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사람은 갈등을 일상적 실존의 고유한 부분으로

별관신사 2014. 11. 19. 16:33

사람은 갈등을 일상적 실존의 고유한 부분으로 받아 들여왔는데 왜냐하면 그는 경쟁, 질투,
탐욕, 취득심, 공격 등을 삶의 자연스런 방식으로 받아 들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한
생활방식을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액면 그대로의 사회구조를 받아 들이는 것이며 그래서

존경할 만함의 패턴 속에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사로잡혀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들 대부분이 엄청나게 존대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과
가슴을 점검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그리고 나날의 삶 속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점검해 보면, 우리가 사회의 패턴(양식 혹은 모형)에 순응하는 한 삶은 전장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걸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그리고 어떤 종교적인 사람도
그런 사회를 수락할 수 없겠거니와-우리는 비로소 사회의 심리적 구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사회의 사물들로서 풍부하다. 사회가 우리 속에 만들어 놓은 것,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은 탐욕, 질투, 분노, 증오, 선망, 불안 등인데-우리는 이 모든
것들로서 매우 풍부한 것이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은 가난을 설교해왔다. 승려는 승복을 입고,

이름을 갈고, 머리 깎고, 암자에 들어가 가난과 순결을 맹세한다. 동양에서는 허리에 걸치는
간단한 옷 한 벌, 승복 한 벌에, 하루 한끼를 먹으며, 우리는 모두 그런 가난을 존경한다.
그러나 가난의 옷을 입은 사람들도 내적,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사회의 사물들로 풍부한데,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지위와 명망(위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은 이런 지위 혹은 저런
등급에 속해 있고, 이런 종교나 저런 종교에 속해 있으며, 여전히 한 문화, 한 전통의 분열
속에 살고 있다. 그런 가난이 아니다. 가난은, 옷이 좀 더 많고 먹을 게 좀 더 많다고

하더라도-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는 과시를 하려는 충동이 있다. 마음이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난은 놀랄 만하게 아름다운 것이 된다. 우리는 내적으로 가난하게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아무 요구, 아무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그렇다, 아무것도! 이 내적
가난만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으며 거기엔 아무 갈등도 없다. 그러한 삶은 어떤 교회에서도

혹은 어떤 사원에서도 발견될 수 없는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