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의 변명,

별관신사 2012. 10. 21. 05:47

 

     
    대화하는 사람 : 소크라테스 ,멜레토스

    장면 : 법 정

     

    변 명

    1 아테네 인( 1장은 변명 의 서론에 해당된다. 2장은 문제 제기이며
    3장에서부터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시작된다.) 여러분! (당시 아테네에서는
    재판관을 30세 이상의 성년 남자들 중에서 추첨으로 선출했다. 임기는
    1년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때에는 그 수는 5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아테네인 여러분 이라고 한 것은 재판관을 지칭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재판관 여러분 이라고 하지 않고 아테네인
    여러분 이라고 한 것은 재판관들이 그를 재판할 도덕적 권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이나를 고발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가를 잊을 정도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거의 한
    마디도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많은 거짓말
    가운데에는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들은 나의
    웅변의 힘에 기만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여러분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입을 열어 내가 결코 대 웅변가가 아님을 입증하자마자 그들의 거짓말이
    탄로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들이 나의 웅변에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한 것은 나에게는 가장 파렴치한 짓으로 보입니다. 웅변의 힘이라는
    말이 진실의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그들의 의미가 이와
    같다면, 나는 웅변가임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이와는 얼마나 다릅니까!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전혀 진심을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에게서
    모든 진실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맹세코 그들이 늘 하듯이
    미사여구로 적당하게 수식된 상투적인 연설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순간 내 마음에 떠오르는 어구와 논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정당함을 나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오,
    아테네인 여러분! 내 나이로 보아서 나는 여러분 앞에(말을 교묘히
    꾸며대는) 나이 어린 연설 가로 나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일을 나에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곧 내가 평소의 태도로 나 자신을
    변호하더라도. 그래서 여러분이 내가 평소 시장의 환전상의 테이블이나
    기타 장소에서 늘 쓰고 있던 말을 사용하는 것을 듣더라도, 놀라지 말고
    이 때문에 내 말을 방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70세를
    넘었고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 만큼 나는 여기서 쓰는 어법에
    대해서는 외국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나를
    외국인처럼 보아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외국인이 자기
    나랏말로 자기 나라의 방식에 따라 말한다면 용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까? 내가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그것이 좋든 좋지 않든 간에 괘념하지 말아 주십시오. 내 말이
    진실한가 하는 점만을 고려하고 이 점에만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말하는 자는 진실을 말하고 재판관은 정당하게 결정하도록 합시다.


    2 우선 나는 보다 오래 된 고발과 최초의 고발 자들에 대해 대답하고,
    다음에 그 후의 고발과 고발 자들에 대해서 대답하겠습니다. 오래 전부터
    많은 고발 자들이나를 여러분에게 거짓 죄목으로 수년에 걸쳐 고발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들을 아뉴토스 ( 아뉴토스는 원고 멜레토스의
    변호인으로 민 주파의 유력한 정치가. 멜레토스는 아뉴토스의 권유에
    따라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고 한다.)와 그 일당보다 더 두려워합니다.
    물론 아뉴토스와 그 일당도 그들 나름대로 위험하기는 합니다만 -----.
    그러나 여러분들이 어릴 때부터 거짓말로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소크라테스라는 현인은 천상의 일을 사색하고 지하의 일을 천착하며 나쁜
    일을 좋은 이로 보이게 하는( 무력한 이론을 유력한 이론으로 만든다 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말은 소피스트에 대한 비난이기도 했다.) 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한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퍼뜨린 사람들이 내가 두려워하는 고발 자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러한 탐구를 하는 사람은 체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상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발 자는 다수이며
    오래 전부터 그들은 나를 고발해 왔고 여러분이 지금보다도 더 감수성이
    예민할 때부터-----소년 시절, 또한 어떤 사람은 청년이었을
    때부터-----고발해 왔으며, 아무도 대답할 사람이 없는 결석 재판에서
    나를 고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곤란한 것은 나는 고발 자의
    이름들을 알지 못해서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희극 작가 한사람( 구름
    이라는 희극으로 소크라테스를 조롱한 아리스토파네스를 말한다.)을
    우연히 아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 질투심과 원한 때문에 여러분을
    설득해 온 사람을 ---그들 중에는 우선 그들 자신을 설득해야 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가장 다루기 어렵습니다. 나는
    그들을 여기에 소환하여 그들에게 반대 심문을 할 수도 없고 따라서 나는
    단지 나를 방어하는데 있어서 그림자와 싸워야 하고 대답할 자가 한 명도
    없이 논박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도 이미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나의 반대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최근의 고발 자이며 또 하나는 예로부터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내가 우선 후자에 대해서 답변하는 정당성을 인정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후자의 고발을 최근의 고발보다
    훨씬 이전부터 더욱 자주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나는 변명을 시작해야 하며, 짧은 시간 내에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비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의 성공이
    나나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라면 내가 성공할 수 있기를, 또는 나의 변명이
    쓸모 있는 것이 되었으면!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는 이
    일의 성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신이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며 법에 순종하여 인제 변명을 시작하렵니다.


    3 나는(여기서부터 10장까지는 오래 된 고발 자들에 대한 변명이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시작하렵니다. 곧 나에 대한 비방을 불러일으킨
    고발-----사실상 이 고발은 멜레토스(멜레토스는 시인으로 표면상 고발
    자를 대표하고 있다.)의 나에 대한 고발을 고무했습니다.-----은
    무엇이었는가를 따지고자 합니다. 그런데 비방 자들은 무슨 말을 합니까?
    그들은 나를 고발한 자들이므로 나는 소장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악행을 하는 자이며 괴상한 사람이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하는 나쁜 일을 좋은 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에 말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친다. 이것이 고발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본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인물을 등장시켜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그가 공중을 비행할 수 있다고 말하게 하고 내가 다소간이라도
    알고 있다고 자처한 적이 없는 사물에 대해 많은 난센스를 말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자연 철학자를 경멸할 생각은 없습니다. 만일
    멜레토스가 자연 철학(그리스 초기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본성, 언질을
    탐구하였으므로 그들의 철학을 자연 철학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탈레스는 자연의 언질을 물 이라 하였고, 엠페도클레스는 지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을 경멸했다는
    무거운 죄로 나를 고발했다면 참으로 의외의 일입니다. 그러나 오,
    아테네인 여러분, 사실은 간단합니다. 곧 나는 자연에, 대한 사색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인이며 나는 그들에게 호소합니다. 나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는
    분들은 내가 이러한 사물에 대해 간단하게는 상세하게 든 언급한 일이
    있는지 그 여부를 말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웃 분에게도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고소 내용의 이 부분에 대해 말한 것으로부터 미루어 보아
    여러분은 나머지 항목의 진실 여부도 가려 낼 수 있을 것입니다.


    4 내가 고사이며 돈을 받고 있다는 소문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습니다.
    이러한 고발도 다른 고발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의견으로는 정말로 인류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르친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은 그에게는 영광이라고 생각됩니다. 레온티노의 사람인
    골기아스, 케오스 사림인 프로디코스, 엘리스 사람인 히파아스( 골기아스,
    프로티코스, 히피아스는 당시의 대표적인 소피스트들이다.)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청년들---그들은 같은 도시의 시민들로부터 무보수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을 설득하여, 자기 도시의 사람들과의 교제를
    포기하고 대가를 치르며 그들과 사귀게 할 뿐 아니라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기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파로서 출신의
    철학자가 아테네에 머물고 있고 나도 이 사람에 대해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사람에 관한 말을 듣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소피스트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한 사람, 곧 히포니코스의 아버지
    칼리아스(칼리아스는 당시 그리스 제일의 부호였다고 한다.)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칼리아스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두 아들이 망아지거나 송아지라면 그들을 감독할 사람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네. 우리는 말을 훈련시키는 사람이나
    농부를 고용하면 되겠지. 그들은 망아지나 송아지에게 알맞은 탁월성을
    길러 주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러나 두 아들은 인간인
    만큼, 자네는 누구를 그들의 감독자로 채용할 셈인가? 인간으로서의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덕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자네는 아들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고려해 보았을 줄로 짐작하네. 그래 있던가?
    있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누군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수업료는 얼마나 받는가?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파로서 출신의
    에우에노스(에우에노스는 소피스트의 한 사람으로 시인이며
    철학자였다.)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며 수업료는
    5무나(무나는 고대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 영국 화폐로 약 5파운드에
    해당된다.)입니다. 그가 정말로 이러한 지혜를 갖고 있고 이와 같이 싼
    수업료로 가르친다면, 에우에노스는 행복하고나,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일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나는 매우 자랑으로 여기고
    우쭐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는 그러한 종류의 지식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5 아테네 인 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당신의 말이 옳다고 하자. 그러나 당신에 대해
    제기된 고발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당신이 해 온 일에는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을 것이 아닌가? 당신에 관한 온갖 평판이나 소문은 당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없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시오. 우리는 성급하게 당신을 판단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정당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여러분에게
    내가 현명하다고 불리게 되고 나쁜 평판을 갖게 된 까닭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조용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에는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나 나는 전적으로 진실을
    말할 것임을 맹세합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나의 이러한 평판은 내가
    어떤 종류의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지혜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인간에 의해 획득될 수 있는
    지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인간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는 한도 내에서만,
    나는 내가 현명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편 내가 앞에서 말한 사람들은
    초인간적인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지혜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지혜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내가 이러한 지혜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나를 중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여기서 나는 여러분에게 내가
    무엇인가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고 보일지라도 끝까지 들어 줄 것을
    간청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말은 나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을 만한 증인의 말을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증인은 델포이의 신( 텔포이의 신 은 아폴론을 말한다. 아폴론은 가장
    그리스 적인 신으로 그리스 청년의 이상의 상이었다.)입니다. 이 신은
    만일 나에게 지혜가 있다면 나의 지혜에 대해서,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지혜인가 하는데 대해서 말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카이레폰(카이레본은 소크라테스의 가장 충실한 벗이며 제자였다. 매우
    열정적이고 고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에서도
    소크라테스와 함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민 주파의
    일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나의 친구였고 여러분의
    벗이었습니다. 그는 최근 사람들과 함께 망명(소위 30 인의 전 제가가
    정권을 잡았을 때<기원 전 404년>, 민 주파의 사람들은 망명을 했다가
    다음해에 과두 정부가 쓰러지자 귀국했다.)을 했다가 여러분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카이레폰은 모든 행동이 매우
    격정적입니다. 그는 델포이로 가서 대담하게도 다음과 같은 신탁을
    그에게 말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여러분이
    나의 말을 가로막지 말기를 간청합니다. 그는 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신탁을 구했던 것입니다. 델포이의 무녀는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이 신탁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소포클레스는 현명하다. 에우리피데스는 더욱 현명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만인 가운데에서 가장 현명하다. ) 카이레폰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법정에 와 있는 그의 동생이 나의 말이 진실임을 보증해 줄
    것입니다.


    6 나는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왜 내가 악명을 얻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신탁을 들었을 때, 나는
    신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의 수수께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크든 작든 간에 지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것일까? 그는 신이고 따라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숙고한 끝에 이 문제를 푸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만일 나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찾아내기만 한다면 나는
    반증을 갖고 신에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나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가장 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하고 나는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인이라는 세평을 듣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를-----나는 그의 이름을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내가 검토해
    보기로 한 정치가였습니다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그와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도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는 현명하지 않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 자신을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의 미움을 산 것이며,
    그 자리에 동석해서 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나에게 적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도 나도 아름다움이나 선을 사실상 모르고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현명하다고.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 보다 약간
    우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갔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와 그 이외의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7 그 후로 나는 차례 차례로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내가
    적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슬퍼하고 두려워하면서.
    그러나 신의 말을 일차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지로 보이는 모든 사람을
    찾아가 신탁의 의미를 밝혀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 인
    여러분, 나는 개에게 맹세하거니와( 개에게 맹세한다. 고 한 것은 신의
    이름을 경솔하게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릴 때에는 개에게 맹세한다 는 말을 애용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만이 아니라 다른 아테네 인도 개나 양 등에 맹세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여러분에게는 진실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나의
    의무를 실행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곧 가장 명성이 높은 사람들은
    오직 가장 어리석을 뿐이며, 그다지 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더 현명하고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의 편력과 나의 헤르쿨레스적 인고-----나는 나의 노고를 이렇게 부를
    수 있으며 참고 참은 끝에 결국은 신탁은 논박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정치가 다음에는 나는 시인, 비극
    시인, 주신 찬양 시인,(디오니소스 제에 쓰인 열광적인 노래이다. 이것이
    후에 서정시로 발달하고 비극으로 세련되었다.) 기타의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가면, 내가 그들보다 더 무지하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당장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정성 드렸다고 여겨지는 구절들을 제시하고, 이
    구절들의 의미하는 바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주리라고 생각하면서, 여러분은 나를 믿어 주렵니까? 나는 진실을
    털어놓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지만 동석했던 사람들이 그들의 시에 대해
    작자 자신보다도 더 훌륭한 설명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시인이 지혜가 있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소질과 영감에 의해 시를 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말을 많이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예언자나 점쟁이와
    같습니다. 나에게는 시인들도 점쟁이나 예언자와 거의 같은 경우에
    속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 그들은 시를 쓴다는 것을
    믿고 다른 일에 대해서도 사실은 그렇지 않건만,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내가 정치가들보다 우월한 것과
    똑같은 이유 때문에 그들보다는 우월하다는 것을 믿으며 그들과
    헤어졌습니다.


    8 마지막으로 나는 장인들을 찾아갔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장인들은 많은 훌륭한 일을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나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많은 일을 알고 있었고 이 점에서는 그들은
    확실히 나보다 더 현명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훌륭한 장인까지도 시인과
    마찬가지의 잘못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기술자이므로 그들은 모든 종류의 중대한 문제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결점이 그들의 지혜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탁을
    대신해서 나는 그들과 같은 지식도 그들과 같은 무지도 갖지 않고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좋은가, 또는 그들처럼 두 가지를 다 갖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을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과 신탁에
    대해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9 이와 같은 천착으로 말미암아 나는 최악의, 그리고 가장 위험한 적을
    만들었으며 또 한 많은 비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나는
    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자 한 지혜를 나 자신은 갖고 있으리라고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사실은 오직 신만이
    현명합니다. 그리고 신은 신탁을 통해서 인간의 지혜는 보잘것이 없거나
    전혀 가치 없음을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해 나의 이름을 예로서 든대 지나지 않으며,
    말하자면 신은 오, 인간들이며, 소크라테스처럼 그의 지혜가 사실은 아무
    가치도 없음을 알고 있는 자가 가장 현명하다 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신의 뜻을 쫓아 세상을 돌아다니며, 시민이든 외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지혜를 조사 구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현명하지 못하면 나는 신탁을 원호하여 그에게
    현명하지 못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공공의 관심사에 대해서나, 나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서나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신에 대한 봉사로 말미암아
    나는 극단적인 가난을 겪고 있습니다.


    10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할 일이 별로 없는 부유층의 청년들이
    자진해서 나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지혜가 있는 체하는
    사람들을 시험해 보는 것을 듣기 좋다 하고 그들도 가끔 나를 모방하여
    다른 사람들을 시험해 봅니다. 그들이 재빨리 찾아내는 바와 같이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년들의 시험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화를 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일을 저지르게 했다. 청년들을 부패시키는 극악한 자로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도대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비행을 하며 또 가르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는 바도 없고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서
    그들은 보통 모든 철학자에 대해 사용하는 비난, 곧 천상의 일과 지하의
    일을 가르치고 신을 믿지 않으며, 나쁜 일을 좋은 일처럼 보이게 한다는
    상투적인 비난을 되풀이합니다. 그들은 지식이 있는 체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사실입니다-----이 탄로 났다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효가 많고 야심만만하며 정력적이고 일치
    단결하여 설득력 있는 웅변을 구사하므로 여러분의 귀를 그들의 시끄럽고
    철두철미한 비방으로 가득 채워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멜레토스,
    아뉴토스 및 류콘(류콘은 웅변가로 멜레토스를 지지하고,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모든 준비를 했다고 한다)등 세 사람이나를 고발한 이유입니다.
    멜레토스는 시인들을 대신해서 나와 싸우고 있습니다. 아뉴토스는 장인
    등과 정치가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류콘은 웅변가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잠시 동안에 이 막대한 비방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이것이
    사실이며 사실의 전부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고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언동이 솔직했기 때문에
    그들의 증오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그들의 증오는 바로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나에 대한 편견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또는 정차의 조사에서 발견하게
    되겠거니와, 이것이 비방의 이유인 것입니다,


    11 최초( 11장부터 15장까지는 멜레토스에 대한 변명이다)의 고발
    자들에 대한 나의 변명은 이것으로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두 번째 고발 자들을 다루기로 합니다. 선량한 사람이며 진실한
    애국자라고 자처하는 멜레토스가 그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고발에 대해서도 나는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의 소장을
    읽어보기로 합시다. 소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곧
    소크라테스는 청년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신앙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을 믿음으로써 죄를 범했다고 소장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발 내용입니다. 그러면 각 항목을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나는 청년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죄를 범했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 아테네 인 여러분, 나는 멜레토스야말로 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장난을 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으면서도 진지한 것처럼
    가장하고 사실은 전혀 관심이 없는 문제 대해 열의와 관심이 있는 체하며
    사람들을 재판에 끌어들이는데 열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12 멜레토스 군, 이리 나오시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청년과 선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재판관들에게 청년을 선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말해 주시오.
    당신은 청년을 타락시키는 자를 찾아내느라 고생을 한 끝에 나를 재판관들
    앞에 끌어내서 고발한 만큼, 당신만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재판관들에게 청년을 선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말해 주시오, 멜레토스 군, 당신은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전혀 없는 모양인데------ . 그러나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리고 당신이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한 나의 말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아닌가? 친구여, 말을 하시오. 청년을 선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우리들에게 말해 주시오.
    국법입니다.
    친구여, 내가 묻고 있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국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소크라테스 군, 이 법정에 참석한 재판관들입니다.
    멜레토스 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재판관들이 청년을 가르치고
    선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확실히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소.
    재판관 전부가 그렇다는 말인가? 혹은 일부는 그렇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전원이 그렇다는 말이오.
    헤라(헤라는 제우스 신의 아내로 제우스 다음가는 권력을 가진
    여신)에게 맹세하거니와, 이야말로 좋은 소식이구나! 그렇다면 청년의
    선도자는 상당히 많군요. 그러면 방청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들도 청년을 선도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평의원(아테네 시는 기원전 508 - 7년의 크레이스테네스 개혁
    이후, 부족에 따라 10구로 나누어지고 1구에서 50명씩 500명의 평의원을
    추첨으로 뽑아 평의원 회를 구성하고, 이 회에서 대부분의 국정을
    운영했다)들도?
    예, 평의원들도 청년을 선도합니다.
    그렇다면 국민 회의(국민의회는 20세 이상의 아테네 인 남자들로 구성된
    의결 기관으로 선전, 강화 등 중요 문제를 토의, 의결했다.) 의원들이
    청년을 타락시키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그들도 청년을 선도하는가?
    그들은 청년을 선도합니다.
    결국 모든 아테네 인들이 청년을 선도하고 향상시키고 있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나 자신뿐이군요. 나만이 청년을 타락시키는 자라는
    말이지요? 당신은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 점이 바로 내가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말이 옳다면 나는 매우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온 세상이
    말을 잘 길들이는데 단 한 사람이 말을 나쁘게 만들고 있습니까? 사실은
    정반대가 아닐까요? 단 한 사람, 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말을 잘 길들일
    수 있습니다. 곧 말을 훈련시키는 사람들만이 말을 잘 길들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말을 다루면 오히려 해를 끼치지 않는가 가장 분명한
    일입니다. 당신과 아뉴토스가 찬성하는 반대하는 간에 ------. 청년들을
    부패시키는 자는 단 한 명뿐이고 그 외의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선도한다면 그들은 참으로 행복한 환경 속에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멜레토스 군, 당신은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당신은 청년들을
    전혀 생각해 오지 않았다는 것을 ----- . 당신의 무관심, 곧 당신이나를
    고발한 문제에 대해서 당신은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해졌습니다.


    13 그러면 멜레토스 군, 제우스 신에게 맹세하고 또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시오. 나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것과 착한 시민들 사이에서
    사는 것과는 어느 쪽이 더 좋은가? 친구여 대답해 주오. 나는 이 질문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사람들은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고 나쁜 사람들은 이웃에게 악한 일을 하기 마련이 아닌가?
    그렇소
    그리고 함께 사는 사람들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보다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나의 좋은 친구여, 대답해 주오. 법률은
    당신이 대답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손해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가?
    확실히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청년을 타락시키고 나쁘게 만든다고 해서 나를
    고발했을 때, 내가 청년을 타락시키는 것은 고의라고 생각했는가, 또는
    고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가?
    나는 고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방금 착한 사람은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고 나쁜 사람은
    이웃에게 악한 일을 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일찍부터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만큼 탁월한 지혜를 갖고 있고, 나는 이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내가 함께 사는 사람을 타락시키면 나 자신이 그
    사람으로부터 손해를 입게 되기 쉽다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무지몽매하다는 말인가? 게다가 고의로 타락을 시킬 만큼 ------ .
    당신은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나 다른 사람이나 당신의
    말을 쉽게 믿지는 않을 것이지만 ------ . 그렇다면 나는 청년을
    타락시키지 않았거나 또는 부패시켰다 하더라도 고의는 아니었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이든 간에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범법이 고의가 아니었다면 법률은 비고 의적인 범죄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개인적으로 나를 불러서 경고하고
    타일렀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만일 충분한 충고만 해 주었다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고 있던 일을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가르치기를 회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훈계가 아니라
    처벌을 하는 자리인 이 법정에 나를 끌어냈습니다.


    14 아테네 인 여러분,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멜레토스는 적든 크든
    간에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은 매우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멜레토스 군, 나는 어째서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지, 그 점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소장에 따른다면 나는
    청년들에게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말고 그 대신 다른 새로운 신,
    또는 정령을 믿으라고 가르쳤다는 것이 됩니다. 당신의 말을 따르면
    이것이 내가 청년을 타락시킨 가르침이 됩니다.
    네, 나는 단호하게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멜레토스 군, 지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들에 맹세하고
    나와 법정에 대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좀더 쉬운 말로 말해
    주시오! 나는 당신의 말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신을 믿을 것을 가르치고 따라서 나도
    신을 믿고 있으며, 전적으로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소장에는
    무신론자라는 죄목은 없습니다-----또는 나는 전적으로 무신론자이며 또한
    무신론을 가르치는 자라고 주장하는가?
    나는 후자, 곧 당신은 철저한 무신론자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주장인가! 멜레토스 군,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내가 다른 사람들이 믿듯이 해나 달이 신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가?
    재판관 여러분, 소크라테스가 믿고 있지 않다는 점을 나는 확인합니다.
    그는 태양은 돌이며 달은 흙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멜레토스 군, 당신은 아낙사고라스(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5세기의 자연 철학자. 아테네에 30년간 살았으므로 그의 이름은 아테네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특히 천체 현상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고 그
    원인을 다른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원인에게 찾으려고 했다.
    그는 신으로 신앙되고 있던 해나 달을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고 태양 빛이
    지구, 달 기타의 천체를 밝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무신론자의 규탄을 받고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를 고발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그리고 만일 재판관들이 클라조메나이 사람인
    아낙사고라스의 책이 이러한 이론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무식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재판관 여러분을 경멸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이 자주 극장(극장은 오르케스트라 의
    역으로 오르케스트라는 원래 극장 중앙의 무도장을 말한다. 극장에서
    1드라크마만 주면 살 수 있다. 는 말은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아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첫째는 연극이 상연되기 전에 오르케스트라에서 책을
    팔았다는 학설이 있고, 둘째는 오르케스트라에는 아테네 시장 내의 도서
    판매 장이라는 뜻도 있다고 하고, 셋째는 일부 소피스트들이
    아낙사고라스의 저서에 내용에 대해 행한 강연회의 입장료라고 한다.
    여기서는 셋째 학설에 따른 듯하다)에서 상연되고 있는데도(입장료는
    기껏해야 1드라크마<1드라크마는 1 무나의 백분의 1>입니다) 청년들이
    이러한 이론을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웠다고 진심으로 주장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이 각별한 견해의 시조인 체한다면 청년들은 돈을
    지불하고 소크라테스를 조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멜레토스 군, 이와
    같건만 당신은 내가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고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제우스 신에 맹세코 당신이 절대로 신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멜레토스 군, 당신의 말을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조차도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아테네 인
    여러분, 멜레토스는 무모하고 경솔해서 그는 소장을 장난하는 기분으로,
    그리고 젊은 객기에 따라 썼을 뿐이라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나를 시험해 볼 생각으로 수수께끼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요?
    그는 현명하다는 소크라테스가 나의 익살스러운 자가당착을 알아내는지,
    또는 내가 그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신들을 믿지 않으면서,
    그러나 신들을 믿기 때문에 죄가 있다 고 말하는 한, 나로서는 그는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15 아테네 인 여러분, 왜 이러한 자가당착이 생겼는가 하는 것을 나와
    함께 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멜레토스 군, 당신은 대답을 해
    주시오. 그리고 방청인 여러분에게는 내가 평소의 태도로 말하더라도
    방해를 하지 말아 달라고 한 요청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멜레토스 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으면서 인간은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 . . . 아테네 인 여러분, 나는 멜레토스가 내 말을
    막기 위해 일어서려고만 하지 말고 대답을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술은 믿으면서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을까? 피리 부는 법은
    믿으면서 피리 부는 사람은 믿지 못한 사람이 있었을까? 친구여, 당신이
    대답하기를 꺼리므로 내가 당신과 법관에게 대답하겠고. 없습니다
    라고. 그와 같이 믿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질문에
    대해서는 꼭 대답해 주십시오. 정령이나 신의 힘은 믿으면서 정령이나
    신은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없습니다
    법정의 도움을 받아서 대답을 듣게 되었으니 나는 얼마나 다행한가!
    그런데 당신은 소장에서 내가 신이나 정령의 힘(새로운 신이냐, 종래의
    신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을 가르치고 또 믿고 있다는 점을
    맹세했습니다. 어쨌든 나는 정령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소장에서
    당신은 이와 같이 주장하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령의 힘을
    믿는다면 정령을 믿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정령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당신이 말을 하지 않으므로 나는
    당신이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면 정령은 무엇인가? 정령은
    신 또는 신의 아들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만들어 낸 익살스러운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처음에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정령은
    신이므로 이번에는 나는 신을 믿는 것이 됩니다. 내가 정령을 믿고
    있다면 말입니다. 만일 정령이 사람들이 믿고 있는 바와 같이
    님프(여정이라고 번역되며, 번역되며 산, 강, 숲 속에 사는 반신 반인의
    소녀를 말한다)나 기타의 다른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사생아라고 하더라도,
    정령이 신의 아들이라면 우리는 신이 없다고 믿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것은 마치 노새의 존재는 긍정하면서도 말과 나귀의 존재는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멜레토스 군, 당신은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 이러한
    난센스를 꾸며냈을 것입니다. 혹은 실제로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소장에 이러한 난센스를 삽입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해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누구든 동일한 사람이 신과 초인간적인
    일을 믿으면서 동시에 신과 정령과 헤로스(헤로스는 영웅이라도 번역된다.
    예를 들면 인간을 아버지로 하고 여신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말한다)는
    믿지 않는다는 당신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16 나는 멜레토스의 고소에 대해서는 충분히 변명하였습니다. 더
    이상의 변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의 적의를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만일 내가 파멸한다면 이 때문에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멜레토스나 아뉴토스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은 이미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할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 희생자가 될 염려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동안 살아오며 한 일
    -----이 때문에 당신은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고. 그에게는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당신의 말을 틀렸습니다. 조금이라도 훌륭한 사람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험을 헤아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면서 오직 올바른 행위를 하느냐 나쁜 행위를 하느냐, 곧 선량한 사람이
    할 일을 하느냐, 악한 사람이 할 일을 하느냐 하는 것만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견해에 의하면 트로어에서 죽은 헤로스들, 특히 그
    중에서도 테티스의 아들(테티스의 아들은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의 대표적
    영웅인 아킬레스를 말하는 것으로 아켈레스는 페레우스 왕과 여신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은 그다지 보람이 없습니다. 테티스의 아들은 치욕에
    비교하면 위험은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가 헤크톨(헤크톨은
    트로이 왕의 장남으로 아킬레스의 친구를 죽였기 때문에 아킬레스의
    복수를 받았다)을 죽이려고 열중하고 있을 때 여신인 어머니는 그가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헤크톨을 살해한다면 그도 죽게
    될 것이라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여신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운명은 헤크톨 다음에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호머 <일라아드>
    18권 참조) 그는 여기 뱃머리가 구부러진 배에서 웃음거리로 대지의
    짐이 되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적에게 원수를 갚고 곧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합니다. 아킬레스가 죽음이나 위험을
    고려했을까요? 그가 선택했든, 또는 사령관이 배치했든 간에 위험이
    절박했을 때에도 그는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치욕 이외의 다른 것을 고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이것이 진실인 것입니다.


