哲學이야기

코멘터리.

별관신사 2016. 3. 20. 14:02

도서관을 나와 강의실로들어간 학생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정체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도서관은 과연 내가 보았던 그곳에 그대로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강의실 안에서 그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도서관이 그자리에 계속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할 수 없었다.
초조해진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서관이 그곳에 존재하는지

확인 좀 해줄래? 당황스러운 내색을 했지만 친구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잠시뒤 친구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도서관 앞인데 도서관은
멀쩡히 그자리에 있어 근데 무슨 일이야? 그는 안심한 듯 별일 아니야

라며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에게 또다른 불안감이 생겼다. 혹시
친구가 거짓말을 하고있는것은 아닐까? 도서관이 없어졌는데도 친구가
도서관이 있다고 거짓만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도서관이 그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친구는 자신에게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방금의 에피소드는
우리의 앎에 있어 타자가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잘 보여주고있다.

우리는 모든것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신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않은
유한자이다. 따라서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고 보완해 줄 타자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에피소드 속 학생의 불안을 잠재워준 그 친구가

바로 철학자 버클리에게 있어서는 다르 아닌 신이였다. 친구의 말을 믿지
못하면 그 학생은 강의실에 있는 내내 불안에 떨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
가지로 신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돌뢰즈는 버클리의
신 대신 삶에서 만나는 세속적인 타자를 그 자리에 도입한다. 방금 살펴본
학생의 친구처럼 말이다. 절대적인 타자든 세속적인 타자든 우리의 앎에

끼치는 타자의 효과는 이처럼 매우 강력한 법이다. 사실 내가 결코 볼 수
없는 등 뒤의 보푸라기도 쉽게 볼 수 있고 내가 직접 내려다보기 어려운
코도 가볍게 볼 수 있는것 역시 세속적인 타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