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 밖의 여러 도시를 거쳐 페테르스부르크에 머물다가 농사를
돌보기 위해 야스나야 폴리나야로 돌아갔다. 그는 이때 새로운 소설
창작에 대한 구상도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진로를 결정했다. 첫째는 문학에 대한 노작(勞作)이다.
둘째는 가정에 있어서의 의무인 농사에 대한 소작인들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토지개량을 실시하고 나의 이익금을 소작인들에게
분배하여야겠다. 이에 대한 가장 큰 방해는 자유주의가 자아내는
허영심이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착한 일을 한다면 그걸로써 충분하다.」
그러나 10월 마음이 뒤숭숭해진 그는 모스크바로 갔다. 그곳에
있으면서 페테르스부르크에 다녀온 어느 날 그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페테르스부르크는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의 명성은 땅에 떨어 졌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가로서의 위치가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다.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으나 지금은 안정되었다. 내겐 모든 역량이
줄기차게 준비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일반 독자여
아무렇게나 열을 내어도 좋다. 나는 다만 성실하게 창작에 힘을 기울일
뿐이다. 갖은 힘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날이 오면 또 .....
아무렇게나 성단(聖壇)에 침을 뱉어도 좋다.」
톨스토이의 모스크바 생활에 대하여 당시 그와 친하게 지냈던 팻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톨스토이는 굉장히 사치스러웠다. 그는 잿빛 수달피를 댄 가죽
잠바를 입고 몸놀림으로 반짝반짝 비치는 모자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쓰고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최신 유행의 지팡이를 한쪽 손으로 흔들면서
걸어다녔다.
그 당시 사교계의 청년들 사이엔 체조 연습이 유행하여 바리쇼이 드우미
트우로프카의 운동장까지 일부러 찾아가야만 되었다. 그 중에서 제일
인기 있는 것은 대롱으로 짠 창살 같은 무늬가 있는 양복을 입고 목마의
등에 올라타고 노는 목마라는 것이었다. .....」
1858년 1월 톨스토이는 단편 소설 [세 가지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비류코프는 [세 가지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에 대한 연구가 당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신령스러운 지혜와 자연과의 조화였다. 그
조화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간다는 것은 영원한 행복에의 길이며 동시에 죽음에 대한
슬픔을 없애는 좋은 방법이었다.」
[세 가지의 죽음]은 귀부인과 가난한 사람과 나무의 죽음을 말하며, 이
소설은 자연에 순종하는 자는 죽음에 대하여 태연하며 그것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이 심하다는 것을 간단하고도
요령 있게 그려낸 것이다.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에서도 자연과 책에 파묻혀 살았다. 농촌의 형편과
농사에 대하여 알려고 하였으며 농부들과도 어울리곤 하였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곰 사냥을 나갔다가 곰과 부딪쳐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1859년 여름 톨스토이는 본국으로 돌아온 투르게네프와 스파스코에에서
가끔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좋은 편이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그때에도 투르게네프를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만날
때엔 나쁜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투르게네프는 팻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톨스토이와는 언제든지 안정된 기분으로 대하고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다정스러운 기분으로 해어졌습니다.
우리들 사이엔 서로 외고집을 부려 시새움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언제든지 이해할 수 있으며 또 마음을
터놓고 한마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나는
그 사람과 다른 종류의 진흙을 만지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톨스토이는 가끔 모스크바에 드나들기도 하고 야스나야
폴리야나에서 조용히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허전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이런 우울한 심정을 없애기
위해서 농촌의 아이들을 교육시키는데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참회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외국에서 돌아와보니 농촌 생활이 몹시 고독한 기분을 자아냈으므로
나는 농민의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국민 학교 교육에 종사하는 것으로서
쓸쓸함을 잊으려 했다. 교육에 모든 정성을 기울임으로서 끝없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으며 교육 사업에 내가 열을 냈다는 것은 진심에서 한
것이었다. .....농사일의 처리 곤란한 점과 고독한 생활에서 오는
쓰라림은 모든 것에 대한 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의심하는 마음의 모든
것을 슬프게만 보는 눈이 나의 신경을 어지럽게 흔들고 있다.」
그 무렵 톨스토이의 친구들은 톨스토이의 농촌생활에 대해 바보와
이상한 사람의 우두머리 라는 별명을 지어 떠들어댔다.