    17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여러분이 포티타에아, 암피폴리스,
    테리온(포티타에아, 암피폴리스, 델리온은 소크라테스가 용감한 병사로
    종군한 격전지)에서 나를 지휘하도록 선임한 장군의 명령을 받았을 때,
    죽음에 직면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군들이나를 배치했던
    장소를 고수했던 내가, 신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탐구하는
    애지자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나에게 명령 한 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상상합니다-----죽음의 공포나 또는 기타의 공포 때문에 나의
    자리를 포기한다면, 나의 행위는 참으로 이상할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참으로 이상할 뿐 아니라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현명하지 않으면서도
    현명한 체하며 신탁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소환을 당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는 지혜를
    자칭하는 것이며 진정한 지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 이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 인간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확신하게 하는 무지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명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므로, 나는 알고 있는
    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부정과 더 훌륭한 자 -----신이든
    인간이든-----에 대한 불복종은 악이며 불명예임을 알고 있고, 나는
    확실한 악보다는 오히려 가능한 선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번에 나를 방면하고, 그리고 나를 기소한
    바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나를 기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주장하면서 만일 내가 이번에 방면된다면 여러분의
    자제는 모두 나의 말을 듣고 완전히 타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아뉴토스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서 여러분이 나에게 소크라테스,
    이번에는 우리는 아뉴토스를 믿지 않고 당신을 방면할 것이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고. 곧 당신은 다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탐구하거나
    사색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다시 이러한 일을 하다가 체포된다면 당신은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이것이나를 방면해
    주는 조건이라 하더라도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테네 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보다는 신에게 복종할 것이며, 나에게 생명과 힘이 있는 동안을
    지혜를 애구 하고 지혜를 가르치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고
    평소의 태도대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곧 위대하고 강력하며 현명한 아테네 시민인 그대, 나의 벗이여 그대는
    최대한의 돈과 명예와 명성을 쌓아 올리면서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최대의
    향상은 거의 돌보지 않고 이러한 일은 전혀 고려하지도 주의하지도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라고. 그리고 내가 논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천만에, 나는 유의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더라도, 나는 곧
    그와 헤어지거나 그를 도망가게 놓아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질문을 계속해서, 그를 음미하고 논파할 것이며, 만일 그가 덕(덕은 arete
    의역으로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덕이라는 말과는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은 어떤 사물이 고유한 목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탁월성을
    arete 라고 했으며, 윤리적인 덕은 의지의 arete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없으면서도 덕을 가졌다고 주장할 뿐이라고 생각되면, 나는 그를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과소평가하고 가치가 적은 것을 과대 평가한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청년이든 노인이든,
    시민이든 외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같은 말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시민들에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은 나의 동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시다시피 신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나라에서는
    신에 대한 나의 봉사 이상으로 위대한 선이 생긴 일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돌아다니며 하는 일은 여러분 모두에게
    노인이든 청년이든 가리지 않고 여러분의 육신이나 재산을 생각하기를
    앞서서 우선적으로 영혼의 최대의 향상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덕으로부터 돈과 기타의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며, 만일 이러한
    가르침이 청년을 타락시키는 이론이라면 나는 해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 아테네 인 여러분, 나는
    아뉴토스에게 찬성하든 찬성하지 않든, 또 나를 방면하든 방면하지 않든,
    여러분의 임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간에 나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비록 내가 몇 번이고 사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18 아테네 인 여러분, 떠들지 말고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우리들
    사이에는 끝까지 내 말을 들어준다는 양해가 성립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해야 할 말이 남아 있고, 내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소리를 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유익하다고
    믿으며, 따라서 여러분이 조용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나와 같은 사람을 죽인다면 여러분은 나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멜레토스도 아뉴토스도 나를 해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나를 해칠 수 없는
    것입니다. 악인은 자기 자신보다 착한 사람을 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뉴토스가 더 착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거나 추방하거나 또는 시민권을
    박탈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뉴토스도 다른 사람들도 그가 더 착한 사람에게 커다란 해를
    입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바와 같은 악한 일을 하는 것-----부당하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악행-----은 훨씬 더 큰 화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테네 인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이 여러분에게 보내 준
    선물인 나를 처벌함으로써 여러분이 신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여러분을
    위해서 변명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를 사형에 처한다면, 여러분은
    나와 같은 사람을 다시 쉽게 찾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익살스러운 말로 말한다면, 신이 이 나라에 보낸 일종의 등외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거대하고 기품 있는 군 마와 같아서 바로 거대하기 때문에
    운동이 둔하며 따라서 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신이 이 나라에
    부착해 놓은 등에 이며 따라서 하루 종일, 어디서나 한결같이 여러분을
    붙잡고 여러분을 각성시키고 설득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와 같은 사람을 쉽게 다시 찾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나를 아끼라고 충고합니다. 여러분은(마치 잠자는 것을
    갑자기 깨웠을 때처럼) 화를 내고, 아뉴토스가 설득하는 대로 쉽게 나를
    죽여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신이 여러분을 돌보기 위해
    여러분에게 또 다른 등에를 보내지 않는 한, 나머지 생애를 줄곧 잠만
    자게 되리라고 나는 단언합니다. 나는 신이 여러분에게 보내 준
    사람이라고 말했거니와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과 같다면, 나 자신의 일은 전혀 돌보지 않고 다녀간 태연히 집안
    일을 소홀히 하며 여러분의 일만을 돌보고 마치 아버지나 형처럼
    개인적으로 여러분을 찾아다니며 덕을 닦으라고 권고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행동은 인간답지 못합니다. 만일 내가
    어떤 소득을 얻었거나, 또는 보수를 바라고 권고를 했다면 이와 같이
    하는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파렴치한 고발 자들조차도, 내가 누구 한데 보수를 강요하거나
    청구했다고는 주장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은 증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것이 사실임을 입증해 줄 충분한
    증인이 있습니다. 곧 나의 가난을.


    19 내가 개인적으로 돌아다니며 충고를 하고 남의 일로 바쁘게 지낼 뿐,
    공개적으로 나서서 국가에 대해 충고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신 또는 정령의 신탁, 또는 신호를 듣는다고 여러 차례
    여기저기에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멜레토스가
    소장에서 조소한 신도 바로 이 신입니다. 이 신호는 일종의 목소리로서
    내가 어릴 때에 처음으로 들려 왔습니다. 이 목소리는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금지하기만 할 뿐, 결코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나에게 정치가가 되는 것을 단념시킨 것도 이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반대였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 아테네 인 여러분,
    나는 단언할 수 있거니와, 내가 정치에 관여했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이미
    생명을 잃었을 것이며 여러분이나 나 자신을 위해서 좋은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화를 내지 마십시오.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불법 행위와
    부정 행위에 정직하게 대결함으로써 여러분이나 다른 대중과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은 생명을 보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잠시 동안이라도 생명을 보존하면서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 사람은 공인이
    아니라, 사인으로서 활동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20 내가 지금 한 말에 대해서 나는 믿을 만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 증거는 단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존중하는
    것, 곧 행동입니다. 여러분에게 내가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일은 내가 죽음이 두려워서 부정에 굴복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내가 굴복하기를 거절한다면 당장 나는 죽게 되리라는 것을 입증해
    줄 것입니다. 나는 법정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아마도
    흥미 있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진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오, 아테네
    인 여러분, 나는 단 한 번 공직에 취임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평의원이었습니다. 내가 속한 부족인 안티오키스족은 아르기누사이
    해전(소아시아의 해안에서 멀지 않은 아르기누사이 섬 근처에서 일어났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의 해전을 말한다. 기원전 406년의 일. 아테네가
    승리하고 카리크라티테스가 패배했다. 당시 지휘관들은 전투 후 침몰선의
    승무원들이 나무 조각을 붙잡고 표류하는 것을 구조하고 전사자의 시체를
    수용하려고 했으나 폭풍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열 명의
    장군이 문책을 당하게 되었다. 재판관들은 당파심 때문에 한 명씩 재판에
    회부하도록 규정한 법률을 어기고 전원을 집단적으로 재판하고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열 명의 장군 중 두 명은 다른 곳에 있었고 두 명은
    소환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재판을 받은 장군은 6명뿐이었다.)때,
    전사자의 시체를 수용하지 못한 장군들에 대한 재판을 주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들을 집단적으로 재판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여러분도
    후에 생각하신 바와 같이 이것은 위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위법에 반대한 집행부(각 부족으로부터 50명씩 선출하여 500명으로
    구성되는 평의원 회에 집행부가 있어서 각 부족이 1년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을 맡아 평의회 소집, 회의 준비. 토의 사항 채택 등을
    돌보았다.)의 평의원은 나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반대 투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연설자들이나를 고발해서 체포하도록
    하겠다고 위협하고, 여러분도 연설자들의 말을 따르라고 소리쳤을 때.
    나는 위험을 무릅쓸 것을 결심했습니다. 투옥이나 죽음이 두려워서
    여러분의 부정에 가담하느니 차라리 법과 정의의 편에 서겠다고 ---. 이
    일은 민주 정치가 시행되면 시절에 있어 났습니다. 그러나 과두제(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배한 후, 스파르타의 후원 하에 집권한
    크리티아스 등의 독재 정치를 말한다. 8개월 여가 지나서 공포 정치를
    하던 30명의 과두 정치는 종지부를 찍었다.) 미텡서 30명의 집정관이
    집권했을 때, 그들은 나와 다른 네 사람을 원형 건물(지붕이 둥근 건물로
    집행부 사람들이 집무와 식사를 하던 건물이었다. 스파르타에 패배한
    후에는 30명의 전 제자들이 이 건물을 사용했다.)로 소환하여 살라미스
    사람 레온(독재 정치 밑에서 죄 없이 처형된 사람)을 살라미스로부터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사형에 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그들의 죄에 연루시키기 위해 항상
    내리고 있던 명령의 한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때에 나는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죽음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내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유일한 일은 부정하거나
    불경스러운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원형 건물에서 나왔을 때 다른 네 사람은 살라미스로 가서
    레온을 데리고 왔지만, 나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30명
    집정관의 정권이 이 일이 있은 직후에 붕괴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일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 말에
    대해 증언해 줄 것입니다.(여기서 몇 사람의 증인이 증언을 한 듯하다.
    다음 장이 <그렇다면>으로 시작되는 것도 증언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21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가 공직에 종사하면서 항상 옳은 일에 편들고,
    내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와 같이 정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 남았으리라고 진정으로 생각하십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테네 인 여러분, 나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공적인 면에서나 사적인 면에서나
    나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동일한 태도를 견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비방하는 뜻에서 나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기타의 사람들과
    비열한 타협을 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정상적인
    제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을
    때에 나의 말을 들으려고 찾아온다면 청년이든 노인이든 간에 이를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나는 보수를 받아야만 대화한 것이 아니라
    부자든 빈민이든 간에 누구든지 나에게 묻고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악한 사람이 되든 선한 사람이 되든 그 결과는
    나의 탓이 아님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는 누구를 가르친 적도 없고, 또
    가르쳐 주겠다고 공언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것을 개인적으로 나에게서 배웠다던가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22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되겠지요. 곧 당신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라고. 아테네 인 여러분,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에게
    모든 진실을 이미 말했습니다. 그들은 지혜가 있는 체하는 사람들을
    논박하는 것을 즐겨 듣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박은 유쾌한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음미하는 것은 신이 나에게 부과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는 신탁이나 꿈이나 신의가 어떤 사람에게 암시를 주는
    기타의 온갖 방법으로 나에게 부과되었습니다.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이것은 사실입니다.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곧 발각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청년을 타락시키고 있거나 또는 타락시킨 적이 있다면 이제는 어른이
    되어 그들이 젊을 때에 내가 잘못 된 충고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고발 자로 나서서 복수를 해야 마땅합니다. 만일 그들이 직접
    나서기를 꺼린다면 아버지나 형제 등 그들의 가족이나 기타의 친척이
    나서서 나 때문에 그들의 가족이 어떠한 화를 입었는가를 말해야
    마땅합니다. 지금이 바로 호기입니다. 내가 살펴보니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 법정에 나와 있군요. 나와 동갑이며 같은 구 출신인
    크리톤(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벗이며, 부유한 사람이었다.
    대화편 크리톤 에서는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한다), 그리고 저기에는
    그의 아들인 크리토뷸로스(크리토뷸로스는 크리톤의 아들로 소크라테스를
    숭배했으며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목격했다)도 보이는군요. 다음에는
    수페투스 구 출신이며 아이스키네스(아이스키네스와 에피게네스도 대화편
    파이돈 에 의하면 소프라테스의 임종의 자리에 있었다)의 아버지인
    류사니아스가 있고 그의 아들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케피소스 구
    출신이며 에피게네스의 아버지인 안티폰이 있고, 저기에는 나와 사권
    사람들의 형제들이 나와 있습니다. 곧 테오스도디테스의 아들이며
    테오도토스의 형(테오도토스는 죽었으므로 어쨌든 그는 형의 고소를
    말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인 니코스트라토스, 그리고 데모도코스의
    아들이며 테아게네스의 형인 파랄로스, 그리고 아리스톤의 아들인
    아데이만토스 ------ . (아테이만토스는 플라톤의 맏형), 그의 동생인
    플라톤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아폴로도로스(소크라테스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아폴로도로스도 소크라테스의 임종의 자리에 있었다)의
    형이 아이안토도로스----- .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멜레토스는 그의 연설 가운데서 그들 중의 몇 명을 증인으로
    언급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잊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증인으로 세우도록 합시다. 나는 양해하겠습니다. 만일 그가 이러한
    증인을 통해 증언할 것이 있다면 증언을 듣기로 합시다. 그러나 아테네
    인 여러분, 사실은 정반대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친척을 타락시키고
    해친 자----- 멜레토스와 아뉴토스는 나를 이와 같이 불렀습니다 -----를
    위해 증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 때문에 타락한 청년들만이 아니라
    -----그들은 나를 위해 증언할 동기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타락하지 않은 연장의 친척들까지도----- . 왜 그들은 증언을 통해 나를
    도우려는 것일까요? 이유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이며 그들은 내가
    진실을 말하고 멜레토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증인의 증언을 듣는다)


    23 자, 아테네 인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은 결국 이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동일한 사건 또는 훨씬 가벼운 사건으로 고발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재판관들에게 빌고 애원했으며,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자식과 함께 많은 친척들과 친구들을 법정에 데리고 나왔던 일을
    상기하고 나에게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와 같은 일을 전혀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 대조를 해 보고 나에게 분노를 느끼고. 이 때문에 나에게
    불쾌한 감정을 갖고 홧김에 투표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이러한 사람이 있다면-----나는 여기에 이러한 사람이
    있다고 단언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친구여, 나도 인간이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호모가 말한 바와 같이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과 피로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가족은
    있습니다. 아들도 있습니다.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세 명의 아들(장남
    람프로크레스, 2남 소프로니코스, 3남 메네크세노스를 말한다)이 있는데
    하나는 어른이 다 되었고, 두 명은 아직 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에게 무죄 방면을 애원하기 위해 그들을 이 곳으로 데려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데려오지 않는가? 거만하거나 여러분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두려워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딴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여론을 고려해 본다면 그러한 행동은 나 자신이나
    여러분을 위해서 또는 국가를 위해서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나 정도의
    나이가 되고 지혜가 있다고 해서 명성을 얻은 사람은 자기 자신의 품위를
    훼손시켜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나에 대한 이러한 의견이 합당하는
    그렇지 않든 간에 어쨌든 세상은 소크라테스는 어떤 점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정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나
    용기 또는 다른 덕이 우월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품위를 훼손시킨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입니까? 고명한
    사람이 법정에 서면 아주 딴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형을 당하면 무서운 일을 겪게 되고 여러분이
    그들을 살려 주면 영생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행동은 국가의 불명예이며, 아테네 인이 명예와
    현직을 준 아테네의 가장 저명한 사람들은 여자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말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명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이러한
    행동을 한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서글픈 연극을 해서 국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사람을 평온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유죄로 판결한다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24 그러나 여론은 무시한다 하더라도 재판관을 계도하고 설득하는 대신,
    재판관에게 원고를 애원하여 무죄 석방이 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재판관의 의무를 정의를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판결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판관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재판하지 않고 국법에 따라 재판할 것을 서약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이 서약을 깨뜨리는 습관을 갖도록 해서는 안되며 여러분도 이러한
    습관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습관에는 경건함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불명예스럽고 불경스러우며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도록 요구하지 마십시오. 특히 멜레토스의 고발에 따라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죄로 재판을 받는 지금은-----왜냐하면 오, 아테네 인
    여러분, 만일 내가 설득과 애원으로 여러분의 맹세를 깨뜨리게 한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신들이 없다고 믿으라고 가르친 것이 되고, 따라서
    변명을 하면서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고소를 단지 확인하는데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나를 고발한 사람들이 신들을 믿는다고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신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나 나를
    위해서 최선의 것이 되도록 재판해 줄 것을 여러분과 신에게
    맡깁니다.(여기서 유죄 또는 무죄를 결정하는 투표가 실시된다. 흰 돌과
    검은 돌에 의한 투표의 결과로 소크라테스는 유죄로 결정된다)


    25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유죄의 투표에 대해 비탄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나는 이러한 결과를 예상했고, 다만 찬반 투표수가
    거의 같다는 데에 놀랐을 뿐입니다. 나는 나에게 불리한 투표가 훨씬
    많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30표(이본에는 3표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30표의 차이가 옳다고 보는 이론이 유력하다)가 다른
    쪽으로 넘어갔더라면 나는 무죄 방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멜레토스로부터는 벗어났다고 말해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의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뉴토스와 류콘의 도움이 없었다면 멜레토스는
    법률이 요구하는 투표의 5분의 1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 경우에는
    그는 1천 드라크마의 벌금을 물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발 자가
    전 투표수의 5분의 1을 획득하지 못하면 1천 드라카마의 벌금을 과하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때로는 시민권을 박탈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솔한 소송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26 그런데 멜레토스는 처벌로서 사형을 제안합니다. 그러면 오, 아테네
    인 여러분, 나는 어떤 제안을 해야 합니까?(아테네의 재판의 관습에 따라
    유죄 선고 후에는 원고와 피고는 형량을 제안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범죄에 대해서는 법률에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 형량을 법정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멜레토스는 사형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의 최고의 영위를 자기에게 수여해야
    마땅하다고 제안한다) 제안이 나에게 합당한 것임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합당한 것은 무엇입니까? 전 생애를 통해서 게으름을 피울
    만한 재주를 전혀 가져 보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일, 곧
    부, 가사, 장교, 국민 의회에서의 연설, 공직, 음모, 당파, 등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이 받을 보상은 무엇입니까? 나는 정치가로서
    살기에는 너무나 정직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여러분이나 나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없는 곳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하며, 개인적 이익을 구하기에 앞서 덕과 지혜를 추구해야 하고,
    국가의 이익을 고려하기에 앞서 국가 자체를 돌보아야 하며, 또한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지켜야 할 순서라고 여러분 각자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어떠한 보상을 주어야 합니까? 오,
    아테네 인 여러분, 그가 보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알맞은 좋은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지만 여러분에게 혜택을 주었고 또한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
    한가한 시간을 바라고 있는 사람에게 알맞은 보상은 무엇입니까? 오,
    아테네 인 여러분, 프류타네이온(프류타네이온은 집정관들이 집무하는
    관청으로 국가의 중심이었다. 집정관, 외국 사절, 개선 장군이나
    올림피아 경기의 승자 등 국가에 유공자는 여기서 국비로 식사가
    제공되었다)에서의 분야보다 더 합당한 보상은 없을 것입니다. 이 보상을
    올림피아에서 승마나 전차 경주 -----전차를 두 마리의 말이 끌든 더 많은
    말이 끌든-----에서 상을 탄 시민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적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궁핍하지만 그는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에게 행복의 외양만을 줄뿐이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행복
    자체를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공정한 처벌을 판정하라고 한다면,
    나는 프류타네이온에서의 봉양이 정당한 보상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7 이와 같이 말하면 여러분은 내가 읍소나 탄원에 대해 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거드름을 피운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너무 짧아서 여러분을 설득할 수는 없지만 나는
    고의적으로 어떤 사람을 나쁘게 만든 일은 결코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아네테에도
    중대한 소송은 하룻동안에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법률이 있다면,
    나는 여러분을 설득할 수 있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나는 잠시
    동안에 수많은 비방을 논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확신함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나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화를 입어도 마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어떤 처벌을 제안할 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 멜레토스가
    제안한 사형을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나는 죽음이 선인지 악인지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악임이 분명한 처벌을 내가 어찌 제안할 수
    있겠습니다. 왜 그럴까? 멜레토스가 제안한 사형을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나는 죽음이 선인지 악인지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악임이
    분명한 처벌을 내가 어찌 제안할 수 있겠습니까? 징역을 제안할까?
    어째서 내가 감옥에서 살아야 하며 또한 그해의 관리, 곧 11명의 옥리(각
    부족에서 매년 추첨으로 선출되는 10명의 옥리와 1명의 감옥을 감독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의 노예가 된단 말입니까? 혹은
    벌금형과 벌금을 물때까지의 징역을? 앞의 경우와 마찬 기지 이유로
    반대합니다. 나는 돈이 없고 따라서 벌금을 물 수 없으므로 감옥에서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추방을 제안한다면(아마도
    이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처벌을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맹목적인 생의
    집착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와 같은 시에 사는
    여러분조차도 나의 토론이나 말을 견딜 수가 없고, 그것이 너무나
    쓰라리고 밉살스러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고 하는 때에 다른 도시의
    사람들은 나를 역겨워 하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만큼 내가 이성을 잃었다면
    말입니다. 아테네 인 여러분, 전혀 있는 수 없는 일입니다. 나와 같은
    나이에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떠돌아다니며 항상 추방 지를 변경하고, 또
    항상 쫓겨나야 하는 생활은 어떤 것일까! 내가 어디를 가든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청년들이 나의 곁으로 몰려오리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청년들을 쫓아낸다면 청년들의 요구로
    연장자들은 나를 쫓아 낼 것입니다.


    28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여,
    당신이 침묵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낯선 도시에 가더라도 당신에게 간섭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 아닌가? 라고. 그런데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을
    여러분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내가 여러분이
    말하는 대로하는 것은 신에 대한 불복종이 되며 따라서 나는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여러분에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내가 진지하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매일매일 덕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음미할 때 여러분이 들은 기타의 일들에 대해서
    토의하는 것이 인간의 최대의 선이며,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 만한 보람이
    없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더욱더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일에 여러분을 설득하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한 말은 진실입니다. 또한
    내가 해를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에는 나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만일 돈이 있다면 내가 지불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나는 벌금을 제안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다지 해가 되지 않음으로-----. 그러나 지금 나는
    한푼도 없으며 따라서 여러분에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벌금을
    과해 주도록 요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은화 1무나
    정도라면 지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정도의 벌금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나의 친구들, 곧 플라톤, 크리토뷸로스 및
    아폴로도로스는 30무나를 제안하라고 나에게 권고합니다. 그들은
    보증인이 될 것입니다. 30무나의 벌금을 제안합니다. 이 정도의
    금액이라면 그들은 여러분에 대해 충분한 보증인일 것입니다.(여기에서
    변명은 중단되고 형량은 결정하는 제 2차 투표가 실시되어 소크라테스는
    사형의 선고를 받는다. 제 1 차 투표 이후의 소크라테스의 논조는
    재판관들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으므로 이번에는 80표라는 차이로 사형의
    선고된 것이다)


    29 오, 아테네 인 여러분,(29자부터 33장까지는 에필로그에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한 재판관들과 무죄를 인정한
    재판관들에게 최후의 진술을 한다. 그런데 사형을 선고한 사람들에 대한
    진술은 아마도 플라톤의 창작이리라. 왜냐하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람들이 끝까지 남아서 그의 신랄한 비난을 경청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말을 들을 사람이 없는데 소크라테스가 독백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다만 그의 무죄를 인정한 재판관들과 그의
    친구들은 끝까지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진술을 열심히 경청했을 것이다) 이
    도시를 비방하는 자들로부터 여러분이 현인 소크라테스를 죽였다는 악명을
    대가로 받게 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이 도시를 비방하는 자들은
    여러분을 비난하고자 할 때, 사실을 내가 현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현명하다고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잠시만 기다렸다면
    여러분의 소망은 저절로 이루어졌으련만----- .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상당히 고령이고 따라서 죽을 날도 멀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 모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또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는 말이 모자라 무죄 방면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곤 생각합니다. 곧 무슨 짓이든 또는 무슨
    말이든 다 해도 좋다고 생각했더라면, 나는 무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부족한 점이 있어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것은 말의 부족은 아닙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후안무치하지 못하고 여러분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곧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고 한탄하는 등,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늘 듣고 있는 많은 일들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이러한 일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는 그때 위험에 직면하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또는 비열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나는 지금 나의 변명의
    방식을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방식에 따라 말함으로써
    생명을 보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의 방식대로 말하고 죽는 것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든 또는 어떤 사람이든 전쟁에 있어서 또는
    법률에 있어서 모든 책략을 동원하여 죽음을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있는 일입니다만 분명히 싸움터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추격자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도 무슨 말이든 또 무슨 짓이든 다 하기만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다. 나의 친구여, 죽음의 희피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의를 피하는 어렵습니다. 부정은 죽음보다도 빨리
    달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늙고 행동이 둔하기 때문에 느리게 뛰는 자에게
    붙잡혔지만 예리하고 기민한 나의 고발 자들은 빨리 달리는 자, 곧 불의에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러분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받기 위해 떠나지만, 그들도 진리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고 흉악과
    부정에 대한 처벌을 받기 위해 떠나갑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내린
    판결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내린 판결을 감수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은 숙명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다고
    생각합니다.


