 의식의 특수한 관계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개인적 동물적 의식의 단계(段階)에까지
다달은 물질 운동에서 생기는 것 같이 여겨진다. 이 동물적 의식이
합리적 의식으로 바뀌고, 이윽고 이 합리적 의식이 쇠퇴(衰退)되고, 다시
이전의 동물적 의식으로 되돌아가서 마침내는 동물적 의식도 쇠퇴되어
처음에 그로부터 나왔던 죽은 물질로 환원(還元)된다는 식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 그에게는 세계에 대한 그의 합리적 이식의 관계도
이러한 견해에 의해서 무엇인가 일종의 우발적인 불필요하고 멸망 적인 그
무엇같이 여겨진다. 이 견해에 의하면 세계에 대한 그의 동물적 의식의
관계는 소멸할 리 없는 것, 동물적 의식은 그 종속 속에 영원히 자기를
계속시켜 나가는 것이 되고, 세계에 이르러서는 이미 결코 영구히
소멸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 그 합리적
의식은 단순히 영구적인 아닐 뿐더러 그저 무엇인지 불필요한 쓸데없는
것의 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더구나 인간은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리 없음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거기에 죽음의 공포가 있는 것이다.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은 동물적 의식으로써 그들의 합리적 의식인 동물적 인간의 불멸,
즉 그 종족, 자손의 불멸은 그들이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는 합리적
의식이 불멸에 대한 그 요구를 만족키시기에 족한 것이다 라고, 그렇게
자신에게 납득시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또 이전에는 한번도
존재하지 안았던 생명이 갑자기 육체적 형태 속에 나타나서 그 속에서
소멸되어 다시 육체 속에 부활되고, 그리하여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자기에게 납득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을 믿던 지간에 생명을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의식의 관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들에게도 인간의 종족의 계속이 그 특수한 자아의
영구성을 찾아내지 않는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함이 분명한 것이다.
새로이 시작되는 생활의 관념은 그 속에 생명 중단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생명이 이전에도 없었던 것, 부단히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면
금후에도 또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어느 쪽 사람들에게도 지상의 생활은 물결이다. 죽은 물질로부터
개성이 만들어지고 개성으로부터 합리적 의식인 물결의 정점(頂点)이
만들어진다. 정상(頂上)까지 다 올라가버리면 물결, 즉 합리적 의식과
개성은 처음 나왔던 위치로 내려가서 거기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어느
쪽 사람에게도 인간 생활은 눈에 보이는 생활이다. 사람은 생장하고
성숙해서 죽는다. 그 사후(死後)에 그에게 이미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의 뒤에 그로부터 남은 것, 자손 혹은 사업마저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는 자신을 가엾이 여기고 자기 생활의 정지(停止)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그의 육체로부터 시작되어 같은 지상에서 끝마쳐진
그의 이 생명, 이 같은 그 자신의 생명이 다시 부활되더라도 그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만약 그가 이전에는 존재해 있지
않았더라도 갑자기 무(無)에서 생겨서 죽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특수함이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또 나타날 리 없음을 알고 있다.
인간은 자기가 결코 생겨났음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 왔으며, 현재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또 존재하리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자기가
불사(不死)임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생명이 물결이 아니라는 것,
이 생활에 있어서만 단순히 물결로서 나타나는 영원히 운동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기의 불사를 믿는 것으로 된다.
나는 죽게 될 것이다. 나의 생명은 끝날 것이다. 이렇게 생각된다.
이 생각은 나를 괴롭히고 나를 위협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는다 함은 무엇이나? 대체 무엇이 아까운 것이냐?
가장 흔한 관찰 점에서 보아 나라는 것은 무엇이냐? 우선 첫째로 나는
육체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 때문에 나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것이 아까운 것인가? 아무리해도 그런 것 같지 않다.
육체라는 물질은 언제 어디로 가든지 그 일부라도 상실되는 일은 없다.
그리고 보면 이 부분에서 나는 안전하다. 이 부분 때문에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유지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라고 사람은 말할 것이다. 그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고, 내가
아까워하는 것은 레프 니코라이뷔치 이반 세미요누 치이다
라고......그러나 보라! 모든 사람은 20년전의 그와는 전연 다른
사람이다. 사람은 날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내게 아까운 것인가? 아니다라고 사람은 말한다. 그렇지도 않다.
그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다. 아까운 것은 나라는 의식, 나의
자아이다라고......
그러나 이것이 그대의 의식이라 할지라도 항상 같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
아닌가? 여러 가지로 변화되어 왔던 것이 아니냐. 1년 전에는 어떤 다른
것이었고, 10년 전에는 더 다른 그 무엇이었고, 그 전에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었다. 그대가 기억하는 한에서도 그것은 내내 변화를 계속해
왔다. 어찌 네게는 현재의 너의 의식이 그토록 마음에 드는 것이냐?
그것을 잃는 것이 어찌 그다지도 애석한가? 만약 그것이 너에게는 항상
동일한 것이었다면 그럴싸도 하겠으나, 그것은 항상 변화만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는 그 처음을 모르고 그것을 발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너는 갑자기 그것에 끝이 없으라고, 지금 너의 내부에 있는 그
의식이 영원히 있으라고 바라는 것이다.
나는 철이 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끊임없이 진행해 왔다. 너는 네
자신이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면서 이 생활로 왔다. 그러나 너라는 특수한
자아로서 왔음을 알고 있다. 그로부터 나가고 더 나아가서 마침내 갈
길의 반쯤에 다달은 것인데, 거기서 갑자기 너는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놀라는 것도 아니고, 멈추어 버리고, 거기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네가 나온 곳 조차도 역시 못 보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나온 것이 아닌가? 너는 입구로 들어 왔으면서도 출구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너의 모든 생활은 육체적 생존을 통한 행진이었다. 너는 나아갔다.
전진을 서둘렀다. 그런데 너는 갑자기 네가 끊임없이 해오던 일이
완성되는 것이 아까워졌다. 너는 육체의 죽음 때문에 생기는 너의 상태에
대한 큰 변화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너의 출생에
있어서도 생겼던 것이다. 더구나 그런 일로부터 네게는 무엇하나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네가 지금 그것과 헤어지기를 꺼릴
정도로 좋은 일이 생겼던 것이다.
대체 너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너는 말할 것이다. 네게는
현재의 사상 감정을 가지고 현재의 세계관을 가진 세계에 대한 현재의
관계를 가진 네가, 애석해하는 것이다라고.....
너는 세계에 대한 너의 관계가 상실됨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관계란
대관절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에 있을까?
만약 그것을 네가 먹거나, 마시거나, 번식하거나, 집을 짓거나, 옷을
입거나, 다른 사람들이나 짐승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교섭을 가지는 일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모두 사고력 있는 동물로서의 만인의 인생에
대한 관계이며, 그 관계는 결코 소멸할 리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수백만이 되고, 그들의 종족은 불질의 각 조각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확실하게 보존될 것이다. 종족의 보존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모든 동물 속에 놓여진 것으로서,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이 없으리만큼 견고(堅固)한 것이다. 만약 네가 동물이라면
네게는 두려워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만약 네가 물질이라면 너는 그
영원성에 있어서 더욱더 보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동물 아닌 것이 상실됨을 두려워한다면 그 것은 네가
세계에 대한 특수한 합리적 관계를 가지고 네가 이 생존으로 걸어 들어온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것이 너의 출생과 더불어
생긴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은 네가 태어 나온 동물체와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죽음과도 교섭이 없어야 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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