그러나 보토우킨은 1860년 3월 6일에 팻트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투르게네프의 편지를 받아보고 레오 톨스토이가 다시 코카시아를
주제로 한 소설 창작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즐겁게
생각하였습니다. 조금쯤은 그가 바보 같은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위대한 힘을 가진 사내라고 그를 규정짓고 싶습니다. 내가 볼 때엔
그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가장 총명한 행동보다도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단언합니다.」
하지만 투르게네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레오 톨스토이는 여전히 이상한 사람이 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내는 이 세상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운명을 지닌 사내
같은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그 사내는 어느 때가 되어야만 마음을
송두리째 고쳐 대지(大地)에 발을 붙이게 될까요?」
톨스토이를 사귄 사람들은 거이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투르게네프는 더 심하게 오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빈정거리는 속에서도 조금도 거리낌을
느끼지 않고 쉴사이없이 자기의 길을 걷고 있었다.
보토우킨이 톨스토이의 인물평을 한 것은 진실로 사실에 가까운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해 7월초 톨스토이는 니콜라이 형의 문병을 위해 베를린에 가게
되었다.
그가 팻트에 보낸 편지를 보면 톨스토이의 상태를 알 수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농사 일의 무거운 부담이 나를 여지없이
실망의 구렁텅이로 끌어넣고야 말았습니다. 농사 관리에 대한 내 이상은
아득한 먼 곳에서 가물거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집안 일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 때문에 외국으로 떠난 후로는 한번도 소식을 전해 주지 않는
니콜라이 형이 병환과 누이 동생의 출발이 나를 끝없이 괴롭히며 무척
신경을 쓰게 합니다.
독신 생활, 이를테면 아내를 갖지 못하고 이 나이가 되도록 홀몸으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도 나를 몹시 괴롭게 합니다. 현재의 내겐 무엇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누이 동생이 혼자 여행한다는데 대한 걱정과
니콜라이형을 만나고 싶어서 나도 아마 내일쯤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토지와 농사에 대해서 자기의 경험을 팻트에게
적었다.
7월 말 그는 누이 동생과 조카들을 데리고 페테르스부르크와 슈덴친을
거쳐 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돌보기 위해 야스나야 폴리나야로 돌아갔다. 그는 이때 새로운 소설
창작에 대한 구상도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진로를 결정했다. 첫째는 문학에 대한 노작(勞作)이다.
둘째는 가정에 있어서의 의무인 농사에 대한 소작인들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토지개량을 실시하고 나의 이익금을 소작인들에게
분배하여야겠다. 이에 대한 가장 큰 방해는 자유주의가 자아내는
허영심이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착한 일을 한다면 그걸로써 충분하다.」
그러나 10월 마음이 뒤숭숭해진 그는 모스크바로 갔다. 그곳에
있으면서 페테르스부르크에 다녀온 어느 날 그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페테르스부르크는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의 명성은 땅에 떨어 졌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가로서의 위치가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다.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으나 지금은 안정되었다. 내겐 모든 역량이
줄기차게 준비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일반 독자여
아무렇게나 열을 내어도 좋다. 나는 다만 성실하게 창작에 힘을 기울일
뿐이다. 갖은 힘을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날이 오면 또 .....
아무렇게나 성단(聖壇)에 침을 뱉어도 좋다.」
톨스토이의 모스크바 생활에 대하여 당시 그와 친하게 지냈던 팻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톨스토이는 굉장히 사치스러웠다. 그는 잿빛 수달피를 댄 가죽
잠바를 입고 몸놀림으로 반짝반짝 비치는 모자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쓰고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최신 유행의 지팡이를 한쪽 손으로 흔들면서
걸어다녔다.
