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생존이 불가능한 개선(改善)으로 지향된 사람들의 고투(苦鬪)는

별관신사 2013. 7. 3. 02:58

생존이 불가능한 개선(改善)으로 지향된 사람들의 고투(苦鬪)는
유일하고 참된 생활의 가능성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이다.


오직 동물적 생존의 덧없음과, 거짓을 아는 일과, 자기 속에 유일한
사랑의 참된 생명을 해방시키는 일만이 사람에게 행복을 준다. 더구나 이
행복을 얻고자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생존이 개성이

서서한 멸망과, 피하기 어려운 개성의 죽음으로서 접근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생존의 기간을 통해서 이 멸망되어 가는 개성을 공고히 하고, 그 육욕을

만족시키고, 인생의 유일한 행복, 즉 사랑의 가능을 자기에게서
빼앗아가기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아니 그저 그것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활동은 생존의 전 기간을 통해서 그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열락(悅樂)의 획득과 고통으로부터의 자기 구출,
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도피에 지향되고 있다.

그러나 열락의 증가는 쟁투(爭鬪)의 긴장과 고통에 대한 감각을
증대시키고 죽음을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죽음의 접근을 자기로부터
숨기려 함에는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 즉 열락을 증대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열락의 증가는 그 한도에 도달하면, 그 이상으로 증대되는 일은
없고, 도리어 고통으로 변형되고 나중에는 그저 고통에 대한 감각과 고통
속으로부터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만이 남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해서 거짓된 순환이 나타난다. 하나가 다른 것이 원인이 되고,
또다른 하나가 다른 것을 조장시킨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된 공포는, 그들에게 열락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일이 (부유한

생활의 모든 열락) 그 성질상 만인에게 골고루 배분될 수 없는 것이므로
남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않으면 안된다. 폭력과, 악으로써, 더구나
사랑의 원천인 사람들에 대한 호감(好感)의 가능성을 없애므로써 획득해야

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연락은 항상 사랑과는 상반되는 것이며, 그
정도가 더하면 더할수록 사람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행복인 사랑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합리적 의식이 인정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 즉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명백한 동물아의 이성에 대한 복종으로서―인간에게
만인에 대한 호의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그 부단한 복종으로서―또한 그

결과 나타나는 사랑의 활동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있다. 도리어 인생은
다만 만인에 대한 호의의 가능을 배제하는 일시적인 육체적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선교를 신봉(信奉)하고 일정한 생존 조건을 조직하는데 그
이성을 지향하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인생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은, 그
생존의 보다 나은 외적 장비(外的裝備)에서 생기는 것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그를 생존의 보다 나은 외적 장비는 사랑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 사람들에 대한 큰 폭압과 관계가 깊은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장비가 우월하면 할수록 그들에게 남는 사랑의 가능, 생활의 가능은

더욱더 적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그 이성을 동물적 생존의 행복이 만인에게 골고루 영(零) 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용하지 않고, 그 영을 증감(增減)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이 영의 가상적 증가나 증대를 향해서 아직 응용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이성을 모조리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無), 즉 영은 아무리 거기에 영을 더해도 마침내는 다른

모든 영과 같은 영으로 끝남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또 모든
사람들의 동물아의 생존은 똑같이 불행한 것이며 어떠한 외적 조건으로써
하더라도 행복하게 될 수 없는 것이라 함을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존재도 육체적 존재로서는 다른 존재 이상으로 행복하게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이것은 마치 호수(湖水)의 표면은 어디로 가든지
일정한 수준(水準) 이상으로 물을 높일 수 없는 것과 법칙에 의하는

것임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이성을 왜곡(歪曲)해 버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지 않고, 그 왜곡된 이성을 이 불가능한 일에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호수면의 군데군데에 물을 높이 하려는 이

불가능한 사업 속에―목욕하는 아이들이 「삐이루를 만든다.」라고 하면서
목욕하는 것과 같은 일 속에―그들의 생존은 모조리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생존은 많든 적든 간에 좋고 행복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가난한 노동자나 병자의 생존은 ―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것은 나쁘고 불행한 것이다. 부자나 건강한 사람의 생존은 좋고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이성의 전력으로 나쁘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병적인 존재를 몰아 버리고, 자신을 위해서 좋고, 부유하고, 건강스러운
생존을 건설하는데 경주하고 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몇 차례고 이와 같이하여, 이러한 여러 가지의 가장

행복스러운 생활을 조직하고 지탱하는 방법을 만들어 내기에 속이
썩히면서, 이 상상적 최고(그들은 그 동물적 생존을 이렇게 부른다)
생활의 프로그램을 자손에게 전한다. 어떤 자들은 남들 앞에서 그들이

양친의 시설(施設)에서 물려받은 그 행복한 생활을 될 수 있는 대로 잘
유지하도록 애쓰고, 혹은 새롭고 한층 더 행복한 생활을 만들어 보려고
애쓴다. 사람들에게는 이어받은 생존의 조직을 유지 하거나, 또는 그들의
생각에는 보다 나은 새로운 생활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사람들은 이 속임수 속에서 서로 지지(支持)하면서,
때로는 그들 자신에게도 뚜렷하게 무의미한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물장난

치기 속에 인생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늘 진리의 가르침 속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활의 실례에서도,
더우기 자기 자신의 진정된 마음 속에서도, 이성과 사랑의 소리가 끝까지

절대로 사라지는 일이 없는 마음 속에서도, 부단(不斷)히 듣고 있는 참된
생활로의 부르짖음에 조소(嘲笑)로써 외면하리만큼 그러한 생각을 굳게
믿게 되는 것이다.

즉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이성과 사랑의 생활의
가능성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길이 타오르는 외양간에서 끌려
나오는 양떼의 위치에 자기 몸을 두는 것이다. 양떼는 사람들이 그들을

불 속으로 던지는 줄로만 알고 죽을 힘을 다해서 그들을 구해 내려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괴롭히고, 그들만이 가능한
행복과 생활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