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知訥, 1158~1210) 이후 한국 불교는 새로울 것이 없다. 지눌에 의해 전개된 선종 운동은 언제나 한국의 불교 전통이 고수해온 단 하나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오늘날 지눌에 대한 평가는 이렇듯 성대하다. 지눌의 어떤 불교적 활동이 이런 평가를 내리게 하는가. 한국불교사의 중대한 이정표를 세운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선종의 전통과 교종과의 분쟁
중국에서 시작한 불교의 선종(禪宗)이 뜻밖에 우리나라에 와서 분란을 일으킨 것은 고려시대 때이다. 불교에는 본디 교종(敎宗)밖에 없었다. 아니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교종이니 선종이니 하는 구분조차 없었다. 선종이 생겨나자 전통적인 불교는 갈라서 교종이라 불렀을 따름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글로 옮기고, 이를 경전 삼아 수행하는 법이 전부였던 불교에 선종의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한 이는 달마(達磨). 선종은 인도 출신인 그가 중국에 와서 퍼뜨린 것이었다. 신라 말과 고려 초 사이에 우리나라의 승려들도 선종의 가르침을 받아왔다. 불교 국가를 표방한 고려에서 마음껏 교세를 확장한 선종은 고려 중엽에 이르러 드디어 교종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보다 자기 쪽의 우월을 앞세우는 분쟁으로 나가고 말았다.
교선(敎禪)의 분쟁은 이미 중국에서 배태되어 있었다. 중국의 선종은 자신들이 지닌 권위와 정통성을 제고하려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선종이 어느 시점 중간에서 돌출하지 않았고,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달마에 이르는 엄연한 법계(法系)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의미를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나, 28대의 구체적인 이름까지 올리는 가운데 무리가 따랐다. 심지어 선종이 자랑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하루는 범왕이 영취산에 계시는 부처님을 찾아가 꽃을 공양드리고 설법을 청하였다. 부처님은 사자좌에 오르시어 꽃을 들어 손가락으로 만지시고는 아무 말도 없으셨다. 회중의 아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존자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정법(正法)을 너에게 부촉하겠노라, 가섭아. 이를 받아 후세에 전하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저 유명한 염화미소(拈花微笑)라는 말이 태어난 이야기이다. 이는 [대범천왕문불결의경 (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나온다. 그런데 이 경전이 출처 불명의 위경(僞經)이다. 경전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경전에 들어 있는 말이니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화미소는 의심의 여지없는 불교 이야기로 자리 잡아 있거니와, 선종의 특징인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로 즐겨 인용된다. 이것은 선종 쪽에서 조작한 빛나는 스토리텔링이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글로써 정리하지 않고 가르침 밖의 따로 전하는 맥이 있다고 주장하는 선종의 구호이다. 그러나 이 말조차도 뿌리가 박약하다. 문제는 선종이 사람들 속에 강력히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고, 교종과 어깨를 겨루는 단계에 이르자 분쟁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 |
조계종의 중흥조로서 지눌의 생애
지금 한국 불교의 중심은 조계종(曹溪宗)이다. 성격과 뿌리를 달리하여 여러 종단이 있으나, 조계종의 교세는 한국 불교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조계종의 출발을 찾자면 우리는 멀리 신라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도의(道義) 선사가 그 주인공이다.
도의가 중국으로 선종의 향기를 한 몸에 받으러 떠난 해는 선덕왕5년(784), 이미 기울어가는 신라 땅의 새 생명을 거기서 찾으려 했음일까. 스승 서당 지장(西堂地藏)으로부터 받은 남종선(南宗禪)은 혜능(慧能)에게 그 뿌리가 있겠지만, 헌덕왕13년(821), 근 40년 만에 귀국하여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821년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해이다. 지금 조계종은 이 선종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가까이 직접적인 조계종의 출발을 대자면 우리는 이 사람을 지나칠 수 없다. 바로 고려 중엽의 승려 지눌이다.
지눌의 속성은 정(鄭),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이다.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국학의 학정을 지낸 광우(光遇)였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건강이 언제나 걱정이었다. 간난아이 때부터 허약하여 사람구실이나 하겠나 싶었는지, 아버지는 최후의 수단으로 불법(佛法)의 힘에 매달렸다. 살려만 주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용케 여덟 살이 되자 지눌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부처와의 약속은 지엄한 법, 아버지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에 속한 종휘(宗暉)에게 맡겨 아들을 출가시켰다.
수행하는 동안 지눌은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았다. 배울만한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청했다. 24세 때인 1182년 승과에 급제한다.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극심한 때였다. 무신난으로 인해 정변이 이어지고 사회적인 혼란 또한 걷잡지 못하는 때였다. 사실 교선(敎禪)의 갈등은 교리상의 문제이기도 하였으나, 재산과 권력을 둘러싼 다툼이 그 본질이었다고 해야 옳다. 권문세가는 절을 이용해 재산을 빼돌리고, 새로 들어선 무인정권은 자신의 비호세력을 찾고 있었다. 이런 일에 승려는 가로 세로로 얽혔다.