그 당시 사교계의 청년들 사이엔 체조 연습이 유행하여 바리쇼이 드우미
트우로프카의 운동장까지 일부러 찾아가야만 되었다. 그 중에서 제일
인기 있는 것은 대롱으로 짠 창살 같은 무늬가 있는 양복을 입고 목마의
등에 올라타고 노는 목마라는 것이었다. .....」
1858년 1월 톨스토이는 단편 소설 [세 가지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비류코프는 [세 가지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에 대한 연구가 당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신령스러운 지혜와 자연과의 조화였다. 그
조화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간다는 것은 영원한 행복에의 길이며 동시에 죽음에 대한
슬픔을 없애는 좋은 방법이었다.」
[세 가지의 죽음]은 귀부인과 가난한 사람과 나무의 죽음을 말하며, 이
소설은 자연에 순종하는 자는 죽음에 대하여 태연하며 그것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이 심하다는 것을 간단하고도
요령 있게 그려낸 것이다.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에서도 자연과 책에 파묻혀 살았다. 농촌의 형편과
농사에 대하여 알려고 하였으며 농부들과도 어울리곤 하였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곰 사냥을 나갔다가 곰과 부딪쳐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1859년 여름 톨스토이는 본국으로 돌아온 투르게네프와 스파스코에에서
가끔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좋은 편이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그때에도 투르게네프를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만날
때엔 나쁜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투르게네프는 팻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톨스토이와는 언제든지 안정된 기분으로 대하고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다정스러운 기분으로 해어졌습니다.
우리들 사이엔 서로 외고집을 부려 시새움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언제든지 이해할 수 있으며 또 마음을
터놓고 한마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나는
그 사람과 다른 종류의 진흙을 만지는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톨스토이는 가끔 모스크바에 드나들기도 하고 야스나야
폴리야나에서 조용히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허전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이런 우울한 심정을 없애기
위해서 농촌의 아이들을 교육시키는데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참회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외국에서 돌아와보니 농촌 생활이 몹시 고독한 기분을 자아냈으므로
나는 농민의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국민 학교 교육에 종사하는 것으로서
쓸쓸함을 잊으려 했다. 교육에 모든 정성을 기울임으로서 끝없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으며 교육 사업에 내가 열을 냈다는 것은 진심에서 한
것이었다. .....농사일의 처리 곤란한 점과 고독한 생활에서 오는
쓰라림은 모든 것에 대한 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의심하는 마음의 모든
것을 슬프게만 보는 눈이 나의 신경을 어지럽게 흔들고 있다.」
그 무렵 톨스토이의 친구들은 톨스토이의 농촌생활에 대해 바보와
이상한 사람의 우두머리 라는 별명을 지어 떠들어댔다.
그러나 보토우킨은 1860년 3월 6일에 팻트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투르게네프의 편지를 받아보고 레오 톨스토이가 다시 코카시아를
주제로 한 소설 창작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즐겁게
생각하였습니다. 조금쯤은 그가 바보 같은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위대한 힘을 가진 사내라고 그를 규정짓고 싶습니다. 내가 볼 때엔
그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가장 총명한 행동보다도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고 나는 단언합니다.」
하지만 투르게네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레오 톨스토이는 여전히 이상한 사람이 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내는 이 세상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운명을 지닌 사내
같은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그 사내는 어느 때가 되어야만 마음을
송두리째 고쳐 대지(大地)에 발을 붙이게 될까요?」
톨스토이를 사귄 사람들은 거이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투르게네프는 더 심하게 오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빈정거리는 속에서도 조금도 거리낌을
느끼지 않고 쉴사이없이 자기의 길을 걷고 있었다.
보토우킨이 톨스토이의 인물평을 한 것은 진실로 사실에 가까운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해 7월초 톨스토이는 니콜라이 형의 문병을 위해 베를린에 가게
되었다.
그가 팻트에 보낸 편지를 보면 톨스토이의 상태를 알 수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농사 일의 무거운 부담이 나를 여지없이
실망의 구렁텅이로 끌어넣고야 말았습니다. 농사 관리에 대한 내 이상은
아득한 먼 곳에서 가물거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집안 일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 때문에 외국으로 떠난 후로는 한번도 소식을 전해 주지 않는
니콜라이 형이 병환과 누이 동생의 출발이 나를 끝없이 괴롭히며 무척
신경을 쓰게 합니다.
독신 생활, 이를테면 아내를 갖지 못하고 이 나이가 되도록 홀몸으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도 나를 몹시 괴롭게 합니다. 현재의 내겐 무엇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누이 동생이 혼자 여행한다는데 대한 걱정과
니콜라이형을 만나고 싶어서 나도 아마 내일쯤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토지와 농사에 대해서 자기의 경험을 팻트에게
적었다.
7월 말 그는 누이 동생과 조카들을 데리고 페테르스부르크와 슈덴친을
거쳐 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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