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가는 명상. 180

깨달음이란 말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깨침의 원어이다. 깨침이란 깨어짐이다. 깨어짐이란 무슨뜻인가? 무엇이 깨어진다는 뜻인가? 나다 라는 벽이 깨어진다는 뜻이다. 나다 하는 그 벽이 깨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뉘어 있던것이 통하고 분리되어 대립하던 나와 남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라서 이웃과 우리가 하나가 되고 나와 우주가 하나가 되는 그런 세계가 곧 깨침의 세계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不二)의 세계이다. 나와 남 그리고 이것과 저것이 사라져버린 존재계 지금 여기가 나타날 때 거기에 진정한 자비의 세계가 이루어진다.

삶은 하나의 펼친 손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다르다. 주먹이 닫혀 있을 때 그 안에는 하늘이 없고 공기도 없으며 숨 쉴 공간도 없다. 그대는 그대의 주먹 쥔 손으로 하늘을 움켜 잡을 수 없다. 그 주먹은 하늘을 놓쳐 버린다. 하늘이 거기 있고 그대의 손이 열려 있을 때 그때 그대는 손에 넣을 수 있다. 설명은 움켜 잡는 것 문닫음 한정 짓는 것이다. 그 때 삶은 새어 나간다. 웃음이라 해도 차라리 철학보다는 위대하다. 어떤 사람이 삶에 대하여 웃을 때 그는 곧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진정한 깨달은 사람들은 웃었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은 몇세기 이후에도 들릴 수 있다. 마하가섭은 웃었다. 그이 웃음은 지금까지 들리고 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은 그의 웃음 소리를 들을 것이다 마치 수세기를 통해 끊임없이 강물이..

고라크는 말한다.

죽어라 오 요기여 죽어라 죽음은 달콤하다. 그리고 고라크는 말한다. 나는 죽음을 가르친다. 내가 깨어났을 때 겪었던 그 죽음을 나는 가르친다. 그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잠의 죽음이였다. 내가 아니라 에고가 죽었다. 내가 아니라 이원성이 죽었다. 이원성이 죽고 일원성이 태어났다. 시간이 죽고 나는 영원을 만났다. 작고 옹색한 삶이 부서지고 물방울은 바다가 되었다. 그렇다 물방울이 바다로 떨어 질 때 이 물방울은 분명히 죽는다. 물방울로써의 그는 죽는다. 그러나 다른 의미 에서 보면 물방울은 난생 처음 드넓은 삶을 얻는다. 그는 다시 바다로 살아 남는다. 용해되어 죽음으로써 합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방울은 신상한 바다가 되어 존재 하게 된다. 자취도 없이 사라지므로써 드디어 추구하는 바가 완성..

까비르예찬.

나의 풍요로움을 보라! 나는 힌두교도이자 이슬람교도이며 기독교도 이자 시크교도이자 배화교도이다. 그뿐 아니라 나는 유신론자이자 유신론자이다. 나는 인류의 모든 유산을 물러 받았다. 나는 그 어느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차르바카에서 붓다까지 나는 모든것을 물러 받았다. 인류의 유산이 모두 그대의 것이 될 수 있다. 인류의식의 진화가 모두 그대의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받아 들이는데 너무나 인색하다. 힌두교를 택한 사람은 한쪽 구석만을 차지한다. 그리고 불구자가 되어 그 구석에서 산다. 그 구석은 너무나 좁아서 거동조차 할 수 없다. 참다운 종교인은 신비가들을 모두 받아 들인다. 붓다와 마하비라 그리스도 짜라투스트라 노자 나나크 등을 모두 받아 들인다. 그들 모두는 내가 되었다. 그들 모두는 그대가..

여성은 내면의 근원이다.