이 와중에 수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눌로서는 교선의 분쟁을 어떻게 해결할지 늘 고민하였다. 그는 분쟁의 가장 치열한 시대를 살다 간 사람이었다. | |
결사운동을 통한 교종과 선종의 분쟁 타파
승과에 급제한 이후 지눌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결사운동을 약속하였다. 불교 본연의 모습이 아닌, 분쟁의 소용돌이에서 싸움꾼으로 전락하는 승려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생애를 걸고 해결사의 역할을 해낸 데에는 크게 세 번의 계기가 있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세 번의 심기일전(心機一轉)이라 말한다.
첫째는 승과에 급제한 직후 전라도 나주의 청량사에서 이루어졌다. 지눌은 이곳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은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육조단경]은 중국 선정의 제6조 혜능(慧能)이 지은 책이다. 지눌은 이 깨달음을 통해 혜능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나중에 송광사의 산 이름을 조계산으로 한 것 또한 혜능의 조계 보림사에서 따왔다.
둘째는 1185년 충청도 예천의 보문사에서 이루어졌다. 지눌은 여기서 교종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3년간 [화엄경] 공부에 몰두한다. 교종의 여러 승려를 찾았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공부하여 깨치기로 마음먹었다. [화엄경]에서는 여래출현품의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다”라는 구절이,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신론]에서는 “몸은 지혜의 그림자”라는 구절이 다가와 크게 깨달았다.
지눌은 생각했다.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이는 결코 둘이 아닌 하나다. 그는 곧 행동으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옮겼다. 1190년, 처음에 약속한 동지를 모은 뒤 정혜사(定慧社)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다. 결사의 이름은 나중에 수선사(修禪社)로 바꿨으나, 이 결사문은 한국 불교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명문이었다.
셋째는 1197년 지리산의 상무주암에서 이루어졌다. 지눌의 결사운동이 10여 년 이어지는 동안 성과와 함께 문제점도 드러났다. 결사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는 지눌의 뜻과 행동에 방향을 같이 하면서도 제 고집과 이익을 쉬 버리려 하지 않았다. 지눌을 그들을 설득하는 데에 지쳐버렸다. 상무주암으로 들어간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실패로 돌아가는 듯하던 결사운동은 시련 끝에 더욱 단단해졌다. 지눌은 송나라 대혜(大慧)의 [어록]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대혜는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가리지 말고 참구(參究)해야 한다. 눈이 열리기만 하면 선은 그대와 함께 있다’ 말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눌은 심기일전을 통해 언제나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갔다. 1205년 지리산에서 송광사로 옮기고, 수선사 곧 오늘날 조계종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 |
돈오점수 정혜쌍수로 만든 한국 불교의 전통
지눌은 한국 조계종의 사상적 기초를 수립한 중흥조로 불린다. 돈오점수(頓悟漸修) 곧 단박에 깨닫고 점진적으로 수행해 나간다, 정혜쌍수(定慧雙修) 곧 선정과 지혜를 함께 수행해 나간다는 선 수련의 방법을 제창하고, 화엄종의 사변적 형이상학을 선종의 체험에 연결시켰다. 무엇보다도 혼자만의 수행이 아닌 결사운동을 통한 조직과 대중운동을 경험하게 했다는 데서 큰 평가를 받는다. 학계에서는 지눌 이후의 수선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80여 년에 걸친 수선사에서의 지눌과 그 제자들의 노력에 의해 송광사는 조선 왕조가 개창하기까지 고려시대 한국불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지눌을 필두로 열여섯 명의 국사가 수선사에서 주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광사의 수행을 중시하는 경향과 지눌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된 수행생활을 하는 승려들로 인해 송광사는 조선 왕조 이래 대대로 삼보 중의 하나인 승(僧)을 대표하는 절로 알려져 있다.”(심재룡, [지눌연구]에서)
생전의 지눌을 가장 크게 지원한 사람은 당시의 왕인 희종(1204~1211)이었다. 정혜사라는 이름을 수선사로 바꾼 것도 이 왕 때였다. 지눌이 1210년 3월 법상(法床)에 앉은 채 입적하자 왕은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에 추앙하였다.
지눌의 돈오점수에 이의를 제기한 이가 성철(性徹, 1912~1993)이었다. 성철은 오랫동안 지지되어 왔던 지눌의 종합적 접근 방식을 이단이라고 규정하였다. 돈오점수가 아닌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선종 수행의 관행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불교적 논쟁을 덧붙일 능력이 필자에게는 없다. 다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성철의 그 같은 주장은 역설적으로 지눌이 한국 불교 전통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심재룡, [지눌연구]에서)는 말로 평가를 대신한다. | |
글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