    30 그런데 나에게 유죄 판결을 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기꺼이
    예언을 하려고 합니다. 이제 나는 죽음이 임박했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
    사람들에게는 예언의 힘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 여러분에게 예언합니다, 내가 죽은 직후에 여러분이 나에게 과한
    것보다 훨씬 무거운 처벌이 여러분에게 분명히 닥쳐오리라는 것을,
    여러분을 비난하는 자로부터 벗어나고, 여러분의 생활을 설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것입니다. 여러분을 비난하는
    사람은 지금보다도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그들을 제지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젊으므로 더욱 가혹할
    것이고 따라서 여러분도 그들에게 훨씬 더 화를 낼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을 살해함으로써 여러분의 올바르지 못한 생활에 대한 책망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판단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명예롭지도 못한 도피 법입니다. 가장 쉽고 가장 고상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떠나기 전에 나에게 유죄 판결을 한 재판관들에게
    예언입니다.


    31 나의 무죄를 인정한 친구들이여, 나는 여러분과 여기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관리들이 바빠서 내가 죽어야 할 곳으로 끌고
    가지 못하는 동안에-----. 잠시 나의 곁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 주십시오.
    아직은 시간은 남아 있으므로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친구이며, 따라서 나에게 일어난 이 사건의
    의미를 나는 여러분에게 밝혀 두고 싶습니다. 오, 재판관
    여러분(지금까지 아테네 인 여러분 이라고 불러오다가 처음으로 재판관
    여러분 이라고 부른 것은 소크라테스의 무죄를 인정한 재판관이야말로
    참된 재판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여러분이야말로 진실로
    재판관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나는 여러분에게
    이상한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어떤 문제에 대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문제이더라도 내면적인 정령의 신탁은 언제나 나에게 반대를 제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최악의
    일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일반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침에 집을 떠날 때에도 또 법정으로 오는
    도중에도, 또 변론 중에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에도, 신탁은 반대의
    표시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이야기 도중에 저지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건만 이번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신탁은 전혀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침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여러분에게 밝혀 두렵니다. 그것은 나에게 일어나
    일은 좋은 일이며 죽음을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내가 악을 행하려 하고 그것이 좋은 일어
    아니었다면, 예의 신탁은 분명히 나에게 반대를 했을 테니까.


    32 다른 면으로 고찰해 보더라도 죽음이 선이라는 희망에는 유력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은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곧 죽음은 허무 상태로서 전혀 감각을 갖지 못했던가, 또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전쟁이며 이 세계로부터 전 세계에로의
    영혼의 전거이든가 -----. 그런데 만일 죽음이 무감각 상태로 어지러운
    꿈조차 꾸지 않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뛰어난 소득일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꿈조차 꾸지 않고 숙면한 밤을 가려내어 그의 생애 중의
    다른 주야들과 비교해 되는가를 말해야 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페르시아 대왕조차도 다른 주야와 비교할 때 그러한 주야는 극히
    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만일 죽음이 이러한
    것이라면 나는 죽는 것은 소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영원은 단
    하룻밤에 집약을 테니까. 그러나 만일 죽음이 다른 곳에로의 여행이고
    사람들의 말과 같이 거기에는 모든 고인이 살고 있다면 오, 나의 친구와
    재판관 여러분,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순례자가 명부에
    도착해서 이 세상의 재판관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풀려나고.
    거기에서 재판을 한다고 알려진 미노스,(크레테 섬의 왕인 미노스는
    사후에 죽은 자를 재판하는 재판관이 되었다고 한다)
    라다만튜스,(라다만튜스는 미노스의 동생. 경건한 사람으로 사후에
    사자의 재판관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아코스,(아이아코스는 아이기나
    왕으로 역시 사자의 재판관이 되었다고
    한다)트리프레모스,(트리프토레모스는 농업을 가르치는 반신으로 사후에
    사자의 재판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생을 올바르게 산신의 다른
    아들들을 발견한다면, 이러한 순례는 분명히 보람있는 일일 것입니다.
    오르페우스, 무사이오스,(오르페우스와 무사이오스는 전설상의 종교시인.
    무사이오스는 오르페우스의 제자라고 한다) 헤시오도스,(헤시오도스는
    호머와 함께 그리스 서사시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신통기 등이 있다)
    호머 등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떤 대가인들 못 치를 것인가? 아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몇 번이라도 죽고 싶습니다. 또한 나는 거기서
    팔라메데스,(팔레메데스는 왕자로 트로이 원정에 참가했다. 그는 트로이
    원정군에서 빠지려고 미친 척하던 오디세우스의 간계를 간파했으므로 후에
    오디세우스의 흉계에 걸려 반역의 죄로 사형을 받았다. 팔레메데스 는
    그의 억울한 최후를 그린 비극인데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비극이 상연되었을 때 아테네 인은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생각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텔라몬의 아들인 아이아스,(아이아스는
    살라미스 왕 텔라몬의 아들로서 트로이 원정군 중 아킬레스 다음가는
    용사. 아킬레스가 죽은 다음 그의 무기를 얻으려고 오디세우스와 싸워서
    패하고 미쳤으나, 후에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치욕을 느끼고 자살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 는 이 용사의 최후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공정하지 못한 재판 때문에 죽은 기타의 옛 영웅들을 만나는 일에 비상한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그들의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을 비교해 보는 것도 적지 않은 즐거움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참된 지식과 거짓 지식에 대한 탐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저 세상에서도-----그리고 나는
    누가 현명하고 누가 현명한 체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 재판관 여러분, 위대한 트로이 원정군의 지도자,(트로이
    원정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을 말한다) 오디세우스, 시지프스 및 기타의
    무수한 남녀를 음미할 수 있다면
    무슨 대가인들 아낄 것인가! 거기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질문을 한다면
    무한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세상에서는 그들은 질문을 한다고
    해서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떠도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33 그러므로 재판관 여러분, 죽음을 흔쾌히 여기고 착한 사람에게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나쁜 일은 생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착한
    사람과 그가 한 일은 신도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나의 다가오는
    최후도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나는 죽어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더 좋은 시각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신탁은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유죄
    판결을 한 자와 고발한 자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좋은
    일을 해 줄 의도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들은 마땅히 비난을 받을 만합니다.
    다시 한 번 나는 그들의 호의를 요청하고자 합니다. 나의 아들들이
    장성했을 때, 오, 나의 친구들이여, 그들을 처벌해 주시오. 나의 아들들이
    덕 이상으로 축재나 기타의 일을 돌본다면, 나는 여러분을 시켜서 내가
    여러분을 괴롭힌 것처럼 그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또한 만일 나의
    아들들이 사실은 보잘 것 없으면서도 훌륭한 체하면,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꾸짖은 것처럼 그들이 반드시 돌보아야 할 일을 돌보지 않고
    사실은 보잘 것 없으면서 훌륭한 체한다고 그들을 꾸짖어 주십시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이 해 준다면 나와 나의 아들은 당신으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 됩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기 자기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뿐입니다.
    크 리 톤

    대화하는 사람 -- 소크라테스
    크리톤
    장 면 -- 소크라테스의 감방


    소크라테스 : 웬 일로 이 시각에 왔지. 크리톤? 이른 시간일 텐데.(이
    대화는 소크라테스에게 판결이 내리고 약 1개월이 지난 다음에 감옥에서
    행해졌다)
    크리톤 : 아주 이른 시간이네.
    소크라테스 : 몇 시쯤 됐나?
    크리톤 : 막 동이 트려고 하네.
    소크라테스 :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다니 이상한 일이군.
    크리톤 : 소크라테스, 내가 자주 오기 때문에 문지기는 나를 잘 알고
    있네. 게다가 나는 문지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두었거든.
    소크라테스 : 그럼 방금 왔나?
    크리톤 : 얼마 전에 왔네.
    소크라테스 : 그런데 왜 오자마자 깨우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나?
    크리톤 : 소크라테스, 나라면 자네처럼 이와 같이 고통스럽고 불안한
    상태를 견디기 어려웠을 걸세. 정말로 그렇고 말고. 나는 자네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네. 따라서
    고통을 덜어 주려고 자네를 깨우지 않았네. 하기는 이전부터 나는 언제나
    자네는 그 성격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해 오기는 했지만 -----. 그러나
    나는 자네처럼 이러한 불운을 안락하고 조용한 태도로 견디어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네.
    소크라테스 : 그렇지만 크리톤, 인간은 나만큼 나이를 먹으면 죽음이
    다가온다고 해서 슬퍼해서는 안 되는 법이네
    크리톤 : 그렇지만 다른 노인들이 같은 불운을 맞이하더라도 연령이
    비탄을 막아 주지는 못하네.
    소크라테스 : 그건 사실이야. 그런데 자네는 이렇게 이른 시각에 온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네.
    크리톤 : 나는 자네에게 슬프고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하려고 왔네. 자네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자네의 친구 모두에게 슬프고 가슴 아픈 소식을.
    특히 나는 가장 슬프네.
    소크라테스 : 무슨 일인가? 그 배(테세우스가 승리하고 무사히 크레테
    섬으로부터 돌아온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 아테네 인은 매년 델로스에 배를
    보내 아폴로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이 배가 출발했다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테네에서는 사형 집행이 금지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기원전
    699년 봄, 배가 출발하기 전날에 열렸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면서도
    배가 도착할 때까지 집행이 연기되고 있었다. 이때는 배의 도착이
    늦어져서 30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파이돈 제 1 장 참조)가 델로스에서
    도착했나? 그 배가 도착하면 나는 처형당하기로 되어 있지.
    크리톤 : 아닐세. 그 배는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중으로
    도착할 것 같네. 스니온스,(스니온은 아티케 최남단의 작은 항구) 내일은
    자네의 최후의 날이 될 걸세.
    소크라테스 : 잘된 일이군, 크리톤.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겠네. 그렇지만 하루 동안의 여유는 있는 줄 아는데.
    크리톤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소크라테스 : 그 이유를 말하지. 나는 배가 도착한 다음날 처형하기로
    되어 있네.
    크리톤 : 그렇지. 당국의 말에 의하면.
    소크라테스 : 그러나 나는 배가 내일까지는 도착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네. 나는 어젯밤, 아니 다행히 자네가 깨우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전에 꾼 꿈 때문에 그렇게 추측하네.
    크리톤 : 도대체 어떤 꿈이었나?
    소크라테스 : 살결이 희고 아름다우며 빛나는 옷을 입은 여인이 와서
    나를 부르고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네.
    소크라테스, 금후 3일째에 그대는 풍요한 프티아에 갈 것이다.
    (일리아드 9권. 프티아는 아킬레스의 고향. 아킬레스는 아가멤논에게 이
    말로써 귀향의 뜻을 비쳤다)
    크리톤 : 소크라테스, 묘한 꿈이군!
    소크라테스 : 크리톤, 나는 그 뜻이 명백하다고 생각하네.
    크리톤 : 그렇군, 그 뜻은 매우 명백하네. 그러나 오, 친애하는
    소크라테스여, 나를 믿고 다시 한 번 내 충고에 따라 달아나도록 하게.
    자네가 죽으면 나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친구를 잃을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난점이 있네. 곧 자네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돈을
    쓰기만 했더라면 자네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믿을
    걸세. 게다가 그보다 더 나쁜 불명예가 있네. 내가 친구의 목숨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겼다 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내가 자네에게
    도피하라고 했으나 자네가 거절했다는 말을 믿지 않을 거야.
    소크라테스 : 그러나 크리톤,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구애될 이유가
    무엇인가? 선량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만이 고려의 가치가 있거니와,
    이번 일을 사실 그대로 믿어 줄 걸세.
    크리톤 : 그러나 소크라테스, 자네도 알다시피 다수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네. 자네에게 일어난 일만 보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에게 최대의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니까.
    소크라테스 : 크리톤,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최대의 해를 끼칠 수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또한 그들은
    최대의 선도 이룩할 수 있을 게 아닌가.-----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사실은 어느 쪽도 하지 못하네. 그들은 사람들을
    현인으로도, 바보로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에 지나지 않아.
    크리톤 :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자네와 논쟁하지 않겠네. 그러나
    소크라테스, 말해 보게. 자네는 나와 다른 친구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곧 자네가 감옥에서 달아나면 우리가 자네를
    도피시켰다고 밀고하는 자들 때문에 괴로움을 받고, 우리들의 재산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잃거나 또는 이보다 더 큰 벌을 받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그러나 자네가 우리들의 일을 염려하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네. 자네를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분명히 이런 정도의 모험은
    해야 하고, 더 큰 모험까지도 감행해야 되기 때문이야. 제발 우리말을
    듣고 우리가 하라는 대로하게.
    소크라테스 : 물론 자네가 말한 점을 염려하고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네.
    크리톤 : 염려하지 말게. 많은 돈을 주지 않아도 자네를 감옥에서
    끌어내 줄 사람들이 있네. 그리고 밀고자들에 대해선 데 그들은
    터무니없이 요구하지는 않네. 돈을 조금 주면 그들은 만족하네. 내
    재산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믿거니와, 자네를 위해 쓰겠네. 그리고
    자네가 내 재산을 모두 사용하는 것을 꺼린다면 자네를 위해 재산을
    사용하려고 하는 외국인들도 있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테바이의
    심미아스는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거액을 갖고 왔네. 그리고 케베스와
    다른 많은 사람들도 자네의 탈출을 돕기 위해 그들의 돈을 쓸 용의가 있네
    따라서 내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 일을 염려해서 주저하지 말고, 또
    자네가 법정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변명 참조)다른 곳에 가더라도 어떻게
    지내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말게. 아테네에서만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 그 곳 사람들은 자네를 좋아할 걸세. 텟살리에는 내
    친구들이 있는데, 만일 자네가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은 자네를 존경하고
    보호해 줄 것이며 텟살리 인은 아무도 자네를 괴롭히지 않을 걸세. 또한
    소크라테스, 자네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데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전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하네. 이와 같이 한다면, 자네를
    파멸시키려고 서두르고 있는 적의 번롱을 받는 셈이 되네. 더 나아가
    자네는 자식들을 파멸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는
    그 애 들을 키우고 교육시킬 수 있는 데로 불구하고, 그런데 오히려
    자네는 죽음을 택하고 그들을 내버려 두어 그들은 우연에 맡겨지고 마는
    것이네. 만일 그들이 고아들의 정해진 운명을 겪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자네에게는 단행한 일일 걸세. 마지막까지 양육하고
    교육시킬 뜻이 없다면 자식을 낳지 말아야 하는 것이야. 그런데 자네는
    매우 안이한 길을 택하고 있는 것같아. 훌륭하지도 남자답지도 않아.
    자네처럼 모든 행동에 있어서 덕을 존중한다고 공인한 사람은 훌륭하고
    남자답게 행동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건만 -----. 그리고 우리들의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그릇 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때, 나는
    참으로 부끄럽네. 자네 때문만이 아니라 자네 친구인 우리들까지도-----.
    용기가 있었더라면 재판은 결코 열리지 않았을 것이고 또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이 났을 걸세. 그리고 이 마지막 조치도 어리석음의
    절정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조금만 애를 썼더라면 자네를 구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들이 태만하고 비겁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네.
    그리고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만큼 자네도 자네 자신을 구할 수
    있었을 걸세. 그런데 소크라테스, 우리와 자네를 위해서 얼마나 슬프고
    믿을 수 없는 결과가 생겼는가. 이제 결심을 하게. 또는 생각할 때는
    지났으므로 이미 결심을 했을 줄 아네. 해야 할 일은 꼭 한 가지뿐이고,
    그것도 바로 오늘밤에 해야 하네. 만일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고 불가능하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 나는 자네에게 내 말을
    듣고 내가 말하는 대로하라고 간청하네.
    소크라테스 : 친애하는 크리톤, 자네의 열성은 만일 옳은 것이라면,
    매우 귀중한 것이네. 그러나 만일 잘못된 것이라면 자네의 열성이 크면
    클수록 위험도 더 커지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당신이 말하는 대로 할
    것인지, 아닌지를 봐야 하네. 왜냐하면 나는 반성을 통해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믿어지는 이유가 있을 때만, 그 이유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고 과거에도 항상 그렇게 해 왔네. 그리고 지금
    나에겐 이러한 기회가 닥쳤다고 해서 내 말을 번복시킬 수는 없네. 곧
    나는 아직도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여기고 존중해 오던 원칙을 옳다고
    여기고 존중하고 있으며 따라서 더 좋은 다른 원칙을 당장 발견하지
    못한다면, 나는 분명히 자네에게 동의하지 못할 걸세. 군중의 힘이 마치
    어린애들을 유령으로 위협하듯이, 감금이나 재산 몰수나, 사형으로써
    우리를 더욱 더 박해한다 할지라도 동의하지 못할 걸세. 이 문제를
    고려하는 가장 공평한 방법은 무엇일까? 자네가 전에 말했던 사람들의
    의견으로 되돌아가기로 할까? 우리는 그 의견은 고려할 만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고 했지. 지금에 와서 내가 선고를 받기 전에만 이
    말이 옳았다고 주장한다면 옳은 일일까? 그리고 한때는 타당했던 것이
    이제는 공리공론임이 밝혀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유치한 난센스에
    지나진 않겠지? 크리톤, 나는 자네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생각하고
    싶네. 곧 내간 이러한 상태에 있다고 해서 이 주장이 달라졌는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이 주장을 용인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를. 내가
    믿기로는 권위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을 지지했는데, 어떤 사람의
    의견은 존중하고 어떤 사람의 의견은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네.
    그런데 크리톤, 자네는 내일 죽지는 않을 것이고-----적어도 인간의
    판단이 미치는 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네-----따라서 자네는 자네가
    놓여 있는 사정에 관계가 없을 것이고 또 자네의 판단이 흐려지지도 않을
    것일세. 그렇다면 나에게 말해 주겠나? 내가 어떤 의견, 따라서 어떤
    사람들의 의견은 존중할 만하지만 다른 의견, 따라서 다른 사람의 의견은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나는
    자네에게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묻는 걸세.
    크리톤 : 옳은 말일세.
    소크라테스 : 좋은 의견은 존중하고 나쁜 의견은 존중하지 말아야겠지?
    크리톤 : 그러네.
    소크라테스 : 그리고 현명한 사람의 의견은 좋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의
    의견은 나쁘겠지?
    크리톤 : 물론.
    소크라테스 :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했던가? 체조 연습에
    열중하고 있던 학생은 만인의 찬양과 비난과 의견을 경청해야 할까, 또는
    그가 누구든 의사 또는 체육과 한 사람의 말만 들어야 할까?
    크리톤 : 한 사람의 말을 들어야지.
    소크라테스 :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의 책망을
    두려워하고 또 칭찬을 반가워해야겠지?
    크리톤 : 물론 그렇지.
    소크라테스 : 그리고 그는 모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여기에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분별력이 있는 한 사람의 교사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행동하고 훈련하고 먹고 마셔야 하겠지?
    크리톤 : 그렇지.
    소크라테스 : 그리고 그가 한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 의견과
    찬양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분별 벽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한다면, 그는 해를 입게 되겠지?
    크리톤 : 분명히 그는 해를 입을 걸세.
    소크라테스 : 그러면 이러한 해는 복종하지 않는 자의 어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크리톤 : 물론 육체에 영향을 미치겠지. 육체가 화를 입어 못 쓰게
    되겠지.
    소크라테스 : 맞았네. 그렇다면 크리톤, 일일이 매 거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른 일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우리가 지금 검토하고 있는
    문제인 정의와 부정, 미와 추,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고 그 의견을 두려워해야 할까? 또는 분별력이 있는
    한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그 의견을 두려워해야 할까?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그를 더 두려워하고 존경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를 버린다면, 우리는 정의에 의해서는 향상되고 부정에 의해서는 퇴폐
    된다고 생각되어 온 우리의 원칙을 파괴하고 손상시킬 것이 아닌가?
    그러한 원칙이 있는가?
    크리톤 : 소크라테스, 물론 그런 원칙이 있네.
    소크라테스 : 같은 예를 들기로 하세.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의 충고를
    받고 행동함으로써, 우리가 건강에 의해서는 증진되고 질환에 의해서는
    악화되는 것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면 삶의 보람이 있을까? 게다가
    파괴당한 것이 신체라면?
    크리톤 : 살 보람이 없네.
    소크라테스 : 손상을 입고 나빠진 육체를 갖고도 우리는 살 수 있을까?
    크리톤 : 물론 살 수 없지.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정의에 의해서는 향상되고 불의에 의해서는
    타락되는 인간의 보다 고상한 부분이 파괴된다면, 그래도 삶은 보람이
    있는 것일까?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어떠한 것이든 정의 및 부정과
    관계되는 원칙을 육체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크리톤 :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네.
    소크라테스 : 육신보다 더 귀중한 것인가?
    크리톤 : 훨씬 더.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나의 벗이여,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괘념하지 말아야 하네. 오직 정의와 부정을 분별할
    줄 아는 한 사람, 그 사람이 말하는 것, 그리고 진리를 존중해야 하네.
    그러므로 자네가 우리는 정의와 부정, 선과 악, 명예와 불명예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충고할 때, 자네는 처음부터
    잘못을 범하고 있네. 어떤 사람은 좋아, 그렇지만 많은 사람은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 라고 말할 거야.
    크리톤 : 그렇다. 소크라테스. 분명히 그렇게 대답할 거야.
    소크라테스 : 자네가 말하는 것은 옳아.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전의
    주장이 여전히 타당하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네. 그리고 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라는 다른 주장도 변함이
    없는지, 이 점도 고려해 주기 바라네.
    크리톤 : 물론 그 주장도 여전히 변함이 없네.
    소크라테스 : 그리고 훌륭한 삶은 올바르고 명예로운 삶인데, 이 점도
    여전하겠지?
    크리톤 : 물론 그렇지.
    소크라테스 : 나는 이러한 전제로부터 내가 아테네 인의 동의 없이
    도망쳐야 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겠네. 그리고 분명히
    도망가는 것이 옳다면 는 도주를 기도하겠네. 그러나 옳지 않다면 나는
    삼가겠네. 자네가 말한 돈이나 세평이나 자녀 교육의 의무든 다른 문제는
    거의 이성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들을 죽이는가 하면, 가능하다면 사람들을
    살려 내려고도 하는 군중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점을 두려워하네. 그러나 지금은 논의가 여기까지 진전되었으므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도망가거나, 또는 우리의 도주를 도와
    준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감사를 함으로써 폐를 끼치는 것이 옳은
    행동인가 하는 점이네. 만일 옳지 못한 행동이라면 내가 여기에 남아
    있어서 죽음을 당하거나 그 외의 재난이 닥칠 것이 확실하더라도 이를
    고려해서는 안 되네.
    크리톤 : 자네가 옳다고 생각하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크라테스 : 그 문제는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세. 그래서 자네가 나를
    논박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게. 그러면 나는 자네를 따르겠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친애하는 벗이여, 아테네 인의 소망을 저버리고 내가
    도망해야 한다고 자꾸 되풀이해서 말하지 말게. 나는 나 자신의 보다
    슬기로운 판단을 저버리면서까지 자네의 말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한 말을 생각해 보고 나에게 가장 좋은
    대답을 들려주게.
    크리톤 : 그렇게 하기로 하세.
    소크라테스 : 우리는 결코 고의로 나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떤 면에서는 고의로 나쁜 일을 해야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지금 내가 주장하고 있고 전에
    이미 우리가 합의한 대로 나쁜 일을 하는 것은 항상 악하고 불명예
    로운가? 이전에 우리가 도달했던 합의는 이 며칠 사이에 전부 무너져
    버렸는가? 그리고 이 나이에 평생을 두고 서로 열심히 토론을 해
    왔으면서도 고작 우리가 어린애보다 나은 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단
    말인가? 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무릅쓰고, 그리고 결과야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는 그때 이야기했던 진리, 곧 부정은 부정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악이며 불명예라는 점을 주장해야 할까? 우리는 이렇게
    주장할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
    크리톤 : 그렇게 주장해야 하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우리는 나쁜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 아닌가?
    크리톤 : 물론 해서는 안 되지
    소크라테스 : 또한 해를 입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복을 해서는 안 되겠지.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도 해쳐서는 안
    되니까.
    크리톤 : 물론 안 되네.
    소크라테스 : 다시 말하는데 크리톤, 우리는 악을 행해도 좋은가?
    크리톤 : 소크라테스, 분명히 그렇지 않네.
    소크라테스 :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도덕인데 이것은
    옳은가 옳지 않은가.
    크리톤 : 옳지 않네.
    소크라테스 : 다른 사람에게 악한 일을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
    크리톤 : 물론.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보복을 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네. 비록 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악을 행했을
    경우라도---. 그러나 크리톤, 자네가 말하고 있는 것이 자네의 진정한
    생각과 일치하는 지를 숙고해 주었으면 하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네. 그리고
    찬성하는 사람들과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공통된 기반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이 그들의 견해의 차이가 얼마나 광범한가를 알게
    되면 오직 서로 경멸할 수 있을 뿐이네. 따라서 해를 입히거나
    보복하거나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는 나의 첫 번째
    원칙에 자네가 동의하고 찬성하는지 말해 주게. 이것을 우리의 논의의
    전제로 삼는 것이 어떻겠나? 혹은 자네는 전제를 거부하고 반대하는지?
    나는 자네가 동의한다고 생각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그러나 자네의 의견이 다르다면 자네의 생각을 들려주게.
    그러나 만일 자네 생각이 전과 다름이 없다면,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네.
    크리톤 : 말을 계속하게.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소크라테스 : 그러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로 하네. 이 문제를 질문의
    형식으로 제기하고 싶네.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인정하는 일을 해야
    하는가, 또는 자신을 속이고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크리톤 :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해야 하네.
    소크라테스 : 그러나 이것이 옳다면, 그 귀결은 무엇일까? 아테네 인의
    의사를 거슬리고 감옥을 나간다면 나는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오히려 내가 조금이라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우리가 옳다고 인정한 원칙을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생각하나?
    크리톤 : 나는 대답할 수 없네, 소크라테스. 나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 : 그러면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게. 내가 막
    도망(명칭이야 자네가 좋은 대로 붙여도 상관없네)을 가려고 하는데
    국법과 정부가 나에게 소크라테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말해
    주게. 당신의 행동에 의해 우리들을 당신과 관계되는 한에서는 국법과
    국가 전체를 쓰러뜨리려고 하지 않는가? 법의 결정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개인에 의해 무효가 되고 짓밟히는 경우에도 당신은 국가가
    존속하고 전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묻는다고 상상해 보게.
    크리톤, 이러한 말에 대해, 또는 이와 비슷한말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든지, 특히 웅변가는 선고는
    집행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법률을 변호하기 위해 할 말이 많을 걸세.
    웅변가는 이 법률은 무효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논박할 걸세. 그러면
    우리는 그렇다. 그러나 국가는 우리에게 해를 입혔고 공정하지 못한
    선고를 내렸다. 고 대답하겠지. 내가 이와 같이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크리톤 : 매우 정당하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 국법은 그러면 그것이 우리들과 당신 사이의
    약속이었던가? 또는 당신은 국가의 선고를 지켜야 하는가? 라고 대답할
    것이네. 그리고 내가 이 말을 듣고 놀라움을 나타낸다면 국법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일 거야. 소크라테스, 놀라지 말고 대답하게.
    당신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이에 대답하는 습관을 갖고 있지 않나?
    말해 보게. 우리들을 거슬리고 우리들과 국가를 파괴하려고 노력하는데
    있어서 당신을 정당화해 주는 불평은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당신을
    존재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당신의 아버지는 우리의 도움으로 당신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당신을 낳았다. 결혼을 규제하는 법률에 대한 반대가
    있으면 말해 주게. 나는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네. 혹은 탄생
    후에 어린이의 양육과 교육을 맡고 있는 법률-----이 법률 밑에서 당신도
    훈련을 받았다 -----에 대한 반대라도 있나? 교육을 맡고 있는 법률이
    당신의 아버지에게 당신을 음악과 체육으로써 교육하라고 명령한 것이
    옳지 못했던가? 나는 옳은 명령이었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네.
    그렇다면 우선 당신은 우리들에 의해 탄생되고 양육되고 교육되었으므로
    당신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우리의 자녀이며 노예라는 점을
    부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우리와 동등할
    수는 없다. 또한 당신은 우리가 당신에게 하려는 일을 우리들에게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당신은 아버지나 또는 주인이
    있다면, 주인에게, 그가 당신을 때렸거나 욕설을 퍼부었거나 또는 다른
    나쁜 일을 했다고 해서, 아버지나 주인을 때리거나 욕하거나 다른 악행을
    할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우리가 당신을 파멸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당신도 그
    보복으로 우리와, 그리고 당신과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당신의 나라를
    파괴할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오, 참된 덕의 교사여, 당신은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당신과 같은 철학자가 우리들의
    나라는 어머니나 아버지, 기타의 조상보다도 훨씬 귀중하고 고귀하며
    신성하고, 신들과 분별력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훨씬 존귀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단 말인가? 또한 나라가 노했을 때에는
    아버지가 노했을 경우보다는 더 부드럽고 존경하는 태도로 달래야 하며
    설득하거나 설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나라의 처벌을 받았을 때에는, 그것이 감금이든 태형이든 처벌에
    조용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나라가 우리를 부상을 하거나
    죽게 될 싸움터로 이끌어 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따라가는 것이 올바르다.
    누구든 굴복하거나 도망가거나 자기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 되며, 싸움터나
    법정이나 어느 곳에서든지 도시와 국가가 그에게 명령하는 바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도시나 국가의 정의에 대한 견해를
    변경시켜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행을 가해서는 안
    된다면 더군다나 국가에 대해 폭행을 가할 수는 없지 않은가? 크리톤,
    이 말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 까? 법률이 하는 말은 옳은가,
    옳지 않은가?
    크리톤 : 나는 법률이 하는 말이 옳다고 생각하네.
    소크라테스 : 그러면 법률은 다음과 같이 말할 걸세. 소크라테스,
    당신은 현재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일을 통해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 하고
    있다는 우리의 옳은가, 그렇지 않은 가를 생각해 보게. 당신을 세상에
    태어나건 하고 양육하고 교육시켰으며 당신과 기타 모든 시민에게 우리가
    당연히 주어야 할 재산을 차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아테네
    인에게 그들이 성신이 되어서 국정을 알게 되고 법률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싫어진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재산을 갖고 가도 좋다고
    선언했고, 그러한 자유를 아테네 인에게 부여했네. 어떠한 법률도 그들을
    금지시키거나 방해하지는 않네. 우리들이나 도시를 싫어하고 식민지나
    다른 도시로 이주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가 좋아하는 곳으로 그의 재산을
    갖고 갈 수 있네. 그러나 우리가 재판을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을
    경험 한자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는 우리가 그에게 명령하는
    바를 행하겠다는 사실상의 계약을 맺은 것과 같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 경웅 삼중의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고
    주장하네. 첫째는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그의 어버이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며, 둘째는 우리는 그에게 교육을 베푼
    자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는 우리의 명령에 마땅히 따르겠다고 우리와
    약속했기 때문이네. 게다가 그는 우리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명령이 옳지 못함을 우리들에게 설득하지도 않았네. 곧
    우리는 난폭하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거나 우리를 설득하는 이자
    택일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 당신이 당신의 계획을 실행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해
    온 바와 같이 당신은 이러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야. 데다가 다른 아테네
    인 이상으로. 여기서 내가 왜 다른 사람 이상의 비난을 받느냐고
    물었다고 생각해 보자. 국법은 나는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이러한 동의를
    잘 알고 있었다고 정당한 대답을 할거야. 국법은 다음과 같이 말할 테지.
    소크라테스, 우리들이나 도시가 당신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네. 모든 아테네 인 중에서 당신은 이 도시를 떠난 적이
    거의 없는 없는 사람이며, 당신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신이 이 도시를
    사랑한다는 뜻도 되니까. 당신은 이스트모스(그리스 본토에서
    펠로폰네소스 이르는 지협. 여기서 2년마다 포세이돈 신을 위한 대축제가
    열렸다)에 한 번 간 일을 제외하고는 축제를 보기 위해 이 도시를 나간
    적이 없고 출정(소크라테스는 세 번 출정했었다. 변명 참조)할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곳에 간 일도 없기 때문이야.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여행을 한 적도 없었어. 또한 당신은 다른 나라나 다른 나라의 법에
    호기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네. 당신의 사랑이 우리들이나 우리들의
    나라로부터 벗어난 적은 없었네. 우리는 당신이 특별히 아끼는 것이었고,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다스리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지. 또한 당신은 이
    도시에서 애들을 낳았는데 이것은 당신이 만족하고 있다는 증거야.
    게다가 당신은 재판 과정에서 당신이 원했다면 처벌로 추방을 제의할 수도
    있었어. 국가는 지금은 당신이 국외로 나가는 것을 거절하지만 그때는
    허락했을 거야. 그러나 당신은 추방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고
    태연히 죽을 수 있는 체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훌륭한
    감정은 잊어버리고 우리들 법률을 존중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들을
    파괴하려고 하고 있어. 그리고 당신이 시민으로서 한 약속과 동의에 등을
    돌리고 달아나려고 하는데, 이것은 오직 비천한 노예라 할 수 있는
    짓이야.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 질문에 대답해 주게. 당신은 말만이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우리들에 의해 다스림 받을 것을 약속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크리톤,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까? 우리는 동의할 수밖에 없겠지?
    크리톤 : 동의할 수밖에 없군,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 그러면 법률은 다음과 같이 말하겠지. 소크라테스,
    당신은 우리들과의 약속 및 동의를 파기하려고 하는 것이야. 게다가
    당신은 강요를 받거나 기만을 당해서 성급하게 약속한 것이 아니라, 70년
    동안이나 숙고할 시간을 갖고 한가하게 약속한 거야. 그런데 이 70년
    동안에 우리들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또는 우리들의 약속이
    당신에게 공정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마음대로 이 도시를 떠날 수 있었어.
    당신은 임의로 할 수 있었고, 좋은 정부를 갖고 있다고 당신이 가끔
    칭찬한 라케다이몬이나 크레테, 또는 기타의 그리스의 국가나 그리스
    이외의 국가로 갈 수도 있었어. 따라서 당신은 어떤 아테네 인보다도 더
    이 나라를 좋아했어. 다시 말하면 우리들 법률을 좋아했어(법률이 없는
    나라를 좋아 할 수는 없지 않아). 당신은 이 나라로부터 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이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절름발이나 장님이나
    기타의 불구자도 당신에게 미치지 못할 거야. 그런데 지금 당신은
    달아남으로써 당신의 약속을 저버리려고 하고 있어. 소크라테스,
    우리들의 중고를 들을 생각이라면 그러지 말게. 이 도시로부터
    탈출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말게.
    생각해 보게. 약속을 어기고 이러한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것이 당신
    자신이나 당신의 친구들에게 좋은 일이 되겠는가 하는 것을. 당신의
    친구들이 추방을 당하고 시민권을 박탈당하며 또한 재산을 잃는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일세. 그리고 당신 자신도 만일 예컨대 테베스나 메가라
    같은-----이 두 나라는 잘 다스려지고 있네-----이웃 도시로 도망간다면
    소크라테스, 적으로서 이러한 도시에 가게 될 것이며 이 도시의 정부는
    당신을 경계할 것이고, 모든 애국적인 시민들은 당신을 법의 파괴자라고
    여겨 악의에 찬 시선을 던질 것이며 재판관들이 마음속으로 당신에 대한
    그들의 판결이 정당했음을 확인하도록 만드는데 지나지 않을 걸세. 법을
    타락시키는 자는 젊은이와 인류의 어리석은 계층을 타락시키는 자이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당신은 질서 있는 도시와 유덕한 사람들을 피할
    생각인가? 이렇게 하면서까지 생존할 보람이 있는가? 아니면
    소크라테스, 염치 불구하고 그들에게로 가서 대화를 나눌 셈인가? 그런데
    당신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당신은 덕과 정의와
    교훈과 법률이 인간들 사이에서 최선의 것이라는 점에 대해 무슨 말을
    하려는가? 이것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일일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러나 당신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 이 탈옥한 이야기를 듣고 좋아할 걸세.
    보통 탈주자가 하듯이 염소 가죽이나 기타의 옷을 입고 변장을 한 우스운
    모양을 듣고-----. 그러나 당신이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살겠다는
    비열한 욕망 때문에 부끄러움도 없이 가장 신성한 법을 어겼다는 것을
    일깨워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까? 당신이 그들의 기분을 맞춘다면
    없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들이 화를 내게 되면 당신은 여러 가지
    더러운 말을 듣게 될 거야. 당신은 생존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아첨하고 모든 사람의 시중을 들면서. 그리고
    무슨 일을 할까? 텟살리에서 먹고 마실 테지. 마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그 곳에 가기나 한 것처럼----- 그런데 정의와 덕에 대한 당신의
    훌륭한 감정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당신은 자식들을 위해서, 그들을
    키우고 교육시키기 위해서 살고자 한다고 말한다면 데살리로 데리고 가서
    애들로부터 아테네 시민권을 박탈해 버릴 셈인가? 이것이 당신이
    자식들에게 베풀려는 혜택인가? 혹은 비록 당신이 그들과 떨어져
    있더라도 당신이 살아 있기만 한다면 그들은 여기서 더 많은 보살핌을
    받고 더 좋은 교육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당신의 친구들이
    그들을 돌볼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텟살리의 주민이 되면 친구들이
    자식들을 돌보아 주고, 당신이 돌 볼아 주고. 당신이 저 세상의 주민의
    되면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친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확실히 그들은
    돌보아 줄 걸세.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당신을 길러 준 우리들의 말을 듣게. 우선
    생명과 자식을 생가하고 다음에 정의를 생각하지 말고, 명부의 임금
    앞에서 당신을 변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의를 생각하게. 만일 당신이
    크리톤이 하라는 대로하면 당신이나 당신에게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더 행복해지지도, 더 신성해지지도, 더 올바르게 되지도 않고, 또한 저
    세상에서도 더 행복해지지는 않기 때문일세. 이제 당신은 무고한 몸으로
    피해자로서 떠나가는 것이지 악행을 한 사람으로 떠나가는 것은 아니다.
    법률이 아니라 인간의 희생자로서-----. 그러나 악은 악으로 갚고 손해는
    손해로 갚으면서 우리들과의 약속과 동의를 파기하고, 당신이 조금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될 모든 것, 곧 당신 자신, 당신의 친구, 당신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법률에 해를 끼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줄곧 당신에게 분노할 것이며 우리들의 친구인 명부의 법률도
    당신을 적으로 받아들일 걸세. 명부의 법률도 당신이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우리를 파괴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야. 따라서
    우리말을 듣고 크리톤의 말은 듣지 말게.
    친애하는 크리톤, 나는 내 귓속에서 속삭이는 이러한 목소리를 듣는 것
    같네. 마치 신비 가들의 귀에 들리는 피리 소리처럼-----. 이 목소리는
    내 귓속에서 윙윙거리면서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네. 그리고 나는
    자네가 다른 말을 아무리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러나 할 말이 있거든 해 보게.
    크리톤 : 소크라테스, 나는 할 말이 없네.
    소크라테스 : 크리톤, 그렇다면 신의 뜻에 맡겨 두고 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로 하세.