아니 확실히 가장 깊은 그곳의 원천이다.그녀는 바로 한가운데 있다. 당신은 가장 깊은 핵을 영혼이라 부른다. 당산의 가장 외면인 곳을 육체라 부른다. 바로 그 양자 사이가 정이며 마음이다. 아담은 세상으로의 모험에 이브를 따랐다. 그리고 또한 그 예수에 관한 우화도 그와 똑같다. 예수는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왜 처녀인가? 외냐하면 만일 당신이 옳게 이해한다면 처녀는 순수한 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고의 깨끗함이다. 사고는 뱀으로 상징된다. 사고의 방법은 교활하다. 당신은 자신의 사고를 주시해 본다면 왜 그것이 뱀으로 상징 되는지 이해할 것이다. 사고는 아주 교활하다. 뱀처럼 다리없이 움직인다. 그것은 당신과 더불어 꿈틀거린다. 그것은 아주 교활하고 영리하며 기만적이다. 뱀처럼..... 그것은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

인간이 태어나는데 무슨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이 자라는데 무슨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호흡을 하는데 무슨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모든것은 저절로 일어난다. 그런데 왜 애를 쓰는가? 삶의 호흡에 자신을 내맏기라. 애쓰지도 말고 흐름을 거스르지도 말라. 헤엄을 치지도 말고 흐름에 내맏기라. 삶의 강물을 따라 흘러가라. 아무런 목적도 방향도 없이 하늘을 떠가는 흰구름이 되라.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것 이것이 궁극의 개화(開花)다. 오쇼의 장자강의 중.

어떻게 해야 깨달음이 일어나는가?

깨달음은 구도를 그만 둔 구도자에게 일어난다. 온 힘을 다해 구하고 또 구하는 가운데 처절하고 처절하게 실패한 사람에게 깨달음은 일어난다. 그런 처절한 실패 속에서 어느 순간 홀연히 한줄기의 빛이 내려온다. 처절하게 절망했을 때 깨달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질 때 구도가 떨어져 나갈 때 깨닫고 싶은 마음마져 떨어져 나갈 때 홀연히 깨달음이 찿아온다. 그리고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깨달음은 바로 이렇게 치요노에게 일어났고 붓다에게 일어났으며 지금도 누군가에게 일어나고 있다. 오쇼의 위대한 만남 중.

깨달음은 언제나 난데없이 일어 난다.

깨달음은 언제나 별안간 일어난다. 그렇다고 깨달음이 아무에게나 별안간 얼어난다는 말이 아니다. 그날 밤 치요노에게 깨달음이 일어났다. 그녀가 해 낸 각고의 수행은 깨달음을 일으킨것이 아니라 어떤 노력을 해도 에고의 나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깨우침을 일으켰다. 치요노는 처절한 절망에 도달했다. 그런 절망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것을 다 해 보았을 때 찿아온다. 그런 절망이 찿아올 때 희망이 나타난다 그런 절망 속에서 에고는 산산조각이 나기 때문이다. "나"라고 주장할 자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 절정에 도달했을 때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그대는 미지근한 에고를 놓을 수 없다. 미지근한 에고는 여전히 꿈을 꾼다. 그래서 미지근한 에고를 놓는 일은 불가능 하다. 그런 에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누가..

마음이 장애이다.

그대로 하여금 진리를 알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것은 바로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마음은 끝없이 돌아가는 영화 필름처럼 그대를 둘러싸고 있고 그대는 그 영화에 정신을 빼앗겨 있다. 끝없이 계속되는 환상이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그 영화에 정신이 다 쏠려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계속하여 놓치고 있다. 마음이라는 것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환영같은 것으로써 꿈꾸는 능력 이상의 것이 아니다. 마음은 끝없이 계속되는 온갖 꿈에 불과하다. 과거에 대한 기억의 꿈 미래에 대한 꿈 이상적인 현실에 대한 꿈 거대한 야망과 성취의 꿈들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꿈과 욕망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마음이 거대한 성곽처럼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고기가 바다를 모른채로 물속에서 죽어 사라지듯이 그대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