    파이돈

    대화하는 사람 -- 파이돈
    에케크라테스
    대화 속에 나오는 인물 -- 소크라테스
    아폴로도로스
    심미아스
    케베스
    크리톤
    장 면 -- 소크라테스의 감방
    장 면 -- 플리우스

    에케크라테스 : (에케크라테스는 플리우스 사람으로 피타고라스 파에
    속해 있었다) 파이돈,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던 날, 당신은 감옥엣
    그와 함께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때의 일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습니까?
    파이돈 : (파이돈은 엘리스 사람으로 포로가 되어 아테네에 왔으나 후에
    해방되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네, 함께 있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에케크라테스 : 그렇다면 그의 임종에 대해서 들려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는 그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더 자세한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플리우스(플리우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북부의 있는 마을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요람지로 알려져 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다음에 아테네를 떠나 고향으로 가는 도중, 플리우스에 들러 여기에 살던
    에케크라테스와 이 대화를 나눈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다소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이 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람으로
    아테네에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또 아테나이로부터 이 곳으로 오는
    나그네도 오랫동안 끊어져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파이돈 : 재판 과정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습니까?
    에케크라테스 :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판에 관해서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판결을 받은 다음 곧 처형되지 않고 오래
    있다가 처형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파이돈 : 에케크라테스, 우연한 일이었지요. 아테네 사람들이 델로스
    섬(델로스 섬은 아테네의 동남쪽 키크라테스 군도에 있는 작은 섬으로
    아폴론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으로 보내는 배가 우연히 그가 판결을
    받기 전날에 그 선미를 장식했던 것입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 배는 어떤 배입니까?
    파이돈 : 아테네의 전설에 따르면 테세우스가 열 네 명의 소년 소녀를
    데리고 크레테 섬으로 가서 그들을 구출하고 자기 자신도 구출했을 때
    탔던 배라고 합니다.(크레테의 미노스 왕이 국력이 약한 아테네에 싸움을
    걸어 왔을 때, 아테네는 매년 소년 소녀 7명씩을 크레테 섬으로 보내기로
    약속하고 강화하였으며, 세 번째로 아이들을 보내게 되었을 때 용사
    테세우스는 소년 소녀를 데리고 클테 섬으로 가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무사히 소년 소녀와 함께 귀환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그 때
    아테네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면 매년 델로스 섬에 사절단을
    보낼 것을 아폴론 신에게 맹세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관습은 계속되고
    있는데 델로슨 섬으로 떠났다가 돌아오기까지의 항해 기간은-----아폴론
    신의 사제가 선미를 장식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만 -----신성한 기간으로
    여겨져 이 기간 동안에는 시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법에 의한 처형도
    금지됩니다. 그런데 배가 역풍을 만나 지체하면 갔다 오는데 결리는
    시간이 상당합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배는 재판 전날에
    장식되었는데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판결을 받은 다음에도 오랫동안 감옥에
    갇힌 채 처형 받지 않은 까닭입니다.
    에케크라테스 : 파이돈, 그의 임종 때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이 참석하는 것을 금지해서 그가 임종할 때 그의
    곁에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까?
    파이돈 : 아닙니다. 몇 명의 친구간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바쁜 일이 없다면, 가능한 한 자세하게 그 때 일어난
    일을 말해 주십시오.
    파이돈 : 당장 바쁜 일도 없으니 당신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하지요.
    소크라테스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니까요.
    내가 말을 하든 남이 그의 말을 하는 것을 듣든 간에-----.
    에케크라테스 :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당신과 똑같은 심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게 말해 주십시오.
    파이돈 : 나는 그의 곁에 있으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
    하면 나는 친구의 임종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거의 믿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에케크라테스, 나는 그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어요. 나는 그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신의 부름 없이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아니며, 저 세상에 닿아서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시간에는 당연히
    연민의 정을 느끼기 마련인데 나는 그를 가엾이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철학적 토론을 할 때면 언제나 느끼던 즐거움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때도 우리의 대화의 주제는 철학이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즐거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즐거움에는
    기묘하게도 고통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는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이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는 웃고 어는 때는
    울었습니다. 특히 흥분 잘 하는 아폴로도로스(아폴로도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의 한 사람. 소크라테스를 숭배하여 스승을 따라
    맨발로 다녔다고 하며 향연 에서는 대화의 주도자로 등장한다)가
    심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당신도 아시지요?
    에케크라테스 : 네.
    파이돈 : 그 사람은 아주 미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매우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파이돈 : 아테네에 사는 사람으로는 아폴로도로스 이외에
    크리토뷸로스와 그의 아버지 크리톤, 헤르모네스, 에피게네스,
    이이스키네스, 안티스테네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이아니아의
    크테시포스, 메네크세노스와 그 밖의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 기억에
    잘못이 없다면 플라톤은 병중이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까?
    파이돈 : 네, 테바이에서 온 심미아스와 케베스, 파이돈데스, 그리고
    메가라에서 온 에우클레이데스와 테르프시온이 있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아리스티포스와 클레옴브로토스도 있었습니까?
    파이돈 :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이기나 섬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에케크라테스 : 그 외의 다른 사람은?
    파이돈 : 대체로 앞에 말한 사람들뿐인 것 같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러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파이돈 : 처음부터 말하기로 하지요. 대화 전부를 상세히 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우리는 늘 아침 일찍 재판이 열렸던 법정에
    모였습니다. 법정은 감옥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요. 거기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감옥 문은
    일찍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이 열리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서
    소크라테스와 함께 하루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에는 우리는 보통 때보다 더 일찍 모였습니다. 그 전날 저녁에
    감옥을 나올 때, 우리는 그 신성한 배가 델로스에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모이는 장소에서 아주 일찍 만나기로
    약속했지요. 감옥에 도착하니 늘 문을 열어 주던 간수가 밖으로 나와
    우리를 가로막고 그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더군요. 간수는 11
    잡행 위원(아티카의 10구에서 추첨으로 뽑힌 10명의 위원과 1명의 서기가
    감옥의 관리, 형의 집행 등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11집행 위원이란
    불렀다)이 지금 소크라테스와 같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사슬을 풀고, 그가 오늘 죽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간수는 곧 돌아와서 들어가도 좋다고 일러주더군요. 들어가
    보니 소크라테스는 방금 사슬에서 풀려나 있었고, 그 옆에는 당신도 잘
    아는 크산티페(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애들을 안고 앉아
    있었습니다. 크산티페는 우리를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여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소크라테스, 당신이 친구분들과 이야기하고 저 분들이 당신과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에요. 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크리톤, 누구를 시켜서 저 사람을
    집으로 데려가도록 하게. 그래서 크리톤의 하인 중에서 어떤 사람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크산티페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크산티페가 나가자
    소크라테스는 침상에 앉아서 몸을 꾸부려 발을 문질렀습니다. 그리고
    발을 문지르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묘한 것인가, 그리고 쾌락의 반대라고 여겨지는 고통과의 관계도
    또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쾌락과 고통은 동시에 같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은 없으면서도 그 중 하나를 추구해서 얻은 사람은 대체로 다른 하나도
    어쩔 수 없이 얻기 마련이기 때문이야. 그 몸뚱이는 돌이지만, 머리
    하나에 붙어 있는 셈이야. 그리고 이솝이 이러한 점을 알았더라면, 그는
    신이 쾌락과 고통간의 싸움을 화해시키려다가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고
    양자의 머리를 하나로 만들어 버렸고 그래서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가
    뒤따르기 마련이라는 우화를 지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지금의 내
    경험으로도 알 수 있어. 발이 사슬에 묶였을 때에는 고통스럽더니,
    쾌락이 뒤따라오는 것 같아.
    이 말을 듣고 케베스가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솝의 이름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고,
    바로 그저께도 시인 에우에노스가 물은 질문인 생각납니다. 에우에노스는
    분명히 다시 물을 것이고, 따라서 내가 그에게 할 대답을 마련해 주셔도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내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한 줄의 시도 쓰지 않던 당신이 지금 감옥에 들어와서는 이솝의
    우화를 시로 옮기고 또 아폴론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짓는 까닭을 알고
    싶어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케베스,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게. 나는
    그나 그의 시와 겨룰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을. 그와 겨룬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네. 그러나 나는 어떤 꿈의 의미에 대해
    품고 있는 의아심을 씻어 버릴 수 있을지도 알고 싶었네. 나는 살아오는
    동안에 종종 내가 음악(원어는 무시케로 뮤우즈가 다스리는 기예 전반을
    가르친다. 따라서 시, 음악, 학문, 예술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넓은
    의미로 문예 라고 옳길 수도 있다. 여기서는 영어의 뮤직에 따라
    음악이라고 옮겼으나, 이 말이 갖는 넓은 뜻에 유의하기 바란다.)
    을 저어야 한다 는 암시를 꿈속에서 받았네. 똑같은 꿈이 때에 따라
    형태를 달리 하면서도 항상 같은 말, 또는 거의 같은 말을 들려주었네.
    곧 꿈은 음악을 연마하고 음악을 지어라 하고 말했네. 그리고
    지금까지는 나는 이 말이 나에게 다만 철학을 연구하도록 권고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네. 철학은 내가 일생 동안 탐구해 온 것이고
    또 가장 고상하고 가장 훌륭한 음악이니까. 그 꿈은 마치 경주를 하고
    있는 선수에게 선수가 달리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구경꾼들이
    달리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내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을 나에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네. 이 꿈이 말하는 음악은 항간의 통속적인 음악을 말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그래서 사형 선고를 받고 축제 때문에 나에게 잠시의
    유예가 생기자, 나는 내 의아심을 풀기 위해 꿈의 명령에 따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몇 편의 시를 짓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했네.
    그래서 우선 나는 축제의 신을 찬양하는 찬가를 짓고, 다음에는 시인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단지 낱말을 이어 맞추는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나는 만들어 낼 만한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네 ----- 시로 옮겨 놓은 것일세. 케베스,
    에우에노스에게 이렇게 말하고 그에게 용기를 내라고 전해 주게. 또한
    그가 바보가 아니라 현명한 삶이라면 나를 따라 오기를 내가 바라고
    있다고 말해 주게. 그리고 나는 아테네 사람들이 명령하는 대로 오늘
    죽게 될 것 같다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말씀입니까? . . . .
    나는 그 사람을 자주 만나 보았기 때문에, 내가 알기로는 그는 불가피한
    경우를 당하지 않는 한 당신의 충고를 따르지 않을 것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래? 에우에노스는 철학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는, 아니 그뿐 아니라 철학 정신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되지. 자살은 옳은 일이 아니니까.
    여기서 그는 자세를 바꾸어 발을 침상에서 땅에 내려놓았는데,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줄곤 앉아 있었습니다.
    케베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사람은 자살을 해서는 안 되지만
    철학자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케베스, 그리고 심미아스,
    자네들은 필롤라오스의 제자들인데, 그에게서 이 문제에 대해 듣지
    못했나?
    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애매 모호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내 말도 역시 들은 말을 옮기는 데 지나지 않지만, 내가 들은 말을
    전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그리고 사실상 나는 저 세상으로 가려고 하는
    때이므로 내가 바야흐로 출발하려고 하는 순례의 길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이에 대해 생각하고 담론하는 것은 매우 어울리는 일 같군.
    지금부터 해가 질 때까지(해가 지면 사형이 집행된다) 그 사이에 메우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러면 소크라테스, 왜 자살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진 말해 주시오.
    나는 방금 당신이 물어 본 필롤라오스가 우리와 함께 테바이에 있을 때
    자살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말을 했는데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이해할 날이 올
    걸세. 다른 나쁜 일들은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되기도
    하는데 어째서 죽음은 유일한 예외일까, 그리고 오히려 죽는 것이 나을
    경우에도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의 손을 기다려야
    하는가, 이 점을 의아하게 여길 줄로 생각하네.
    사실 말한 데에는 외견상 모순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모순이 없을 걸세. 인간은 문을 열고 달아날 권리를 갖지
    못한 죄수라고 몰래 속삭이는 주장이 있지.(오르페우스 교단의 극장을
    말한다. 이 교단에 의하면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도
    이 주장을 계승했다) 이것은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신비야.
    그러나 신들은 우리의 수호자이며 우리들 인간은 신들의 소유물이라는
    사실만은 나도 믿네. 자네는 동의하지 않나?
    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만일 자네의 소유물 중의 하나, 예컨대 소나 나귀가 죽는 것이
    좋겠다고 자네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자살한다면 자네는 화를
    내지 않겠나? 그리고 가능하다면 소나 나귀를 처벌하지 않겠나?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화를 내고 처벌해야지요.
    그렇다면 문제를 이와 같이 볼 때, 사람은 마땅히 기다려야 하고, 신이
    지금 나를 부르는 것처럼 신이 부를 때까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고 할 수 있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신의 말은 옳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우리의 수호자이며 우리는 신의 소유물이라는, 정당한
    것처럼 보이는 믿음과 방금 당신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철학자는 기꺼이
    죽어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절충하시겠습니까?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자들이 그들을 다스리는 최선의 지배자인 신들의 보호로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불합리한 듯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가 자유로워졌을 때, 신보다도 더 훌륭히 자기 자신을 보살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혹 이와 같이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리석은 자는
    끝까지 남아 있어서 선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것이 그의 의무이고,
    따라서 도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보다 훌륭한 자와 항상 함께 있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이것은 방금 말씀하신 것과는 반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현명한 자는 죽는 비탄하고
    어리석은 자는 기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케베스의 진지한 태도는 소크라테스를 흐뭇하게 만든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을 돌아보면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한결같이 탐구하고 들은
    것을 대뜸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군.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내 생각으로는 그가 지금
    말한 반대 의견에는 약간의 타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 달아나기를 원하고 자기보다 훌륭한 자로부터 쉽게 떠나려고
    한다면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케베스는 바로
    당신을 두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당신이 너무 쉽게 우리
    곁을 떠나려 하고 또 당신이 너무 쉽게 스스로 우리의 선량한 주인이라고
    공언한 신들로부터 떠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옳아,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마치 법정에 선 것처럼 자네의 비난에 대해
    변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 준다면 우리는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네들 앞에서 재판관들 앞에서 했던 변명보다 더 성공적인
    변명을 하도록 노력해 보겠네. 심미아스, 그리고 케베스, 우선 현명하고
    선한 다른 신들에게로 가려고 한다는 (이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확신을 갖고 있네), 그리고 둘째로 내가 뒤에
    남겨 두고 가는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들에게로 떠나간다는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신념이 나에게
    없다면 나도 죽음을 슬퍼해야 마땅하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신념을 갖고, 예로부터 전해 오는
    바와 같이 착한 사람에게는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 있다는
    훌륭한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야.
    그러나 소크라테스, 당신은 당신의 사상도 함께 갖고 가렵니까?
    당신은 그 사상을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렵니까? 그 사상들은
    우리도 알아두어야 할 은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신이 우리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에 대한 비난을 논박하는 대답이 될
    것입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네. 그러나 우선 크리톤의
    말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그는 아까부터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했으니까.
    크리톤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일이 아닐세. 자네에게 독약을 줄
    책임을 진 간수가 아까부터 내가 자네에게 전해 주기를 바라며 나에게 한
    말인데 자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된다네. 말을 하면 열이 오르고
    열이 오르면 독약의 작용을 방해하기 쉽다고 간수가 말하네. 흥분한
    사람들은 때로는 두 번, 세 번씩 마셔야 한다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할 일이나 생각하라고
    하게. 그리고 필요하다면 두 번, 세 번이라도 독약을 줄 준비나 하라고
    하게. 이게 전부일세.
    크리톤은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네,
    그러나 간수의 말을 안 들어 줄 수도 없었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간수에 대해서는 너무 염려하지 말게.
    그러면 오, 나의 재판관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진정한 철학자는 죽음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으며, 또한 죽은 다음에는 저
    세상에서 최대의 선을 얻는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네. 심미아스와 케베스, 어떻게 그러한지를 나는 설명하고자 하네.
    진정으론 철학에 헌신하는 사람은 남에겐 오해받기 쉽기 때문일세. 세상
    사람들은 참된 철학자는 항상 죽음과 죽어 가는 것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그리고 만일 사실이 이렇다면, 그리고 그는 일생 동안 죽음을
    갈망해 왔다면 그가 대망 하던 시간이 닥쳤을 때 어째서 그가 한결같이
    추구하고 갈망하던 일을 한탄할 것인가?
    심미아스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을 일은 아닙니다만, 소크라테스,
    당신의 말을 들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군요. 많은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이 철학자를 참으로 잘 설명했다고 말할 것이고, 우리 고향
    사람들도 철학자들이 바라는 삶은 사실상 죽음이며 철학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미아스,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옳아. 단
    철학자들이 알게 되었다 는 말만 제외하고는-----. 참된 철학자에게
    합당한 죽음이 어떤 것인지, 또는 어떻게 죽는 것이 합당하고 어떠한
    죽음을 원하는지를 철학자들이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야.
    그러나 참된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 두세. 우리들의 문제나
    토론하기로 하세.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분명히 있습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아닌가?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이러한
    분리의 완성인 것이다,. 영혼이 독립해 있어서 육체로부터 해방되고
    육체가 영혼으로부터 해방될 때, 이것이 바로 죽음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또 한가지 문제가 있네. 만일 자네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문제는 우리의 현재의 탐구를 밝혀 줄 걸세.
    철학자는 먹고 마시는 쾌락 -----이것도 쾌락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에 유념해야 마땅한가?
    물론 안 됩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쾌락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철학자는 사랑의 쾌락을
    추구해야 할까?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예를 들면 값비싼 옷이나 신발, 기타의 육신의 장식품을 얻는
    따위, 그 밖의 여러 가지 신체적 향락을 철학자는 보람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철학자는 자연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은 경멸해야 할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참된 철학자는 이러한 것들을 경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참된 철학자는 전적으로 영혼에만 관심을 갖고, 육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가능한 한 육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영혼만을 생각한다는 말이겠지?
    옳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철학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영혼을 육체와의
    결합으로부터 분리하는 온갖 방법을 다 쓴다는 것이겠지?
    옳습니다.
    그러나 심미아스,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 쾌락에서 쾌락 감을 얻지
    못하고, 또 육체적 쾌락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살 만한 것이
    못되어 육체적 쾌락에 무관심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는 의견인데-----.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지식의 획득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육체는 만일
    탐구에 참여한다면 방해가 될까, 도움이 될까? 다시 말하면 보고 듣는
    데에도 어떤 진리가 있는가 하는 말일세. 보거나 듣는 것은 시인들이 늘
    우리에게 일러주듯이 부정확한 증인이 아닌가? 그렇지만 보고 듣는
    것조차 부정확하고 명석하지 못하다면 다른 감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자네는 보고 듣는 것은 감각 가운데서는 가장 나은
    것이라고 인정할 테지?
    그렇다면 영혼은 언제 진리를 획득하는가? 육체와 함께 무엇을
    고찰하려고 하면 영혼은 속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존재가 드러난다고 하면, 그것은 사유를 통해서 영혼에
    드러나야 하겠지?
    네.
    그리고 정신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소리나 시각이나 고통이나 쾌락
    따위가 정신을 괴롭히지 못할 때, 곧 정신이 육신으로부터 떠나서 가능한
    육신과 관계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하면 정신이 육체적 감각이나 욕망을
    갖지 않고 오직 참된 존재만을 갈망할 때, 사유는 최상의 것이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철학자는 육체를 경멸하고,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나 홀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좋아. 그러나 심미아스, 또 다른 문제도 있네. 정의 자체가 있을까,
    없을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미 자체, 선 자체도?
    물론입니다.
    그러나 자네는 자네의 눈으로 그러한 것들을 본 일이 있나?
    결코 보지 못했습니다.
    혹은 다른 육체적 감각으로써 이러한 것들에 도달한 일이 있었나?
    그런데 나는 이러한 것들뿐 아니라 크기 자체, 건강 자체, 또는 만물의
    본질, 또는 참된 본성도 말하고 있는 것일세. 자네는 육체의 기관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의 실재를 지각해 본 적이 있었나? 혹은 오히려 지적
    통찰력으로써 그가 고찰하는 각각의 사물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몇 가지 자연에 대한 지식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유 작용에 있어서 정신만으로써 위에서 말한 것에 접근하고
    이성과 함께 시각이나 기타의 감각을 끌어들이거나 침입시키지 않고, 바로
    명석한 정신과 빛으로써 각각의 진리 그 자체를 탐구하는 사람이 정의
    자체, 미 자체 등에 관한 가장 순수한 진리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눈이나 귀난 기타의 모든 신체는 영혼을 더럽힐 때에는 진리와
    지식의 획득을 방해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의견으로 가능한
    한 눈이나 귀나 기타의 신체와 관계를 끊은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참된
    존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것이 아닌가?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신의 말에는 놀라운 진리가
    깃들이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을 고려할 때, 진정한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 진정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육체와 더불어 있는 동안은, 그리고 영혼인 육체의
    악에 감염되는 동안은 우리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우리와
    우리의 논의를 이끌어 가는 사유의 길을 우리는 찾아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욕구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육체는 양식을
    요구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끝없는 번거러움이 생기고 게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우리의 참된 존재에 대한 추구를 압도하고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체는 우리의 마음속을 애욕과 욕망과 공포와 모든
    종류의 환상과 끝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사실상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사유의 힘을 전적으로 빼앗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불화나 분쟁은 왜 일어나는가? 육체와 육체의 욕망이 바로 그
    원인이 아닌가? 전쟁은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돈은 육체 때문에
    육체를 돌보기 위해서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장애로 말미암아 우리는 철학 하는 데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가장 나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간 한가한 시간엔 생겨서
    사색에 잠기려고 하더라도 언제나 육체가 끼여들어 우리의 탐구에 동요와
    혼란을 일으켜서 놀라웁게도 우리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가지려면, 육체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험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는 일이다. 영혼
    자체만이 사물 자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만 우리는
    우리가 갈구하며, 우리의 애인이라고 부르는 지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야 도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영혼은 순수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면 다음 두 경우 중의 하나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곧 지식은
    전혀 획득되지 않거나 또는 획득된다 하더라도 죽은 다음의 일인 것이다.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영혼은 육체를 떠나 홀로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현세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육체와 관계를 갖거나 사귀지 않고 또 육체의
    본성에 전염되지 않고 신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시가까지 우리 자신을
    깨끗이 지킬 때 우리는 지식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육체의 어리석음으로부터 풀려날 때, 우리는 순수하게
    될 것이며 순수한 것과 사귈 것이며 스스로 도처에서 밝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빛은 바로 진리의 빛이다. 라고 말할 거야. 순수하지
    못한 것은 순수한 것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야. 심미아스, 이것이 참된
    애지자들이 서로 주고받지 않을 수 없고,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일세. 자네도 동의하겠지, 그렇지 않는가?
    소크라테스, 물론입니다.
    그러나 오, 친구여, 이것이 진리라면, 내가 나의 여행을 마치고 지금
    가려고 하는 곳에 다다르면, 평생 동안 추구하던 것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네. 그러므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나의 길을 가려고 하며 나만이 아니라 마음에 결심이 서 있고 순수한
    태도를 가졌다고 믿는 모든 사람이 그럴 거야.
    옳은 말입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바로
    카타르시스가 아닌가? 곧 영혼이 모든 방면에서 육체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응접하고 결합하며, 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도
    가능한 영혼이 자기 자신의 자리에 홀로 머물러 있는 습관, 이것이야말로
    영혼이 육체의 쇠사슬로부터 풀려나는 것이 아닌가?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철학자만이 항상 영혼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영혼과 육체의 분리 및 해방은 그들의 각별한 관심사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죽음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서 살려고 하던 사람들이
    죽음이 닥쳤을 때, 불평을 말한다는 것은 처음에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가소로운 자가당착일 거야.
    물론입니다.
    따라서 심미아스, 참된 철학자들은 항상 죽음을 연습하고 있으며,
    따라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게. 곧 참된 철학자들은 모든 면에서 육체의 적이었으며 영혼과
    함께 있는 것만을 원하고 있다면 그들의 이러한 소망이 성취될 때, 그들이
    거기에 도착하면 평생 동안 소망하던 것-----이것은 지혜야 -----을 얻을
    희망이 있고 동시에 적과 함께 있지 않아도 될 곳으로 출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무서움에 떨고 한탄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모순된
    태도일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명부에 가면 거기서 지상에서 사랑하던
    사람들이나 아내나 자식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서 죽기를 원해 왔어. 그런데 참된 애지자이며 명부에서만 지혜를
    보람있게 터득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철학자라면,
    그는 기쁜 마음으로 떠날 것이 분명해. 그는 거기에서 오직 거기에서만
    순수한 형태로 지혜를 찾아낼 수 있다는 부동의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야. 따라서 이것만이 진리라면,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그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어.
    정말 그렇습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따라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슬퍼하고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육체를 사랑하는 자이며, 동시에 돈이나
    권력 또는 두 가지를 다 사랑하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충분한 증거야.
    그렇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따라서 심미아스, 용기는 철학자에게만 특유한 성품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또한 절대로 마찬가지야. 일반 대중들도 절제는 정욕을 다스리고
    누르는 것이며 정욕보다 탁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 이 절제도
    오직 육체를 경멸하고 철학 하는 생활을 하는 자에게만 속하는 덕이
    아닌가?
    자네가 다른 사람들의 용기와 절제를 고려해 보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모순된 것임을 알게 될 거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네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커다란
    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용감한 사람도 보다 큰 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오직 공포 때문에
    다시 말하면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용감한 거야. 그런데 사람들이
    공포 때문에, 또 비겁하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야.
    그렇군요.
    그리고 절제도 마찬가지 경우가 아닌가? 사람들은 방종하기 때문에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야. 이 말이 모순된 것 같이 모르지만, 사실은
    이것이 저들의 어리석은 절제의 진상이야. 그들에게는 잃어버리기 싫은
    쾌락이 있고 이 쾌락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몇 가지 쾌락을 삼가는데,
    이는 다른 쾌락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쾌락에 정복당하는 것을
    사람들은 방종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에게는 쾌락의 정복은 쾌락에 의해
    정복당함으로써만 가능한 거야.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그들은 방종하기
    때문에 절제하게 된다는 말을 한 거야.
    사리에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공포나 쾌락이나 고통을 마치 화폐처럼 다른 공포나
    쾌락이나 고통과 바꾸고, 또 보다 큰 것을 보다 작은 것과 바꾸는 것은
    덕의 교환은 아니냐. 오, 축복 받은 심미아스, 모든 사물을 교환할 수
    있는 참된 화폐가 하나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지혜야. 이러한
    지혜와 바꿀 때에만, 그리고 이러한 지혜를 가져야만 용기든, 절제든,
    정의든, 무엇이든지 참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모든 참된
    덕은 공포나 쾌락이나 이밖에 이와 비슷한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이
    따르든 따르지 않든 간에, 지혜와 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좋은 것으로 되어 있는 덕도 지혜와 분리되어 서로 맞바꾸게
    되는 경우에는 덕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또한 여기에는 어떠한 자유도
    건강도 진리도 없어. 그러나 참된 교환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은
    정화되지. 그리고 절제, 정의, 용기, 지혜 자체가 이러한 것들을
    정화하는 거야. 신비 의식의 창시자들은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을 한 것
    같아. 그들이 오래 전에 비유를 통해 정화되지도 않고 비의도 받지 않고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은 진흙 구덩이에 빠지지만, 비의를 받고 정화된
    다음에 저 세상에 닿은 사람은 신들과 함께 살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난센스가 아니냐. 비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르테에크스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자는 많으나 박쿠스는
    적기(나르테에크스는 남구에 있는 나무의 일종. 속이 비어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이 나무 속에 불을 넣어서 갖고 왔다고 한다. 박쿠스 제
    때 이 나무를 휘두르며 도취 속에서 박쿠스 산과 합일하는 체험을
    얻으려고 했다. 따라서 나르테에크스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박쿠스는 적다고 한 것은 산과의 합일을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은 적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정화되어서 저 세상으로 가는
    사람은 적다는 뜻이다) 때문이야. 나는 이 말이 <참된 철학자>가 적다는
    뜻으로 해석하네. 나는 평생을 통해 능력껏 이러한 참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왔네. 내가 올바르게 노력해 왔는지, 또는 내가
    성공했는지 그 여부를 나는 잠시 후에 사실 그대로 알게 될 걸세. 나
    자신이 저 세상에 도달했을 때 신이 알려 주려고 한다면-----. 이것이
    나의 신념이네. 그러므로 심미아스와 케베스여, 나는 여러분과 이
    세상에서의 나의 주인으로부터 떠나가면서 서러워하지도, 불평하지도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네. 나는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좋은 주인과 벗을 만나게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믿지 않아. 따라서 내가 아테네의 재판관들에 대해
    서도보다도 여러분들에 대해서 더 잘 설득을 했다면 아주 좋은 일일텐데.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의 말의 대부분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영혼에 관한 말은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육신을 떠나자 있을 곳이 없어지고, 따라서
    죽은 그날로 사멸하고 종말을 고하며,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연기나 공기처럼 뿔뿔이 흩어져 날아가다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두려워합니다. 소크라테스, 만일 당신이 말한 여러 가지 악으로부터
    해방된 다음에 영혼이 다시 온전하게 모일 수만 있다면 당신이 말한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영혼은 여전히 존재하며 어떤 침과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상당한 논증과 증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옳은 말이야, 케베스. 그러면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데 대해 좀더 이야기하기로 할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몹시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은 그가
    설사 오래 된 적인 저 희극 작가들(희곡 구름 에서 소크라테스를 조롱한
    아리스토파네스 등을 말한다)중의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관심도
    없는 문제에 대해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비난하지는 못할 거야. 따라서
    자네가 원한다면 탐구를 계속하기로 할까.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에
    명부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문제부터 고찰하기로 하세. 영혼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다가 이 세상으로 되돌아와서 죽은 자로부터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옛날의 이론이 생각나는군. 만일 산 사람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영혼은 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영혼이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 산 사람은 오직 죽은 사람으로부터만
    태어난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저 세상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해질 거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논증이 필요하겠지.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다만 인간에 관련시켜서 고찰하지 말고 동물 전체,
    식물 전체, 따라서 생성하는 모든 것에 모두 이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선과 악, 정의와 부정 등을 말하는 것일세.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이밖에도 무수하게 있지. 그리고
    나는 모든 반대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동일한 교체 관계가 있을 뿐임을
    보여 주고 싶네. 다시 말하면 예컨대 어느 것이 더 큰 것이 되었다면
    그것은 더 작은 것이 된 다음에야 더 큰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일세.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다 약한 것은 보다 강한 것으로부터 생기고 보다 빠른 것은
    보다 느린 것으로부터 생길 테고.
    맞습니다.
    또 보다 나쁜 것은 보다 좋은 것으로부터, 보다 옳은 것은 보다 옳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기고.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반대 관계에 해당되겠지? 반대 관계에 있는 것은
    모두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겼다고 믿어도 좋을까?
    네.
    모든 사물의 이와 같이 보편적인 반대 관계에는 또한 항상 진행되고
    있는 두 가지 생성 과정, 곧 갑으로부터 을로, 그리고 을로부터 갑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있어서 생장하는 것을 증가라 하고 쇠퇴하는 것을
    감소라고 하는 것이겠지?
    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분할과 결합, 냉각과 가열 등 기타의 많은 과정이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갑이 을로 되고 을이 갑으로 되는 변천을 내포하고
    있네. 그리고 일일이 말로 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러한 과정이
    필연적으로 모든 반대 물을 지배하고 있네. 반대 물은 사실상 반대
    물로부터 나오고, 갑으로부터 을이 되는 변천, 또는 과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자, 그러면 잠자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의 반대인 것처럼 삶의 반대 물도
    있지 않을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있습니다.
    그러면 그게 무엇인가?
    죽음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죽음과 삶이 반대 관계에 있다면, 죽음과 삶은 각기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기고, 또한 두 가지 생성 과정도 있겠지?
    물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 나는 자네에게 말한 두 쌍의 반대물
    중의 하나와 그 생성 과정을 분석할 테니, 자네는 다른 하나를 나에게
    설명해 주게. 두 쌍의 반대물 중의 하나란 잠자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을
    말하네. 잠자는 상태는 깨어 있는 상태의 반대이고 잠자는 상태로부터
    깨어 있는 상태가 생기고 깨어 있는 상태로부터 잠자는 상태가 생기네.
    생성 과정은 하나는 잠드는 것이며, 또 하나는 깨어나는 것이지. 옳다고
    생각하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면 같은 방식으로 자네가 삶과 죽음을 나에게 설명해 주게.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닌가?
    네.
    그리고 삶과 죽음 각기 반대 물로부터 생기겠지?
    네.
    산 것으로부터는 무엇이 생길까?
    죽음입니다.
    그리고 죽은 것으로부터는?
    오직 한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산 것이라고.
    그러면 케베스, 그것이 사물이든 인간이든 간에, 살아 있는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생긴다는 말이지?
    분명히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이 추리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명부에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겠지?
    그렇습니다.
    두 가지 과정 또는 생성 중의 하나는 볼 수 있네. 죽는 것만은 확실히
    볼 수 있지 않은가?
    분명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반대되는 과정은 제외해도 될까? 자연은
    다리 하나로만 걸어다닌다고 할 것인가? 오히려 우리는 죽음에 대응하는
    생성 과정을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합니다. 라고 케베스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 과정은 무엇인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다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죽은 살아
    있는 것의 세계에 태어나는 게 아닌가?
    정말 그렇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죽은 것이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생긴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새로운 길이 있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은 자의 영혼은 어떤
    곳에 있다가 거기서 되살아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우리가 앞에서
    인정한 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그러한 결론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케베스, 앞에서 인정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입증되리라고 생각하네. 곧 생성은 직선으로만 진행되고 자연에는
    보상이나 순환이 없으며 어떤 요소들이 그 반대물로 되었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 없다면, 모든 사물은 결국은 같은 형태를 갖고 같은
    상태에 놓이고 따라서 사물의 생성은 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무슨 뜻이죠? 라고 케베스는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매우 단순한 일이야. 잠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잠자는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의 교체가
    없다면, 결국 잠자는 엔뒤미온(코린토스의 목동 엔뒤미온은 후세의
    미남이어서 달의 여신 아르테마스가 그에게 반했다. 여신은 자신의
    애무를 의식하지 못하도록 엔뒤미온을 영원한 잠에 빠지게 했다)의
    이야기는 무의미해질 거야. 모든 다른 사물도 역시 잠자는 상태에 있을
    것이므로 그를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지 못해 것이기 때문이야. 또는
    결합만이 있고 실체의 분할이 없다면, 아낙사고라스의 혼돈(아낙사고라는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그는 태초에는 혼돈이 있을 뿐이었으나
    누우스(이성)에 의해 분리 정돈됨으로써 세계에 질서가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이 다시 나타날 거야. 친애하는 케베스, 만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죽고 죽은 다음에는 죽은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것은 죽게 되고 산 것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거야. 이밖에 다른 결과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살아 있는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나오고, 또한 이 다른 것들도 죽는다면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리게 될 것이 아닌가?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다른 도리는 없군요,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의
    논증이 절대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래 케베스, 내 의견으로도 반드시 그럴
    것 같군.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인정함으로써 기만당하는 것은
    아니냐. 오히려 나는 다시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있고, 살아 있는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생기고 죽은 자의 영혼은 생존하며 착한 영혼은 악한
    영혼보다 더 좋은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확신하네.
    케베스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지식은 상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당신이 좋아하는 이론이군요. 이 이론이 옳다면 우리가 지금
    상기하는 것은 예전에 배운 일이 있었다는 것이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사람의 형태로 존재하기 전에 어디엔가 있지
    않았다면 이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영혼 불명에 대한
    또하나의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케베스, 말을 잠시 돌려서 상기설을
    밑받침하는 논거가 무엇이었는지 말해 주게. 지금 나는 이에 대해 확실한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질문에 의해서 훌륭한 증거를 파악할 수 있네.
    자네가 어떤 사람 그에게 올바른 방식으로 질문을 한다면 그는 스스로
    옳은 대답을 찾아 낼 걸세. 그러나 만일 이미 지식과 올바른 이성이
    없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하겠나? 그리고 이것은 도형이나 이와
    비슷한 것을 문제로 삼을 때 가장 명백하게 입증되네.(플라톤의 다른
    대화편 메논 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지한 소년에게 질문을 통해 스스로
    피타고라스의 공리를 풀게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심미아스, 자네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면,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세. 자네는 아직도 지식이 상기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아 하는 말일세.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상기설을 스스로
    상기하고 싶었던 것이며 케베스의 말을 듣고 다시 상기하게 되고 옳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직도 당신이 어떻게 말할 것인지 알고 싶군요.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네. 곧
    내가 잘못이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 상기하는 것은 전에 언젠가는 배웠던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점에 우리는 동의해야 할걸세.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지식 또는 상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네. 어떤 것을 보거나 듣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지각한 사람은
    그것을 알 뿐 아니라,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이외의 개념도 갖게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그런데 이 개념은 그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별개의 개념이네. 따라서 그는 개념을 갖고 있던 것을 상기한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을까?
    무슨 뜻이지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예를 들어 말하면 다음과 같네. 수금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다르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늘 쓰고 있는 수금이나 옷이나 그 밖의 다른
    것을 보았을 때 애인들의 감정은 어떨까? 그들은 수금을 알아보고 마음의
    눈으로 그 수금의 주인인 청년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상기일세. 마찬가지로 심미아스를 본 사람은 케베스를 상기할 걸세.
    이러한 예는 무수히 있네.
    정말로 무수히 있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상기는 대체로 시간이 흐르고 부주의로 말미암아 이미 잊었던
    것을 회복하는 과정일세.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자, 그렇다면 자네도 집이나 수금의 그림을 보고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가 있겠지? 그리고 심미아스의 그림을 보면 케베스를 상기하게 될
    거야.
    그렇습니다.
    또한 자네는 심미아스 자신을 상기하는 경우도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상기는 비슷한 것으로부터 생기기도
    하고, 비슷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기기도 하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기가 비슷한 것으로부터 생겼을 때, 확실히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네. 곧 그 유사성이 상기된 것에 어느 정도 미치지 못하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그렇군요.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등>하다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세. 그러나 나뭇조각이나 돌이 다른 나뭇조각이나 돌과 같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넘어서서 대등 자체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맹세코
    생명을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대등 자체의 본질을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우리의 지식을 얻는가? 우리는 나뭇조각이나 돌 같은
    물질적인 것들을 보고 대등함을 알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이러한 것들과는
    다른 대등이라는 관념을 추출해 냈는가? 자네는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거야. 혹은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기로 하세.
    동일한 나뭇조각이나 돌이 어느 때는 같고 어느 때는 같지 않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같은 것은 항상 같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대등하다는
    관념이 대등하지 않다는 관념과 동일한 경우가 있나?
    그렇다면 이러한 이른바 대등한 것들이 대등하다는 관념과 동일한 것은
    아니겠지?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런데 대등한 것들은 대등하다는 관념과는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등한 것들로부터 자네는 대등하다는 관념을 인식하고 획득하나?
    그렇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대등하다는 관념은 대등한 것들과 비슷한 경우도 있고 비슷하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
    네.
    그러나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야. 자네가 어떤 것을 보면 비슷한
    것이든 비슷하지 않은 것이든 간에 언제나 다른 것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그것은 상기 작용이 아닐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무나 돌이나 기타의 물질적인 것들의 대등한 면에 대해서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러한 것들로부터 어떠한 인상을 받는가?
    대등 자체가 같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이러한 것들도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이러한 것들은 대등 자체에 어느 정도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네, 훨씬 못합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나나 또는 다른
    사람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다른 것과 같게 되려고
    하지만 이에 미치지 못하고 다른 것이 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열등하다는
    것을 관찰할 때 이러한 관찰을 한 사람은 어떤 것이 그것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을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거야.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것은 대등한 것들과 대등 자체라는 우리들의 문제에도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으로 물질적인 대응물들을 보고 이러한 외견상
    대등한 것들은 대등 자체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앞서서 대등 자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또한 대등 자체는 시각이나 촉각, 기타의 감각을 매개로 해서만
    알려지고 또한 그렇게 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에서는 모든 감각이 같지 않을까?
    네, 소크라테스. 지금의 논의에서 본다면 모든 감각에 대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감각적인 사물은 대등 자체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이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지식을 감각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을 게 아닌가?
    네.
    그렇다면 우리는 보거나 듣거나 기타의 방식으로 지각을 시작하기 전에
    절대적인 대응을 알고 있어야 할거야. 그렇지 않으면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된 대응물들에 이 기준을 적용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된 대응물들은 절대적인 대응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이에 미치지는
    못하기 때문이야.
    지금까지의 논의로 보아서 그밖에 추리는 불가능하군요.
    그리고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보고 듣고 또 다른 감각을 사용하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전에 대응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 것이 틀림없겠지?

    네.
    말하자면 태어나기 전이란 뜻이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러한 지식을 획득했고, 또
    나면서부터 이러한 지식을 활용한다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에 <같다>든지, <보다 크다>든지 <보가 작다>든지 하는
    것만이 대등 자체만이 아니고 아름다움, 선, 정의, 거룩함, 그밖에 우리가
    묻고 대답하는 대화 과정에서 본질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야.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지식을
    얻었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지식을 얻은 다음에 우리가 각각의 경우에 획득한 것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지식을 갖고 태어나서 생명이 있는 한
    언제나 계속해서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거야. 안다는 것은 지식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야. 심미아스, 망각은
    바로 지식의 상실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얻은 지식을 태어날 때에 상실하고, 그
    후에는 감각을 사용하여 이전에 알고 있던 것을 회복한다면, 우리가
    학습이라고 부르는 과정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던 지식을 회복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과정을 상기라고 불러도 잘못은 아니겠지?
    옳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점이 명백해지네. 우리가 시각이나 청각이나
    기타의 감각의 도움을 받아서 어떤 것을 지각할 때, 이러한 지각으로부터
    그것과 비슷하든 비슷하지 않든 간에 그것과 관련이 있으나 망각했던 어떤
    다른 것의 개념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따라서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이자 택일 중의 하나가 가능할 걸세. 곧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일생 동안 계속해서 알고 있거나, 또는
    태어난 다음에는 학습을 하는 사람들만이 기억하며 따라서 학습은 상기에
    지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일세.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면 심미아스, 자네는 어느 쪽을 택하려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식을 갖고 있었는가, 또는 태어나기 전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인가?
    당장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자네는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설명할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나?
    분명히 그는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네는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소크라테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까! 나는 오히려 내일
    이때쯤이면 이 문제에 대해서 정당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미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심미아스, 모든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인가?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배웠던 것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의 영혼은 이러한 지식을 얻었을까? 인간으로 태어난
    후가 아니라면?
    분명히 태어난 후에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태어나기 전인가?
    네.
    그렇다면 심미아스, 우리의 영혼은 인간의 형태를 취하기 이전부터
    육체 없이 존재했고 지능도 갖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네.
    소크라테스, 이러한 개념들이 바로 태어나는 순간에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당신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태어나는 때가 남아
    있는 유일한 시간이니까요?
    그렇지, 나의 친구여.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 개념들을
    잃을까? 우리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 개념들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야.
    이점은 이미 인정한 바 있네.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을 받는 즉시로 잃어
    버렸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때에 잃어 버렸는가?
    소크라테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는 부지중에 난센스를
    말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심미아스, 우리가 늘 말해 온 바이지만 아름다움 자체, 선
    자체, 모든 사물의 절대적 본질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방금 알게 된 이러한 본질에 우리의 모든 감각을
    관련시키고 또 이러한 관념을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있었고 선천적인
    소유물임을 발견하고서 이 본질과 우리들의 모든 감각을 비교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영혼의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논의는 무력한 것이
    아니겠나? 우리의 영혼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념들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일세.
    만일 관념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영혼이나 관념의 존재에 대해 똑같은
    필연성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논의는 탄생 이전의 영혼의
    존재는 당신이 말하는 본질의 존재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성공적으로 도달했습니다. 아름다움, 선, 그리고 당신이 방금 말한
    기타의 개념들이 가장 진정하고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이것보다 더
    명백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상의 증명으로
    만족합니다.
    좋아. 그러나 케베스도 역시 만족했는지? 나는 케베스도 설득하지
    않으면 단 되거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케베스도 만족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간 중에서는 가장 의심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도 역시 탄생 이전의
    영혼의 존재를 충분히 믿게 되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도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점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고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는 케베스가 언급한 많은
    사람들의 감정, 곧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흩어져 버릴 것이며, 이것이
    영혼의 종말이라고 하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혼이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며 특별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의 육체에 들
    오기 전에도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어째서 일단 육체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 다음에 소멸해서 없어지지 않을까요?
    케베스가 말했습니다. 심미아스, 자네 말이 옳아. 필요한 증명의
    절반은 된 셈이야. 곧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되었네. 죽은 다음에도 태어나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존재하리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며, 이것은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증명이 이루어지면 논증은 완성될 거야.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증명했네. 자네가 두 가지 논증, 영혼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다는 논증과 우리가 앞서 인정한 바있는 또 하나의 논증, 곧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은 것으로부터 태어난다는 논증-----을 합쳐 본다면 알
    수 있을 걸세. 만일 영혼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며, 생명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에는 오직 죽음과 죽은 자로부터만 태어날 수 있다면,
    영혼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혼은 죽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존재해야
    하지 않은가? 자네가 바라는 증명은 이미 완료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네.
    나는 아직도 자네와 심미아스는 이 논의를 더 증명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네. 자네들은 어린애처럼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바람이 영혼을 정말로 날려 버리고 흐트러뜨려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네. 특히 사람이 심한 폭풍우 속에서 죽거나 하늘이
    맑지 못할 때에 죽는다면 그럴 것이라고 -----.
    케베스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우리가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게다가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는 어린애가 있어서
    이 어린애에게는 죽음은 유령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 어린애가 어둠 속에
    홀로 있을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네들이 마법으로 그 두려움을 쫓아 버릴
    때까지 매일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도록 하세.
    그런데 당신이 떠나 버리고 나면 어디서 우리는 두려움을 쫓아 줄
    훌륭한 마법사를 구할 수 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케베스, 그리스는 넓은 곳이네. 훌륭한
    사람도 많고 외국에서 온 종족도 적지 않아. 이러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훌륭한 마법사를 찾게. 먼 곳까지 가서 널리. 수고나 돈을
    아끼지 말고. 돈을 쓰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찾아보아야 하네. 자네들보다 이 일은 더 잘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반드시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당신이 괜찮다면, 아까 중단했던 논점으로 되돌아가기로 합시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세.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흩어져 버리는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우리가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이것부터 따져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 다음에 더 나아가 우리는 흩어져 버리는 것이 영혼의
    본질인지 아닌지를 탐구해야 할거야.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해 희망을
    품을 것인가, 또는 두려워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에서
    밝혀질 거야.
    그렇군요.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복합물이나 합성물은 합성된 것이기 때문에 또한 당연히 분해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합성되지 않은 것은, 만일 이러한 것이 있다고
    하면, 이것만은 분해될 수 없을 거야.
    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군요.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따라서 합성되지 않은 것은 항상 동일하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며,
    반면 합성된 것은 항상 변하고 결코 동일할 수 없을 거야.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까 논하던 데로 되돌아가기로 하세. 우리가 대화
    과정에서 실재 또는 참된 존재-----대응의 본질이든, 아름다움의
    본질이든, 또는 기타 어떤 것의 본질이든 -----라고 정의한 관념, 또는
    본질은 어떠한 본질인가? 다시 말하면 그것은 때에 따라 어느 정도
    변화하는 본질인가? 또는 그것은 각기 항상 그대로 있으며 항상 동일하고
    단순한 독립적이며 불변의 형태를 갖고 있고,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또
    어느 때에 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본질인가?
    소크라테스, 그것은 항상 동일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는데-----사람, 말, 옷, 기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똑같다든지,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것-----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항상 변하지 않고
    동일한가, 또는 정반대인가?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나
    상호간에 있어서나 거의 언제나 변하고, 거의 언제나 동일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후자입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이러한 것들을 만지고 보고 감각을 통해 지각할 수
    있지만, 불변의 것들은 오직 정신을 통해서만 파악하지 않나? 불변의
    것들은 형태가 없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두 종류의 존재, 곧
    하나는 보이는 것이고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
    그렇게 합시다.
    보이는 것은 변화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변화하지 않을 테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 인간의 한 부분의 육체이고 또 하나의 부분은 영혼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육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어떤 것에 가깝고,
    어떤 것을 더 닮았는가?
    물론 보이는 것에 가깝지요. 이 점은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소크라테스, 인간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인다> 또는 <보이지 않는다> 고 한 것은 사람의 눈에
    <그 형태가 보인다> 또는 <그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네.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이지?
    네.
    그러면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에 더 가깝고, 육체는 보이는 것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런데 예전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오지 않았는가? 영혼이 육체를
    지각의 도구로 사용할 때, 다시 말하면 시각이나 청각이나 기타의 어떤
    감각을 사용할 때-----육체를 통해 지각한다는 것은 감각을 통해
    지각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야-----영혼도 육체에 의해 가면적인 영역으로
    이끌려 들어가 방황하고 혼미에 빠진다고 말해 오지 않았는가? 세계가
    영혼을 속박해서 영혼을 변화에 접하게 되면 술취한 사람처럼 허둥지둥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반성할 때, 영혼은 다른 세계, 곧
    순수하고 영원하며, 불멸하고 불변하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네. 이러한
    것들은 영혼과 동질적인 것으로서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허용을
    받고 방해를 받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이러한 것들과 함께 살게 되네.
    이와 같이 되면 영혼은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고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과
    사귐으로써 영혼은 불변의 것이 되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의 상태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훌륭한 말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앞서 논한 것과 지금 논한 것으로부터 추리한다면 영혼은 어느
    것에 더 가깝고 어느 것을 더 닮았는가?
    소크라테스, 지금까지의 논의를 경청한 사람은 영혼은 변하지 않는
    것에 무한히 가깝다는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주
    둔한 사람들까지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는 변하는 것에 더 가까운가?
    네.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 번 고찰해 보기로 하세. 곧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을 때, 영혼은 지배하고 다스리고, 육체는 복종하고
    섬길 것을 자연히 명한다고-----. 그런데 이 두 기능 중에서 어느 것이
    신적인 것을 닮았는가? 신적인 것은 본 성상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이며
    죽어야 할 것은 지배받고 예속되는 것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어느 것을 닮았는가?
    영혼은 신적인 것을, 육체는 죽어야 할 것을 닮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면 케베스, 지금까지 말해 온 모든 것 중에서 이것이 결론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곧 영혼은 신적인 것에 매우 흡사하고 불멸하며
    예지적인 것이고, 단일한 형태를 갖고 분해되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고, 한편 육체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며 사멸해야 하고 예지적인 것이
    아니고 많은 형태를 가졌고, 분해되며 변화하는 것이네. 친애하는
    케베스, 위해서 말한 것을 명확하게 부정할 수 있는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면 육체는 재빨리 분해되지 않을까? 그리고
    영혼은 거의 또는 전적으로 분해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네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알고 있을 테지? 인간이
    죽은 다음에 육체, 다시 말하면 인간의 눈에 보이는 부분, 곧 눈에 보이는
    세계에 놓여 있고 시체라고 불리며 본성적으로 분해되고 부패하고
    소멸되는 것은 임종 당시의 육체적 조건이 좋고 그해의 계절이 유리하면
    즉시 분해되거나 부패하고 않고, 얼마 동산 아니 심지어 오랫동안
    보존된다는 것을----. 이집트에서 하는 것처럼 육체를 수축시키고 향유를
    바르면 육체는 거의 영구히 보존될 수도 있네. 그리고 썩는다 하더라도
    뼈나 인대처럼 사실상 파괴되지 않는 부분도 있네. 그렇지 않은가?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영혼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고 순수하고 고상한 참된
    명부로 가며 선하고 현명한 신에게로-----신이 허락하신다면, 나의 영혼도
    곧 가게 되거니와 -----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러한 것이
    영혼의 본성이요 기원이라고 한다면, 나는 거듭 말하거니와 이러한 영혼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육체를 떠나자마자 바람에 날려 버리고
    파괴될 것인가? 친애하는 심미아스, 그리고 케베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네. 오히려 육체를 떠날 때 순수하며, 일생 동안 자발적으로 육체와
    관계한 적이 없고 오히려 항상 이러한 관계를 피하고 자기 자신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육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영혼, 그리고 이런 한
    육체로부터 분리를 영구히 연습해 온 영혼-----다시 말하면 이 영혼은
    참된 철학도 이거니와 -----은 따라서 사실상 항상 죽음을 연습해 오지
    않았는가? 철학은 바로 죽음의 연습이 아니던가?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무형의 영혼은 무형의 세계, 곧 신적이며 불멸이고 이성적인
    세계로 떠나가고 이 세계에 닿으면 영혼은 더 없는 행복을 얻게 되어
    인간의 과오와 어리석음, 두려움과 거친 정열, 그리고 기타의 모든 인간의
    악으로부터 풀려나고 비의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원히 신과 함께 사는 거야. 그렇지 않은가, 케베스?
    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더렵혀진 영혼, 떠날 때에 순수하지 못한 영혼, 항상 육체의
    벗이고 노예이며, 육체와 육체의 욕망 및 쾌락을 사랑하고 매혹 당한
    영혼, 그래서 결국은 진리는 만지고 보고 맛보는 등 이러한 육욕에 이용할
    수 있는 육체적 형태로서만 존재한다고 믿게 된 영혼, 다시 말하면 육체의
    눈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고, 오직 철학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성적 원리를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피해 온 영혼----자네는 이러한
    영혼이 순수하고 깨끗하게 떠나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러한 영혼은 늘 육체와 관계하고 육체를 돌봄으로써 마침내 육체적인
    것이 그 본성에 섞이게 되어 육체적인 것에 속박 당하고 말 거야.
    물론 그렇겠지요.
    그리고 나의 친구여, 이 육체적인 요소는 무겁고 둔하며 세속적인
    것이고 영혼을 내려 눌러서 다시 가시적인 세계로 끌어내리는 시각적
    요소야. 이러한 영혼은 보이지 않는 세계, 곧 명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이 영혼은 무덤 가를 배회하게 되고, 따라서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무덤 근처에서는 영혼의 유령 같은 형상을 볼 수 있는데 이
    영혼은 떠날 때 순수하지 못했고, 오히려 시각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거야.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물론 그렇지, 케베스. 이러한 영혼은 좋은 영혼이 아니라 나쁜
    영혼임에 틀림이 없어 이러한 영혼은 기와의 악한 생활에 대한 벌을 받기
    위해 그런 곳을 배회하지 않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이 영혼으로부터
    절대로 떠나지 않는 육체적인 것을 갈망한 나머지 결국은 다른 육체에
    갇히게 될 때까지 이 영혼은 방황을 멈추지 않게 되네. 그리고 전생에서
    가졌던 것과 똑같은 성질을 가진 감옥을 다시 찾아낸다고 생각할 수 있네.

    어떤 성질이지요, 소크라테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음식을 탐내고 방탕하고 술을 좋아해서 이러한
    것을 피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귀나 그러한 종류의 짐승이
    된다는 것이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러한 의견은 매우 그럴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정이나 독재나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리나 독수리나
    솔개가 될 거야. 그 밖의 다른 것이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네, 그러한 성질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도 그 몇 가지
    성질이나 경향에 따라서 각기 알맞은 것을 할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거야.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좋은 곳으로 가는 사람들은 절제와 정의라고
    불리며, 철학이나 이성 없이도 습관에 위해 획득되는 국민의 사회적 덕을
    실천해 온 사람들이야.
    왜 그들이 가장 행복합니까?
    그들은 꿀벌이던가 장수말벌이나 개미처럼 그들 자신과 비슷한
    온화하고 사회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다시 사람의 형태를 갖고 태어날
    수도 있으며, 올바르고 절제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을 연구하지 않고 출발 시에 전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신과
    함께 있지 못하며 오직 애지자만이 신과 함께 있을 것을 허락 받네.
    그리고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것이 철학에 헌신한 사람들이 모든 육체적
    정욕을 삼가고 육체적 정욕을 극복하고, 육체적 정욕에 빠지지 않는
    이유일세.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처럼
    가난해지거나 가족을 파멸시키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냐.
    또한 권력과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나쁜 행위 때문에 불명예나
    악평을 얻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도 아니냐.
    소크라테스, 그것은 참된 철학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군요.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일일세. 그러므로
    육체를 돌보고 키우는 데만 골몰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돌보아 온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것과 작별을 하는 거야. 그들은 장님의
    뒤를 따라가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철학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돌아서서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무슨 뜻입니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지.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혼은 육체에 속박되고 갇혀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철학이 그의 영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의 영혼은 자기
    자신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옥의 창살을 통해서만
    진정한 존재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네. 영혼은 온갖 무지의 수령
    속에서 허덕이고 육욕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속박하는 공범자가 되고
    있었던 거야. 이것이 영혼의 본래의 상태였네. 그렇지만 내가 이미 말한
    바 있고 또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철학은
    영혼이 영혼 스스로를 가두어 두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보고
    영혼을 받아들여 점잖게 달래고, 눈과 귀와 기타의 감각은 기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해 줌으로써, 또한 이러한 감각들로부터 물러나고 꼭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이러한 감각의 사용을 삼가며 영혼을 집중시키고
    가다듬도록 설득함으로써, 영혼 자신과 순수한 존재에 대한 영혼 자신의
    순수한 파악을 신뢰하고 다른 동료를 통해서 영혼에 이르고 변화하기
    마련인 것은 무엇이든 믿지 말도록 권함으로써 철학은 영혼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하게 되네.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이지만 영혼이 스스로의 본성을 통해 보는 것은 예지적인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참된 철학자의 영혼은 이러한 해방에
    거슬려서는 안 되며 따라서 가능한 한, 쾌락과 욕망과 고통과 두려움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인간이 큰 기쁨이나 슬픔이나 두려움이나
    욕망을 가질 때, 이러한 것들로부터 해를 입는데, 그것은 예상할 수 있는
    해악-----예컨대 육욕 때문에 희생된 건강이나 재산의 상실 따위-----일
    뿐 아니라, 훨씬 더 큰 해악, 가장 크고 가장 나쁜 해악이며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해악이야.
    소크라테스,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쾌락이나 고통의 감정이 가장 강렬할 때, 어느 누구의 영혼이나 이
    강렬한 감정의 대상을 가장 명백하고 가장 참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그 해악이야.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이러한 대상들은 가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그렇군요.
    그리고 영혼이 육체에 의해 가장 심하게 구속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닌가?
    어째서 그렇지요?
    왜냐하면 모든 쾌락과 고통은 영혼이 육체와 비슷해질 때까지, 그리고
    영혼이 육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옳다고 믿을 때까지, 영혼을 육체에
    못박고 속박해 두는 일종의 못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육체와 뜻을 같이
    하고 동일한 기쁨을 즐김으로써 영혼은 육체와 똑같은 습관과 기호를 갖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영혼이 명부로 떠날 때 순수할 수는 없는 일이니
    언제나 육체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이 영혼은 다른
    육체 속에 가라앉아 거기서 싹이 트고 성장하며, 따라서 신적이며
    순수하고 단수한 것과는 사귀지를 못하는 거야.
    어째서 그렇지요?
    왜냐하면 모든 쾌락과 고통은 영혼이 육체와 비슷해질 때까지, 그리고
    영혼이 육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옳다고 믿을 때까지, 영혼을 육체에
    못박고 속박해 두는 일종의 못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육체와 뜻을 같이
    하고 동일한 기쁨을 즐김으로써 영혼은 육체와 똑같은 습관과 기호를 갖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영혼이 명부로 떠날 때 순수할 수는 없는 일이니
    언제나 육체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이 영혼은 다른
    육체 속에 가라앉아 거기서 싹이 트고 성장하며, 따라서 신적이며
    순수하고 단순한 것과는 사귀지를 못하는 거야.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정말로 옳은 말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케베스, 이것이 참된 애지자가 절제 있고 용감한 까닭이야.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냐.
    확실히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아! 철학자의 영혼은 다른 방식으로 추리할 거야.
    영혼은 해방되어서 영혼의 페네로페의 천(페네로페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호머의 오디세이아 에 의하면 원정 후에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이타카에서 기다리고 있던 페네로페는 구혼자들의 성급한 구혼을 피하기
    위해 한 폭의 천을 다 짤 때까지 남편이 들어오지 않으면 구혼에
    응하겠다고 핑계를 대고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낮에는 짜고 밤에는 푸는
    일을 되풀이했다고 한다)을 푸는 것이 아니라 다시 풀기 위해 철학에
    영혼의 해방을 요청하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철학자의 영혼은 격정을
    가라앉히고 이성에 따르며 참되고 신적인 것----이것은 억견의 대상이
    아니네-----을 바라보고 여기서 영양을 취하면서 영혼의 관조 안에서만 살
    거야. 따라서 이 영혼은 주어진 시간을 다 살려고 노력하고 죽은
    다음에는 자기와 동질적인 것, 곧 자기와 비슷한 것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인간의 악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게 되네.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와
    같이 양육되고 이러한 추구를 해 온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 바람에 날려
    흩어져 버려서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게.
    소크라테스가 말을 마치고 나서 상당한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우리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말해 온 것에
    대해 숙고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케베스와 심미아스만이 서로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그들이 지금까지의 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부족한
    점이나 없는가를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히 따지는 사람이 이 문제를
    따져 보면, 아직도 의심스러운 점, 공격할 점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세.
    자네들이 다른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지만 만일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정확하게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하게. 자네들에게 더 좋은 이론이 있다면
    이를 듣기로 하세. 만일 내가 소용이 된다면 나는 즐겨 도움이 되겠네.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아까부터 우리들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일어나서 대답을 듣고 싶은
    점을 질문하라고 서로 권하고 또 재촉하고 있던 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조르는 것은 귀찮은 일이 아닐까 해서 묻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습니다. 오, 심미아스, 무슨 말을
    하나? 말일 내가 지금 내 생애 중의 어느 때보다도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자네들에게까지도 설득할 수 없다면 내가 현재의 상태를 불운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믿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자네들은
    내가 백조보다도 못한 예언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백조들은 일생 동안 노래하며 지내지만 죽을 때가 왔다는 것을
    알면 그들이 주인인 신에게로 바야흐로 돌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즐거워서 어느 때보다도 더 즐겁게 노래하기 때문이야.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떤 새는, 나이팅게일이나 제비나
    후투티까지도 춥거나 배고프거나 고통스러울 때에는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백조는 최후가 온 것을 슬퍼해서 운다고 헐뜯는
    주장을 하는 거야. 새들은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새들이 슬퍼서 운다고 생각하지 않아. 백조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백조는 아폴론 신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예언의 재능을 받았고 저 세상에
    있을 좋은 일들을 기대하고 있는 거야. 그러므로 백조들은 죽음의 날이
    오면 다른 때보다도 더 즐겁게 노래하고 기뻐하는 거야. 그리고 나도
    역시 아폴론 신에게 바쳐진 종이며 백조의 동료임을 믿고, 또한 나의
    주인으로부터 백조에 뒤지지 않는 예언의 재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백조와 마찬가지로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려고 하네.
    따라서 이것만이 자네들이 반대하는 점이라면 염려하지 말게. 그러나
    말하고 싶은 것,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11위원들이 허락하는 동안에
    말하게.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면 나는
    나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을 말하고, 케베스는 케베스대로 자기의
    의문점을 많기로 하죠.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확실성에 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오히려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감히 말하면 당신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기울이지 않아 거나 온갖 측면으로부터 이 문제들을 검토하기 전에
    지쳐 버리는 사람은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곧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거나 배우던가, 또는 이것이 불가능하면 인간이 생각해 낸
    이론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확실한 이론을 받아들여 이 이론을
    인생을 항해하는 뗏목으로 삼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를
    보다 확실하고 보다 안전하게 인도해 줄 신의 조언을 얻지 못하면 위험이
    없지도 않으리라는 점을 나도 인정합니다만 -----. 이제 당신이 요구한
    대로 거리낌없이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후에 왜 내가 그때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는 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이
    문제를 나 혼자 생각해 보아도 그렇고 케베스와 의견을 나누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소크라테스, 지금까지의 논의는 아무래도 불충분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나의 친구여, 자네가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지금까지의 논의가 불충분한지 알고 싶군.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렇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하모니와 수금에 동일한 이론을 적용한다면, 그는 하모니가
    잘 이루어진 수금의 경우엔 하모니는 눈에 보이지 않고 비물체적인 것이며
    완전하고 신적인 것인 반면, 수금과 그 줄은 물질이며 물체적인 것이고
    합성된 것이며 세속적인 것이고 소멸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수금을 부수거나 줄을 끊어서 잘라 버렸을
    때, 위에서 말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추리에 따라 하모니는 살아 있으며 소멸하지 않았다고 논할지도 모릅니다.
    소멸되어 버리는, 줄 없는 수금이나 끊어진 줄을 남아 있고, 하늘에
    속해서 불명 하는 것과 동일한 성질을 갖고 이러한 것에 속해 있는
    하아모니는 소멸되어 버리는 것보다 앞서서 사라져 버린다고 상상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할 겁니다. 하아모니는 아직도 어디엔가 있어야 한
    하고 나뭇조각이나 줄은 하모니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썩어
    버리겠지요. 소크라테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에 대한 개념이구나,
    하는 생각이 당신에게도 떨 올랐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곧 육체는 열기와
    냉기, 습기와 건조 등의 요소들이 수금의 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이러한
    것들이 합쳐진 것이라고 할 때 영혼은 하아모니, 다시 말하면 이러한
    요소들이 알맞은 균형을 갖고 혼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육체의 줄이 질병이나 기타의 상해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느슨해지거나 너무 팽팽해질 때, 비록 가장 신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음악이나 다른 예술 작품의 하아모니처럼, 물론 즉시 소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물질적 잔재는 썩어 없어지거나 태워 버릴 때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혼은 육체의 여러
    요소들의 하아모니이므로 이른바 죽음이 닥치면 제일 먼저 소멸한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소크라테스는 늘 그러하듯이 뚫어지게 우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띄우고
    말했습니다. 심미아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왜 자네들
    가운데서 나보다 더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지 않는가?
    나에 대한 그의 공격은 강력하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그러나 아마도
    그에게 대답하기 전에 좀더 생각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 케베스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군. 그리고 두 사람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리 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동의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입장을 주장해야 할거야. 다시 말을 이어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케베스, 자네를 괴롭히는 문제점이 무엇인가 말해
    주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말하기로 하지요. 지금까지의 논의는
    제자리에서 맴돌고, 아직도 앞서 말한 반대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게 나의
    느낌입니다. 육체의 형태 속에 들어오기 이전에 영혼이 존재했다는 점은
    매우 확실하며, 감이 말한다면 매우 충분히 증명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의 판단으로는 죽은 후의 영혼의 존재는 아직도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반대 의견은 심미아스의 반대
    의견과는 다릅니다. 나는 영혼이 육체보다 더 지속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모든 점에서 영혼은 육체를 훨씬
    능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는 나에게
    말하겠지요, 왜 당신은 믿지 못하느냐,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보다 약한
    것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도, 당신은 보다 지속적인 것이
    동일한 기간 역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느냐고-----. 그러면 심미아스와 마찬가지로 나도 반대 의견을
    비유로써 말하겠는데, 나의 반대 의견에 중요한 점이 있는지 고려해
    주십시오. 내가 인용하려고 하는 비유는 늙은 직조 공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직조 공은 죽었는데, 그가 죽은 다음에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그는
    죽지 않았어, 그는 틀림없이 살이 있어. 보라, 저기에 그가 손수 짜서
    입었던 상의가 완전하게 조금도 썩지 않고 남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서 그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더 오래 존속하는가, 또는
    존속한다는 대답을 얻으면 그는 보다 덜 지속적인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보다 지속적인 인간이 존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미아스, 자네의 논평을 구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잘못이야.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난센스를 말하는 데
    자 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야. 왜냐하면 사실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야. 앞에 말한 직조 공은 많은 상의를 지어서
    입었으므로 그가 지은 몇 개의 상의보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하겠지만
    마지막에 지은 옷만은 그 사람보다 더 오래 남아 있게 되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상의보다 더 하찮고 더 약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은
    아닐세. 그런데 육체와 영혼의 관계도 동일한 비유로써 말할 수 있을
    거야.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영혼은 존속하며, 육체는
    영혼에 비해 약하고 단명하다고 말해도 잘못은 아닐 걸세. 그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모든 영혼은, 특히 인간이 오랫동안 산다면 많은 육체를 닳아서
    못 입게 될 때까지 입는다고 논할 수 있을 거야.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육체는 소모되고 소멸되지만 영혼은 항상 다른 옷을 짜서 낡은
    것을 보충해야 한다는 걸세. 그러나 물론 영혼이 죽으면 영혼은
    마지막으로 짠 옷을 입고 있기 마련이고, 이 옷은 영혼보다 더 오래 남게
    되지. 그리고 영혼이 죽으면 결국 육체는 본래의 취약성을 드러내서
    재빨리 썩어서 없어지게 되네. 그러므로 나는 힘이 월등하다고 해서
    영혼이 죽은 다음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보는 이론을
    믿지 않네. 자네 이상으로 이 이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어떤 영혼은 여러 번 다시 태어나는
    것을 견디어 낼 만한 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단 하더라도,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영혼이 거듭해서 태어나는 일에 지쳐서
    결국은 거듭되는 죽음 중의 하나에 굴복하여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네. 그리고 이러한 죽음, 다시 말하면 영혼에 파멸을
    초래하는 육체의 붕괴는 아무도 알지 못하네. 우리는 누구든 이러한
    붕괴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야. 따라서 만일 이와 같다면 영혼이
    전적으로 불명이며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한, 죽음을
    맞이하여 태연한 사람은 오직 어리석은 자부심을 가진데 지나지 않네.
    그러나 영혼의 불멸을 증명할 수 없다면 바야흐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육체가 분해되었을 때, 영혼도 역시 완전히 소멸할 것을 두려워할 이유를
    항상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네.
    후에 서로 한 말입니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우리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확고하게 믿고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 지금까지의 이론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이론에 대해서도 혼란과 불신이야 야기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판단할 자격이 없거나 또는 믿음의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파이도, 저도 동감입니다. 맹세코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말하고 있는 동안에 나도 동일한 의문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론도 다시는 신뢰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제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지만 소크라테스의 이론 보다 더 옳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영혼은 하모니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항상 놀라운 매력을
    느끼고 있던 이론이며, 이 이론이 언급되었을 때 나는 즉시 나의 원래의
    신념으로 되돌아갔어요. 따라서 이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인간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 남는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다른 이론을
    찾아내야겠어요. 제발 소크라테스가 그 후 이 토론을 어떻게 끌고
    나갔는지 말해 주시오. 그도 당신이 말한 불쾌감에 사로잡힌 것
    같았습니까? 또는 냉정하게 공격에 대처했습니까? 그리고 그는 강력한
    답변을 했는지 또는 불충분한 답변을 했는지? 가능한 한 상세하게 그
    후의 일을 말해 주시오.
    파이돈 : 에케크라테스, 나는 자주 소크라테스에게 경탄했습니다만
    이때처럼 경탄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가 답변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우선 젊은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온화하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나를 놀라게 했고, 다음에는 지금까지의 논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이 상처를 쉽게 고쳐 준
    점이에요. 그는 마치 패캐해서 달아난 군대를 정돈시켜 그와 함께 논쟁의
    전선으로 되돌아가도록 명령하는 장군과 같았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어떻게 되었는데 그렇게 말합니까?
    파이돈 : 내 말을 들어보세요. 나는 마침 그의 오른쪽 가까운 곳에
    있는 걸상에 앉아 있었고, 그는 침상에 앉아 있었는데 침상은 상당히
    높았어요.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의 머리털을 목에 눌러
    붙였어요. 그는 나의 머리털을 갖고 장난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말했습니다. 파이돈, 내일이면 자네의 이 고운
    머리털을 자르겠지.(당시는 슬픔의 표시로 머리를 잘랐는데, 내일이면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이므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슬퍼하여 머리를 자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자네가 내 충고를 듣는다면 자르지 않아도 될 걸세.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말해 온 이론이 죽어 버리고
    우리가 다시 살려 내지 못한다면 내일 아니라 오늘, 자네와 나는 둘 다
    머리를 깎아야 할걸세. 그리고 만일 내가 자네라면, 또 이 이론이나를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면, 그리고 내가 심미아스와 케베스에 대해 나의
    논거를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아르골리스 사람들(아르골리스는
    펠로폰네소스 동쪽에 있으며 이 곳 사람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는
    습관이었으나 기원전 550년경 스파르타와 싸워 영토를 빼앗긴 다음에는
    영토를 회복할 때까지 남자는 모두 머리를 기르지 않고 여자는 황금의
    장식품을 쓰지 않기로 맹세했다. 페로도토스 역사 참조) 처럼 다시
    싸움을 벌려 내가 심미아스와 케베스를 패배시킬 때까지는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네.
    나는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조차도 두
    사람과 맞서서는 안된다고 말했는데요.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나를 부르게. 해가 질 때까지는
    내가 자네의 이올라오스(헤라클레스가 히드라<머리가 아홉 개인 뱀으로
    머리를 자르면 곧 다시 생긴다>와 큰 개와 고전하고 있을 때 그의 조카인
    이올라오스가 도와주어 이겼다고 한다. 앞의 해가 질 때까지 라는 말을
    희망이 있는 동안 이라는 뜻이다)가 되지.
    나는 대답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이올라오스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롤라오스가 헤라클레스를 부르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나 우선 위험을
    피하도록 조심하세.
    어떠한 성질의 위험입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이론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세, 인간에게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거야. 곧 세상에
    대한 무지야.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무경험에 오는 지나친 자신으로부터
    생기지. 자네가 어떤 사람을 믿고 그를 전적으로 진실하고 건전하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후에 그가 거짓투성이고 악한이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하세.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이렇게 여러 번 같은
    일을 겪으면 특히 가장 믿고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하던 사람들한테서
    당하고, 이 친구들과 자주 다툴 때, 그는 결국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인간 중에는 착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믿게 되네. 자네도
    이러한 성격상의 특색을 알고 있을 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은 부끄러운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다루는 데 있어서 인간성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만일 경험이 있다면 이 경우의 진실한 상태, 곧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중간에 속한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야.
    무슨 뜻입니까----- 라고 나는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아주 큰 것과 아주 작은 것에 대해서
    하는 말과 마찬가지야. 키가 아주 큰 사람이나 아주 작은 사람은 쉽게
    찾아볼 수 없네. 그리고 이것은 크고 작은 것, 빠르고 느린 것,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 검은 것과 흰 것 등, 모든 극단적인 것에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말이야. 자네가 인간이나 개나 그 밖의 다른 것을
    예로 듣더라도 극단적인 것은 드물고 그 중간이 많아. 자네도 이 점을
    모르지는 않을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만일 악이 경쟁을 벌인다면 가장 나쁜 것은
    극소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까?
    네, 그럴 것 같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확실히 그럴 거야. 이 점에서는 이론은
    사람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자네 말에 끌려서 내가 하고 싶은
    말과는 다른 말을 한 셈이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비교할 수
    있네. 대화 술에 대한 기술이 없는 단순한 사람이 어떤 이론이 옳다고
    믿었다가 후에 거짓이라고-----사실상 거짓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상관이
    없네-----생각하고 다음에도 여러 번 이러한 경우를 겪을 때, 그는 더
    이상 믿을 것이 없게 되고, 자네도 알다시피 논쟁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이야말로 인류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네. 그들만이 모든 이론이나 또는 사실상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건전하지 못하고 확실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에우리포스(에우리포스는 에우보이아 섬과 보이오티아 사이에 해협. 이
    해협에서는 하루에 일곱 번이나 조류의 방향이 바뀐다고 한다. 여기서는
    소피스트의 논법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의 조류처럼 끊임없는 성쇠에
    따라 위 아래로 흔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옳은 말입니다.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고 말고, 파이돈. 그런데 진리나
    확실성이나 지식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사람이 처음에는 옳다고
    여겨졌으나 후에는 거짓임이 밝혀진 어떤 이론에 부딪쳤다고 해서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지능의 결핍을 탓하지 않고, 괴로운 나머지 결국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론 전반에 책임을 돌리고 아주 좋아하며, 그 후에는
    영원히 이론을 미워하고 욕하고, 실재에 관한 진리의 지식을 상실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네, 그렇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선 우리의 영혼이 모든 이론에는
    건강도 건전성도 없다는 사상을 허용하거나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오히려 우리는 아직 우리들 자신의 건전성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정신의 건강을 획득하기 위해 남자답게 싸우고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걸세. 자네와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은 미래의 생활
    전체를 위해서, 나 자신은 죽음에 대비하여-----. 이 순간 나는 철학자의
    침착성을 갖지 못한 것 같아 하는 말일세. 오히려 일반 대중처럼 나는
    승리를 좋아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 승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논쟁을 할 때 문제가 정당한 것인가 하는 점은 개의하지 않고 오직 듣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주장을 확신시키고자 애를 쓰네. 그리고
    현재로서는 그와 나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네.
    곧 근 청중이 그의 말을 옳게 여기도록 애를 쓰는 데 반해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네. 나에게 있어서는 청중을
    설득한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아. 그러면 내가 이론을 통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기로 하세. 만일 내 말이 옳다면, 나는
    진리를 설득하여 좋은 일을 하는 셈이네.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 나는
    애통함으로써 친구들을 괴롭힐 생각은 없고, 또 나의 무지는 지속되지
    않고 나와 함께 죽을 것이므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거야.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것이 이 문제를 다루는 나의 심경이네. 그리고
    나는 자네들에게 진리만을 생각하고 소크라테스의 일은 생각하지 말하고
    요구하겠네. 내가 자네들에게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되면 나에게 동의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열정 때문에 자네들과 나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 벌처럼 나의 가시를 자네들에게 남기는
    일이 없도록 전력을 다 기울여 반대해 주게.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논의를 계속하기로 하세. 우선
    내가 자네들이 말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나 보기로 하세. 내 기억이
    옳다면, 심미아스는 비록 영혼이 육체보다 더 아름답고 더 신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조화의 형태로 있는 것이므로 제일 먼저 소멸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을 갖고 있네. 한편 케베스는 영혼이 육체보다 더
    지속적임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영혼이 여러 육체들을 입어서 낡게 만든
    다음에는 영혼 자신이 소멸하고 뒤에 마지막 육체만 남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은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했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죽음이며 육체 속에서는 항상 파괴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파괴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했네.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것이 우리들이 고찰해야 할 문제점들이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면 자네들은 앞서의 이론
    전체를 부인하는가, 또는 일부만을 부인하는가?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일부 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지식은 상기이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영혼은 육체에 갇히기 전에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나?
    케베스는 지금까지의 논의의 이 부분에서는 놀라운 감명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확신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심미아스도
    동의했고,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거의 없다고 믿는다고 덧붙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테바이에서 온 친구여, 자네가
    아직도 조화는 합성된 것이며, 영혼은 육체에 매어진 여러 줄로 이루어진
    조화라고 주장한다면, 자네는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자네는 조화는 조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앞서서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야.
    결코 용인할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자네가 한편으로는 영혼은 인간의 형태나 육체를 취하기 전에
    존재했다고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혼은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때, 바로 이러한 생각을 내포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는 깨닫지 못하고 있나? 조화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혼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야. 오히려 수금과 줄과 소리가 부조화의 상태로 먼저
    존재하고 그 후 마지막으로 조화가 생기는 거야. 그리고 조화가 제일
    먼저 소멸되네. 그런데 영혼을 조화로 보는 사상과 앞서 말하는 사상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일치할 수 없군요. 라고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조화를 주제로 하는 논의에도
    분명히 조화가 있어야겠네?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죠.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상기라고 하는 주장, 그리고
    영혼은 조화라고 하는 주장, 이 두 주장에는 조화가 없네. 자네는 어느
    쪽을 택하려는가?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두 주장 중 전자를 나는 훨씬
    더 굳게 믿습니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전자는 후자보다는 충분히
    논증되었고, 후자는 전혀 논증되지 않았으며 다만 개연적이고 그럴 듯한
    근거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믿어지는
    합니다만-----.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논의는 사기꾼이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러한 논의를 사용하는 경우, 기하학에 있어서
    난 다른 일에 있어서나 기만당하기 쉽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상기에 대한 이론에 내 입장에서 본다면 믿을 만한 근거
    위해서 증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증명은 영혼에는 존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본질이 속해 있기 때문에, 영혼은 육체에 들어오기 전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결론을 충분한 근거
    위해서 올바르게 받아들였으므로-----나는 이렇게 확신합니다-----나는
    영혼은 조화라고 하는 다른 결론을 논하거나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심미아스,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제기해
    보겠네. 조화나 그 밖의 다른 합성물이 그것을 구성한 요소들의 상태와
    다른 상태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또는 구성 요소들이 하는 일이나 당하는 일 이외의 일을 하거나 당할
    수는 없겠지?
    심미아스는 동의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정하게 말해서 조화는 조화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이끌지는 못하고 오직 추종할 뿐이야.
    심미아스는 찬성했습니다.
    왜냐하면 조화는 그것을 구성한 부분들에 반대되는 움직임이나 소리나,
    기타의 성질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야.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요.
    따라서 모든 조화의 본성으로 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내 말은 조화에는 정도의 차가 있다는 뜻이야. 곧 가능한 한도에 따라
    더 참되고 더 충분하게 조화될 때에는 더 좋은 조화, 더 완전에 가까운
    조화가 있게 되고, 덜 참되고 불충분하게 조화될 때에는 보다 못한 조화,
    보다 완전에 가깝지 못한 조화가 있게 되는 거야.
    그러나 영혼에도 정도의 차가 있는가? 어떤 영혼이 다른 영혼보다
    최소한 더 영혼답다든지, 덜 영혼답다든지, 또는 보다 완전에 가깝다든지,
    보다 완전에 가깝지 않다든지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두 가지 영혼이 있다. 곧 하나는 이성과 덕을 갖고
    있어서 선하고 또 하나는 우매하고 부도덕해서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옳은 말일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조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영혼 속에 덕과
    악이 있는 데 대해 어떻게 말할까? 그들은 여기에는 또 하나의 다른
    조화와 또 하나의 다른 부조화가 있으며 유덕한 영혼은 조화되어 있고, 그
    자체가 조화이면서도 그 안에 또 하나의 조화를 갖고 있고, 사악한 영혼은
    부조화이며 그 안에는 조화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답할 수 없군요. 그러나 영혼은
    조화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주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영혼에 대해서는 어떤 영혼을 다른 영혼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바 있네. 이와 마찬가지로 조화에
    대해서도 더 좋은 조화라든가, 덜 좋은 조화라든가, 또는 보다 완전에
    가깝지 못한 조화라는 가, 하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조화나 덜 좋은 조화가 없다는 것은 더 잘
    조화되었다던가 더 나쁘게 조화되었다던가 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조화도, 덜 좋은 조화도 없다는 것은 더 많은 조화나
    더 적은 조화를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오직 동등한 조화만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네, 동등한 조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영혼이 다른 영혼보다 절대적으로 더 영혼답다든지, 덜
    영혼답다든지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면 더 잘, 또는 더 나쁘게
    조화되었다는 일도 있을 수 없겠지?
    분명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부조화도 조화와 마찬가지로 더하고 덜한 점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조화나 부조화에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만일 악은 부조화이고
    덕은 조화라면, 어떤 영혼이 더 많은 악을 갖는다던가, 더 많은 덕을 갖는
    일도 없겠지?
    더 많이 갖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는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심미아스, 영혼이 조화라면 영혼은 결코
    악할 수는 없을 걸세. 왜냐하면 조화는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조화이므로
    부조화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영혼다운 영혼도 악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논해 온 것이 옳다면, 어떻게 영혼이 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영혼이 그 본성으로 보아 동등한 영혼이라면, 모든
    생물의 영혼은 한결같이 선하겠지?
    옳은 말입니다, 소크라테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이러한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영혼은 조화라고 하는 전제로부터 나온 귀결이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는데 인간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 중에서 영혼, 특히 현명한 영혼 이외에 다른 지배자가
    있는가? 자네는 영혼 이외의 것을 알고 있나?
    천만 에요,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의 정념에 따르는가? 또는 영혼은 육체의 정념과는
    다른 것인가? 예를 들면 육체가 덥고 목마를 경우, 영혼은 우리가 물을
    마시는 것을 막지 않는가? 또 육체가 배고플 때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을 영혼이 육체에 반대하는 수많은 예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영혼은 조화이기 때문에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줄들의 긴장, 이완, 진동 및 기타의 상태와 어긋나는 선율을 낼 수는
    없다는 데 동의한 바 있네. 영혼은 오직 추종할 뿐 이 줄들을 주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영혼이 정반대의 일, 곧 영혼을 구성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요소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일생을 통해
    거의 언제나 이러한 요소들에 반대하고 강계하며, 때로는 의술이나 훈련에
    의해 난폭하게 고통을 주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다루기도 하네. 마치 아주
    다른 것을 대하듯이 때로는 욕망, 정욕, 공포를 위협하고 때로는
    훈계하기도 하네. 호머가 오디세이아 에서 오디세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처럼-----.

    그는 가슴을 치며 자기 마음을 꾸짖었다.
    참고 견디라, 나의 마음아, 훨씬 더 심한 일도 참고 견디어 오지
    않았는가!

    호머가 영혼은 육체의 정념에 의해 이끌릴 수 있는 조화라는 생각으로
    이러한 시를 썼다고 자네는 생각하는가? 오히려 영혼 자신은 육체의
    정념을 이끌고 지배하며, 어떠한 조화보다는 훨씬 더 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네, 소크라테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친구여, 우리가 영혼은 조화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네. 우리는 신성한 시인 호머의 말과 어긋나는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우리들 자신이 해 온 말과 어긋나는 말을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네.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테바이의 여신인 하르모니아(심미아스를
    말한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말하기로 하세. 여신은 자비롭게도
    우리들에게 졌으니까. 그러나 케베스, 여신의 남편인 카드모스(테바이의
    여신 하르모니아는 테바이의 건설 자인 카드모스의 아내이다. 심미아스는
    테바이 출신이므로, 조화라는 말과 동음인 하르모니아를 들어 심미아스의
    패배를 말하고 있다. 카드모스를 달랜다는 것은 케베스를 달래겠다는
    뜻이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달랠 수
    있을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카드모스를 달래는 방법을
    찾아내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르모니아에 대해서 내가 전혀 예기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논파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까요/ 심미아스가 그의
    문제점을 말했을 때, 나는 그에게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당신이 첫 번째 공격을 가하자, 그의 이론이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는 것이 보고 놀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카드모스라고 부른 다른 이론도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겠지요.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아, 나의 착한 친구여. 뽐내지
    말기로 하세. 어떤 마안이 우리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말들을
    전복시킬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이 일은 신에게 맡겨 놓는 게 좋을 거야.
    하여튼 나는 호머의 영웅들처럼 바짝 다가가서 자네가 말한 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겠네. 자네는 영혼이 소멸되지 않으며
    불멸임을 증명해 주기를 바라고 있고, 죽음을 맞이하여 태연한 철학자가
    자기는 다른 생활을 해 온 사람보다는 명부에서 더 잘 지내게 되리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영혼의 불명이 증명되지 않는 한 단지 헛되고 어리석은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영혼의 힘과 신성이 논증되고,
    영혼이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필연적인 귀결로서 영혼의 불명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영혼이
    불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 그리고 영혼이 인간의 형태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일종의 질병으로써 해체가 시작된 것이며 삶의 고난이
    끝나면 결국 이른바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는 말이지. 그리고 자네의 말에
    따르면, 영혼이 육체 속에 오직 한 번 들어왔느냐 또는 여러 번
    들어왔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두려움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이지. 영혼의 불멸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영혼의 불명을 설명할 수
    없다면 인간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케베스, 이것이, 또는 이와 비슷한 것이 자네의 의견이라고
    생각하네. 한 가지 문제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일부러 자네가
    한 말을 되풀이한 걸세. 보탠 것이나 뺄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현재로서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곧
    내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얼마 동안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말했습니다. 케베스, 자네는 생성과 소멸의 본성 전체와
    관련되는 엄청난 문제를 제기하고 있네. 자네가 원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나 자신의 경험을 말해 주겠네. 만일 내가 말하는 것 중에 자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이용하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생각을 몹시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말하기로 하지. 케베스, 내가
    젊었을 때, 자연의 탐구라고 불려지는 철학 분야를 알고자 하는 막대한
    욕망을 가졌었네. 사물의 원인과 사물이 존재하고 창조되고 파괴되는
    까닭을 아는 것은 고상한 일로 생각되었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항상 동요를 느꼈네. 곧 어떤 사람들(그리스 초기의
    자연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사고라스 등의 주장이다)이 말하는
    것처럼 동물의 발생은 온기와 냉기의 원칙에 따라 야기되는 부패의
    결과인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요소는 피인가, 공기인가, 또는 불인가?
    혹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라, 듣고 보고 냄새를 맡는 지각의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은 두뇌인가, 그리고 기억과 사료는 이러한 지각들로부터 생기고,
    학문은 기억과 사료가 고정될 때, 기억과 사료에 기초를 두는 것일까? 그
    후에 나는 이러한 것들의 소멸에 대해 검토하고 다음에는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검토하고 결국은 나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룰 능력이 전혀,
    그리고 절대적으로 없다는 결론-----이 점은 앞으로 자네가 만족할 만큼
    증명하겠네-----에 도달했네.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던 일들에 대해서도 눈이 어두워져서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나는
    이러한 분들에 심취했기 때문이었네. 나는 전에는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던 것조차도, 예컨대 인간의 성장은 먹고 마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조차도 잊어 버렸네. 음식의 소화에 의해 살이 불어나고 뼈가
    굵어지고 신체의 다른 부분에도 같은 성질의 요소가 증가되면 체중이 적은
    사람은 체중이 불어나고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커지기 때문일세. 이것은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었을까?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자, 그러면 다른 문제를 말하기로 하세. 한때 나는 <보다 큰 것>과
    <보다 작은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나는 키가 큰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만큼 크다고 생각했네. 또는 어떤 말은 다른 말보다 크다고
    생각했네. 그리고 더 나아가서 10은 8보다 둘이 많고, 11큐우빗(고대의
    길이의 단위,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약 18-21 인치)은
    둘은 하나의 배이기 때문에, 1큐우빗보다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네.
    그러면 이러한 것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고 케베스는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맹세코 하는 말이지만 이러한 것들의
    원인에 대해서 내가 안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네.
    왜냐하면 하나에 하나를 더할 때, 원래의 하나가 둘이 된다고 볼 수도
    없고 덧붙여진 두 단위가 더하기 때문에 둘이 된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네. 어떻게 해서 1이 다른 1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에는 2가 아니라
    1이었던 것이, 이제 합쳐졌을 때에는 단지 병치하던가, 두 개의 1을
    합치시키는 것으로 말미암아 2가 되는지를 나는 이해할 수 없네. 또한
    나는 어떻게 해서 하나를 쪼개면 둘이 되는 지도 이해할 수 없네.
    이때에는 다른 원인에 의해 동일한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네. 다시 말하면
    앞의 경우에는 1을 1에 더하거나 병치시키는 것이 2가 되는 원인이었는데
    이번 경우에는 하나를 다른 하나로부터 분리시키고 빼는 것이 그 원인이란
    말일세. 또한 이제는 나는 1이나 다른 어떤 것이 왜 생기고 소멸되고
    존재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되었고, 약간 혼란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어서 다른 방법을 채택할 수는 없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그의 말을 따르면-----아낙사고라스의
    책에서 읽었다고 하면서 정신이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며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네. 나는 이 사상에 기쁨을 느꼈네. 이
    사상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네. 그리고 정신이 질서를
    부여한다면, 정신은 만물에 최선의 방법으로 질서를 부여할 것이며 개개의
    특수한 것을 가장 좋은 자리에서 배치하리라고 나는 생각했네. 그리고
    어떤 것이 생성하고 소멸되고 존재하는 원인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사물이 존재하거나 행동하거나 외부의 영향을 받는 데
    있어서 최선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하고, 따라서 인간은 자기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최선의 것만을 고려하면 되며 다음에는 최악의 것도
    역시 알아야 하리라고 생각했네. 왜냐하면 동일한 학문이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을 파악하기 때문이네. 따라서 나는 아낙사고라스에게서 내가
    바라고 있던, 존재의 원인을 가르치는 스승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기뻐했네. 그리고 나는 그가 먼저 지구가 평면인지 원인지를 가르쳐 주고
    이것이 바로 최선의 것임을 보여 주리라고 생각했네. 그리고 만일 그가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면,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위치가
    최선의 것임을 설명해 줄 것이며, 나는 이러한 설명에 만족하고 다른
    종류의 원인을 찾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그리고 나는 다음에는
    그에게 해와 달과 별에 대해 물으면, 그는 해와 달과 별의 비교적인
    속도라든가, 회전이라든가, 여러 가지 능동적 또는 수동적 상태라든가,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모든 것이 최선의 것을 위해서는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주리라고 생각했네. 왜냐하면 그가 정신이 이러한 것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 이외에는
    이러한 것들이 지금과 같이 있는 것에 대해 다른 설명을 할 수는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네. 그리고 나는 그가 나에게 각각의
    것의 원인과 모든 것의 원인을 자세히 설명해 줄 때, 그는 각각의 것에
    대해 최선의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 최선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설명해 주리라고 생각했네.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더라도
    이러한 희망을 팔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책들을 보다 좋은
    것과 보다 나쁜 것을 알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열성을 기울여서
    읽었네.
    나는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가. 그런데 나는 얼마나 비참한
    실망을 맛보았던가! 그 책들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이 철학자가 정신이나
    기타의 다른 질서의 원리들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오히려 공기, 에테르,
    물, 기타의 기묘한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는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소크라테스의 행위의 원인은 정신이라고
    주장하지만, 나의 몇 가지 행위의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할 때에는,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내 육체가 뼈와 근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 있을 걸세.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거야. 뼈는 단단하고 뼈와 뼈를 갈라놓는 관절이 있으며, 근육은
    탄력성이 있는데, 이 근육이 뼈를 감싸고 있으며, 살과 피부도 근육과
    함께 뼈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근육이 수축 또는 이완으로 뼈가 관절이
    있는 곳에서 쳐들어지면, 나는 나의 수족을 구부릴 수 있으며, 그래서
    나는 비스듬한 자세로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할 거야.
    그리고 그는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할 거야. 곧 음성이나 공기나 청각을 그 원이라고 말하고 같은
    종류의 무수한 원인을 들 거야. 참된 원인을 말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참된 원인은 아테네 사람들이 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나도 여기에 남아 있어서 판결에
    복종하는 것이 더 좋고 더 올바르다고 생각한 데 있단 말이야. 나의
    근육이나 뼈는 벌써 오래 전에 메가라나 보이오티아로 달아나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개에 맹세코( 변명 주 참조)
    말하거니와 만일 뼈나 근육이 제나름대로 생각한 최선의 것에 따라
    움직였다면, 그리고 만일 내가 몰래 도망가지 않고 국가가 내린 처벌을
    받는 것이 보다 훌륭하고 보다 고상하다고 결단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뼈와
    근육은 메가라나 보이오티아로 달아났을 거야.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원인과 조건이 이상한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사실 뼈나
    근육이나 그 밖의 신체의 부분들이 없다면 나는 나의 목적을 실행할 수는
    없었을 걸세. 그러나 내가 뼈나 근육이나 신체의 기타의 부분을 가졌기
    때문에 나의 행동이 가능하고 이것이 정신이 작용하는 방식이며, 최선의
    것을 선택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매우 경솔하고
    게으른 말솜씨이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원인과 조건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아심을 갖게 되네. 많은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더듬고 다닐 때처럼 항상 원인과 조건을 혼동해서 잘못된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네. 따라서 어떤 사람(엠페클레스는 천재의 회전이 빨라서 지구가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을 가득 채운 그릇을 돌리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은 지구 둘레에는
    소용돌이가 치고 있어서 지구가 공중에 머물러 있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아낙시메네스, 아낙사고라스 등이 공기가 밑받침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은 일종의 넓은 반죽 그릇 같은 지구를 떠받치곤 있는 것은
    공기라고 설명하네. 하늘과 땅이 지금처럼 최선의 상태로 있도록 하늘과
    땅을 조정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전혀 떠오르지 않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신적인 힘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선보다 더
    강하고 더 영속적이며 더 포괄적인 다른 아틀라스(아틀라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으로써 반란에 가담한
    벌로 땅과 하늘이 갈라진 틈에서 서서 천체를 떠받들고 있다고 한다)를
    발견할 것을 기대하고 있네. 선의 필연적이며 포괄적인 하메 대해서는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네. 그러나 이것은 가르쳐 주는 사람만 있다면
    내가 배우고 싶어하는 원리이네. 그러나 최선의 것의 본성을 스스로
    찾아내는 데에도 실패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데에도
    실패했으므로, 자네가 좋아한다면 원인을 탐구하는 두 번째의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내가 알아낸 대로 자네에게 말해 주겠네.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참된 존재의 관조에
    실패했으므로 영혼의 눈을 상실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네.
    일식 중에 태양을 관찰하거나 주시하는 사람들이 물 또는 이와 비슷한
    매개체에 비친 그림자를 보도록 미리 조심하지 않으면 육체의 눈을 상하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나 자신의 경우에도 사물을 내 눈으로
    바라보거나 또는 감각의 도움을 받아서 파악하려고 한다면, 나의 영혼이
    아주 장님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정신의 세계에 의지하여 거기에서 존재의 진리를 찾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네. 나는 이 비유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왜냐하면 나는
    사유를 매개로 해서 존재를 고찰하는 사람이 행동과 일을 통해 존재를
    고찰하는 사람 이상으로 <그림자를 통해서 희미하게> 본다고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야. 오히려 이것이 내가 채택한 방법이었네. 나는 우선 가장
    강력하다고 판단되는 원칙을 설정하고 다음에는 원인에 관련된 것이든, 그
    밖의 것에 관련된 것이든, 이 원칙과 일치하는 것은 참이라고 확신했네.
    그러나 자네가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내가 한 말을
    좀더 분명히 설명하겠네.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확실하게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자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에는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네. 오히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나 기타의
    다른 토론에서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되풀이해 오던 말일세. 나는
    원인의 본성에 대해 나의 사상을 사로잡고 있던 것을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네. 나는 뭇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잘 알려져 있는 말들로
    되돌아가서 우선 아름다움 자체, 선 자체, 크기 자체가 있다고
    가정해야겠네. 나에게 이와 같은 가정을 세우도록 허용한다면, 나는
    자네에게 원인의 본성을 보여 주고 영혼의 불명성을 증명해 줄 수 있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와 같이 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당장
    그 증명을 해 주십시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 그러면 자네가 다음 단계에서 나에게
    동의하려는지 그것을 알아보고 싶군. 아름다움 자체 이외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를 분유하고 있는 한에서만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야.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원인에 대한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나?
    네, 동의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주장되어 온 여러
    가지 현명한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네.
    나에게 화사한 빛깔, 또는 형태, 또는 이 밖의 어떤 것을 아름다움의
    원천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이러한 모든 것은 오직 나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니까----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아름다움 자체에 참여하고 분유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아름다워질 수 없다는 것을 단순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아마도 어리석게도
    주장하고 마음속에 새기어 주겠네. 그 방법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아름다움 자체에 의해서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만은 강력히 주장하기 때문이네. 나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내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대답인
    것 같네. 나는 설득에 있어서 이 원리는 결코 전복되지 않으며 나
    자신이나 이 문제를 묻는 다른 사람에게나 아름다움 자체에 의해서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을
    고수하고 있네. 자네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가?
    동의합니다.
    또한 크기 자체에 의해서는 큰 것은 크게 되고 또 점점 커지며 작은 것
    자체에 의해서 보다 작은 것이 더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1은 2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크며 2는 1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작다고 말하더라도, 자네는 이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보다 큰 것은 크기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크기 자체로 말미암아
    보다 크며, 보다 작은 것은 작은 것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작은 것
    자체로 말미암아 보다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고하게 주장할 걸세.
    따라서 자네는 보다 큰 것은 머리를 척도로 하여 보다 커지고, 보다 작은
    것은 머리를 척도로 하여 보다 작아진다고 말하는 위험을 피하게 될 걸세.
    자네는 이러한 추리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안 그런가?
    케베스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네는 10은 2에 의해서, 그리고 2로 말미암아 8을
    초과한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오히려 수에 의해서, 그리고 수로
    말미암아 그러하다고 말할 테지? 또 한 2큐우빗이 1큐우빗보다 큰 것은
    절반만큼 크기 때문이 아니라 길이 자체 때문이라고 말할 테지? 이러한
    모든 경우에는 잘못에 빠질 동일한 우려가 있어서 하는 말일세.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또한 하나에 하나를 더하거나 하나를 쪼개는 것이 둘이 되는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네는 적절한
    본질을 분유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게 될 방법이 없으며
    따라서 자네가 아는 한, 둘의 원인은 오직 2자체뿐이며, 1자체를 분류하는
    것이 하나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소리 높이 단언할 걸세. 자네는 다음과
    같이 말할 거야. 나누기나 더하기 따위 수수께기에는 상관하지 않을
    테야. 나보다 머리가 좋아 사람이 이러한 문제에 대답하는 게 좋아.
    속담에 있는 말과 같이 내가 경험이 부족하고.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도
    놀라기를 잘하지만 나는 원리의 확실한 근거를 포기할 수는 없으라고.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원리 때문에 자네를 공격하면 자네는 전혀
    개념 하지 않거나 또는 그러한 공격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결론이 서로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를 알아본 다음에 공격하는 사람에게
    대답하면 되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원리를 설명해 달라는 요구를
    받으면 자네는 보다 높은 원리를 차례로 설정하다가 결국은 보다 높은
    원리 중 최선의 것에서 휴식처를 찾아내면 되네. 그러나 자네는 논
    객들(소피스트를 말한다)처럼 자네의 추리의 원리와 귀결을 혼동하지는
    말게. 적어도 자네가 진정한 존재를 발견하기를 바란다면-----. 이런
    문제는 전혀 돌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논객들에게는 이러한 혼동은
    중요하지 않아. 그들은 그들의 사상이 아무리 큰 혼란에 빠지더라도,
    그들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재치만은 갖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자네가
    철학자라면, 자네는 반드시 내 말을 따라야 할걸세.
    당신의 말은 아주 옳은 말입니다. 라고 심미아스와 케베스가 동시에
    말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렇군요, 파이돈. 나는 심미아스와 케베스가 동의한
    것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크라테스의 이론이 얼마나 명석한가에 놀라게 될 거예요.
    파이돈 : 물론입니다, 에케크라테스. 그리고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지금 당신이
    전하는 말을 듣고 있는 우리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떠한 말을 했습니까?
    파이돈 : 이러한 모든 이론에 찬동하고, 따라서 이데아가 존재하며 다른
    사물은 이테아를 분유하고 그 이름을 이테아로부터 얻는다는 데 동의한
    다음에는 내 기억이 옳다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네가 위에서 말한 이론에 찬성한다면 자네가, 심미아스는
    소크라테스보다는 크고 파이돈보다는 작다고 말할 때, 자네는
    심미아스에게는 크기와 작음이 다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네는 아직도 크다는 말이 가진 뜻 그대로 심미아스가
    심미아스이기 때문에 사실상 소크라테스보다 큰 것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크기로 말미암아 크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네. 심미아스는
    심미아스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보다 큰 것은 아닌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심미아스의 크기와 비교할 때 작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파이돈이 그 크기에 있어서 심미아스를 능가한다면, 이것은
    파이돈이 파이돈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으로는 파이돈은
    심미아스에 대해 크기를 갖고 있고 심미아스는 비교상 보다 작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심미아스는 크다고 할 수도 있고 작다고 할 수도 있네. 그는
    양자의 중간이어서 그의 크기는 한 사람의 작음을 능가하지만, 한편 또한
    사람의 크기는 그의 작음을 능가하기 때문이네.
    소크라테스는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는 마치 책을 쓰듯이
    말하고 있군. 그러나 나는 내가 하는 말이 옳다고 믿네.
    심미아스가 동의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갖기를 바라기 때문이네. 크기 자체는 크면서 동시에 작은
    것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들 속에 있는 크기(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테아를 알고 있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우리의 지식은
    단지 상기에 지나지 않음은 여기서도 이미 언급된 바 있다)나 구체적인
    크기도 작아진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한 능가되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이와 같이 되는 대신, 두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가 일어날
    거야. 곧 <보다 큰 것>은 그 반대 물인 <보다 작은 것> 앞에서
    달아나거나 비켜나거나 할 것이며, 또는 <보다 작은 것>이 접근함에 따라
    이미 사라져 버릴 거야. 그러나 작은 것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을 거야. 마치 내가
    심미아스와 비교할 때 작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제의
    나와 변함이 없는 채 여전히 키가 작은 사람인 것과 같다. 그리고 크기의
    이테아가 결코 작은 것일 수 없고 또 작은 것이 될 수도 없는 것처럼,
    우리들 속에 있는 작음도 큰 것이거나 큰 거시 될 수는 없네. 또한 다른
    반대 물들도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 그 반대 물이거나 그 반대물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이렇게 되는 경우에는 변화 가운데서 사라져
    버리거나 소멸하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내 생각과 꼭 같습니다.
    이때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인정했던 것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보다 큰 것으로부터
    보다 작은 생기고 보다 작은 것으로부터 보다 큰 것이 생기며 반대 물은
    오직 반대물로부터만 생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는 이 원칙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는 사람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듣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그 점을 상기시켜 주는 것을 보니 자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군. 그러나 자네는 두 경우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 그때는 구체적인 것에 있어서의 반대 물에 대해 말했고
    지금 본질적인 반대물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본질적인 반대물은 우리 속에 있어서나 본성에 있어서나 그 자체는
    변화할 수 없네. 나의 벗이여 그때는 반대물인 내재되어 있어서 반대물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것들에 대해 말했으나 지금은 그러한 것들에 내재되어
    있고 그러한 것들에 명칭을 부여하는 반대물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네.
    그리고 우리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이러한 본질적인 반대물이 상호간
    생성된다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을 거야. 말을 마치자 케베스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케베스, 자네도 이 친구의 반대물 듣고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나?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반대 때문에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 적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반대 물은 어떤
    경우에든 결코 그 자체와 반대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한 것이
    아닌가?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시 한 번 고찰해 보기로 하세.
    그래서 자네가 내 말에 동의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세. 자네가
    따뜻하다든지, 차다고 부르는 것이 있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불이나 눈과 같은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열은 불과 다른 것이며 냉기는 눈과 같지 않은 것이란 말이지?
    네.
    그러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눈이 열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에는,
    눈이나 열은 눈 또는 열로 그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고, 열이 접근할수록
    눈은 물러나거나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자네는 분명히 인정할 테지?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리고 열도 냉기가 접근함에 따라 물러나거나 사라져 버릴 거야.
    따라서 열이 냉기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에는 열과 눈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열과 눈으로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할 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이테아의 이름은 영원한 관련 밑에서
    이데아에만 해당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데아는 아니지만 형태 안에서만
    존재하는 다른 어떤 것에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네. 나는 예를 들어서 이
    점을 더 명백하게 설명하겠네. 홀수에는 항상 <홀>이라는 말이 붙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홀>이라는 말이 붙는 유일한 것인가? 자기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홀수 자체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홀수 자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홀>이라는 말이 붙는 다른 것도 있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일세. 3이라는 수는 홀수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많은 다른 예가 있네. 예를 들면 자네는
    3은 그 고유한 명칭으로 부를 수도 있지만 또한 3과는 동일하지 않은
    홀수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말은
    비단 3만이 아니라 그밖에 5와 기타의 수의 절반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것일세. 이 절반의 수는 각기 홀수 자체는 아니면서도 홀수일세. 또한
    같은 방식으로 2 와 4, 그 밖의 절반의 수는 짝수 자체는 아니면서도 모두
    짝수일세. 동의하는가?
    물론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간 밝히고자 하는 점에 주목해 주게. 곧 본질적인 반대
    물만이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도, 비록 그 자체가
    반대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반대물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서로 배척하네.
    이러한 것들은 자기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이데아와 반대되는 이데아가
    접근할 때에는 이러한 것들은 사라지거나 물러난다고 나는 말하고 싶네.
    예를 들기로 하세. 3이라는 수는 3이면서도 동시에 짝수가 된다면,
    그렇게 되자마자 소멸해 버리거나 또는 다른 변화를 겪게 될 것이 아닌가?

    정말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2는 분명히 3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
    그렇다면 반대되는 이데아들만이 서로의 접근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본성을 가진 것 중에도 반대 물의 접근을 배척하는 것이 있네.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성질을
    가진 것인지 규정을 내리도록 하세.
    좋습니다.
    케베스, 이러한 것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기 자신의
    형태만이 아니라 어떤 반대되는 것의 형태도 갖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방금 말한 바 있고 자네도 분명히 알고 있을 테지만, 3에
    포섭되는 것들은 수에 있어서 3일뿐 아니라 또한 홀수가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이네.
    물론 그렇습니다.
    3이 관여하는 이러한 홀수 자체에는 반대되는 이데아는 결코 침범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여는 홀수의 원리로 말미암아 가능하겠지?
    네.
    그리고 홀수와 짝수는 반대되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짝수의 이데아는 3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3은 짝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닌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면 세 개나 3이라는 수는 짝수가 아니지?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가 아까 반대되는 것은 아니면서도 반대 물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구별로 되돌아가세. 앞에서 든 예에서 본 바와 같이 3은
    짝수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면서도 짝수를 절대로 용인하지 않고 항상
    짝수는 반대쪽 이서 활동하도록 하네. 또는 2는 홀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은 냉기를 받아들이지 않네. 이러한 예들로부터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네.) 자네는 아마도 반대물만이 반대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대물 초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초래하는 깃의 반대,
    그것이 도달하는 바의 반대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여기서 나는 요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5의 배수인 10은 홀수의 성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걸세. 배수는 또 다른
    반대물을 갖고 있고 엄격하게 홀수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홀수를 배척하네. 또한 2분의 3, 또는 2분의 1이나
    3분의 1 등 분수는 전체와 반대되는 것이 아님에도 전체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동의하겠나?
    네, 전적으로 찬성하며, 이 점에서는 당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세. 그리고
    자네는 질문에 대답할 때 내가 질문에 쓴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게.
    나는 처음에 내가 말한 오래되고 안전한 대답을 다시 듣고 싶지는 않네.
    오히려 또 다른 안전한 대답, 곧 방금 말한 것으로부터 자네가 진리를
    찾아 낸 대답을 듣고 싶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자네에게 어떠한
    성질이 신체 내에 있기에 신체는 따뜻해지는가? 라고 묻는다면 자네는
    열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이것이 내가 안전하고 우둔한 답이라고 부른
    걸세), 불이라고 대답하게. 불이라는 대답은 우리가 내리고자 하는 훨씬
    탁월한 대답일세. 또는 어떤 사람이 자네에게 왜 신체는 병드는가?
    라고 묻는다면, 병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말고 열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하게. 그리고 홀수 자체가 홀수의 원인 라고 말하는 대신에, 단일이 그
    원인이라고 말하게.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더 이상 예를 들지 않더라도 자네는 충분히 이해했을 줄 믿네.
    네, 당신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말해 보게. 육체 속에 무엇이 있으면 육체는 살아 있는가?
    영혼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런가?
    네, 물론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영혼을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영혼은 그것에 생명을
    주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생명에 반대되는 것이 있는가?
    있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동의한 바와 같이 영혼은 그 자신이 초래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불가능하지요.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조금 전에 우리는 짝수를 배척하는
    원리를 무엇이라고 불렀던가?
    홀수.
    그러면 음악적인 것, 및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원리는 무엇인가?
    비음악적인 것 및 부정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원리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불사라고 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불멸인가?
    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증명되었다고 말해도 좋을까?
    네,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홀수 자체는 불명하는 것이라면, 30도 불명이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냉기가 불명이라면 열기의 원리가 눈을 공격해 올 때, 눈은
    고스란히 녹지 않은 채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 눈은 결코 소멸할 수는
    없고 또한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열을 받아들일 수도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또한 차지 않은 것, 곧 열기의 원리가 불멸이라면 불은 냉기의 공격을
    받을 때 소멸하거나 멎을 수는 없는 일이며 온전하게 물러나겠지?
    분명히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불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불사는 또한
    불멸이기도 하다면 영혼은 죽음의 공격을 받았을 때 소멸할 수는 없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논의로 보아 3이나 홀수가 짝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이나 불 속의 열기가 냉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는가? 라고 말할 거야. 그런데 이와 같이
    반대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홀수의 원리는 불명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네.
    이 점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러나 이 점에 합의를
    본다면 짝수가 접근하면 홀수의 원리와 3은 물러난다고 주장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걸세. 그리고 동일한 이론이 불, 열, 기타 모든
    것에 타당하게 될 거야.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불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불사는 또한
    불멸이기도 하다면 영혼은 불사일 뿐 아니라 불명일 거야.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영혼의 불명성에 대해서는 다른 증명이 필요할 걸세.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다른 증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하기
    때문에 죽지 않는 것이 소멸된다면 불멸하는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신과 생명의 본질적
    형태와 일반적으로 죽지 않는 것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데 모든
    사람이 동의할 거야.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나아가 내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들도 동의할 것입니다.
    따라서 불사는 불멸이라고 한다면 영혼이 죽지 않는 것인 한,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죽음이 인간을 공격할 때, 인간의 가시적인 부분은 죽는다고
    하겠지만 불사적인 부분은 죽음이 다가오면 물러나서 안전하고 건전하게
    보존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케베스, 영혼이 불사요 불멸이며, 우리의 영혼은 사실상 다른
    세계에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더 이상
    반대할 여지가 없습니다. 침묵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할 말이 있거나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토론을 다른 기회로 미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또한 지금까지의 논의에 대해 의심을 품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거대한 데 비해 인간은 무력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아직도
    마음속으로는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군요.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옳은 말이야, 심미아스. 좋은 말을
    했네. 그리고 최초의 원리들이 확실한 것처럼 생각되더라도 조심스럽게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을 덧붙여서 말하고 싶네. 그리고 최초의
    원리들이 만족스러울 만큼 확실할 때에는 인간의 이성이라면 어쩔 수 없는
    망설임이 섞인 확신을 갖고 논의의 과정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생각하네.
    그래서 그것이 분명하고 명확하다면, 더 이상의 추구는 필요하지 않을
    거야.
    사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오, 나의 벗들이여, 영혼이
    정말로 죽지 않는다면 생애라고 부르는 시기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 영혼을 알뜰하게 돌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영혼을 소홀히 다룸으로써 생기는 위험은 참으로 엄청날
    거야. 죽음이 모든 것의 종말이기만 하다면, 악인은 죽으면서 유리한
    흥정을 할거야. 악인은 행복한 마음으로 육체와 작별할 뿐 아니라, 그의
    영혼과 함께 그 자신의 죄악과도 영영 작별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영혼이 분명히 죽지 않는다면, 최고의 덕과 지혜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악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된다는 것은 불가능해. 왜냐하면 영혼은 병부로
    갈 때, 교양과 교육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떠나는 자가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교양과
    교육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거나 심한 해를 끼친다고 말하더군.
    세상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죽은 다음에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속해
    있던 각자의 수호신이 그를 죽은 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어떤 곳으로
    인도하고, 거기서 심판을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인도하는
    일을 맡은 안내자를 따라 명부로 간다는 거야. 그리고 거기서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을 당하며 지정된 시간만큼 머물러 있노라면, 시간의 많은
    주기( 공화국 에서는 이 주기를 1천년으로 잡고 있으며 파이도로스 에는
    이 주기를 열 번 되풀이한다고 되어 있다)가 지난 다음에 다른 안내자가
    그를 다시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온다는 거야. 그런데 아이스퀼로스가
    텔레포스(텔레포스는 소아시아의 고대 국가인 미시아의 왕. 희랍 신화에
    의하면 그는 아킬레우스의 창에 부상했으나 이 창에서 나온 녹물로 만든
    고약을 바르고 나았다고 한다. 이이스퀄로스가 켈레포스를 다룬 비극은
    실전 되었다)에서 말한 것처럼 저 세상으로 가는 길은 외길도 곧은길도
    아니냐. 만일 그렇다면 안내자는 필요하지 않은 걸세. 길을 잃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지상의 삼거리가 있는 곳에서 명부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공양을 보고 내가 추측한 바에 따르면, 이 길은
    갈림길로 많고 꼬불꼬불한 길일세. 현명하고 단정한 영혼은 곧은길을
    따라가며, 주의 환경도 알게 되네. 그러나 육체를 갈망하고 내가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생명 없는 육체와 가시적인 세계의 주위를
    오랫동안 떠돌던 영혼은 여러 번 반항을 하고 또 여러 번 고난을 겪은
    후에야 간신히, 그것도 수호신이 강제로 끌고 가게 되네. 그리고 다른
    영혼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에 이 영혼이 도착했을 때, 이 영혼이
    불순하며 불 의한 살인이나 이와 비슷한 죄, 또는 이러한 영혼들이 함직한
    범죄 행위 따위, 불순한 행동을 했다면, 모든 영혼은 이 영혼을 피해서
    달아나 버리네. 아무도 이 영혼과 동반하지 않고 아무도 안내해 주지
    않으며, 일정한 시간이 다 찰 때까지 홀로 이 영혼은 극단적인 불운
    가운데서 허덕여야 하며 기한이 다 차면 억지로 이 영혼에 합당한 곳에
    태어나게 되네. 한편 일생 동안 신들과 함께 있으면서 신의 지도를 받은
    순수하고 올바른 영혼도 적당한 집을 차지하게 되네.
    그런데 어떤 이름 없는 사람이 나에게 들려 준 말을 믿는다면, 지구에는
    이상한 곳이 많으며, 사실상 그 성질이나 그 크기에 있어서 지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일세.
    무슨 뜻이지요, 소크라테스? 라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나도
    지구에 대한 설명은 여러 번 들었으나 당신이 믿고 있는 이론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으며, 따라서 몹시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심미아스, 내가
    글라우코스(글라우코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발명가였던 것
    같다)의 재주를 가졌더라면 자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으련만-----.
    하기는 글라우코스의 재주라 하더라도 내 이야기의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나 자신은 그 진실성을 결코 입증할
    수 없네. 그리고 내가 입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심미아스, 설명이
    끝나기 전에 내 생애가 끝날 것이 두렵네. 그러나 내간 생각하는 대로
    지구의 형태와 여러 형태를 설명해 보겠네.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아. 나의 확신은 다음과 같네.
    지구는 하늘의 중심에 있는 둥근 천체이며 따라서 공기나 기타의 유사한
    힘이 지탱해 줄 필요는 없네. 오히려 주변의 하늘이 균등하고 지구
    자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지구는 그 자리를 지키고 떨어지거나
    어느 쪽으로 기우는 일이 없는 것일세.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동등하게
    퍼져 있는 것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이 없고, 항상 같은 상태에 있으며 빗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네. 이것이 내가 믿는 첫째 것일세.
    확실히 옳은 생각입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또한 지구는 매우 광대하고, 파시스 강(파시스 강은 혹해 동쪽의 리온
    강을 말한다)으로부터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은
    지브랄탈 해협 양쪽에 있는 칼레 산과 아빌라 산. 라시스 강으로부터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에 이르는 지역은 지중해 전역으로 당시의 그리스
    세계의 한계를 보여 준다) 에 이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마치
    개미나 개구리가 습지 주변에 살고 있는 것처럼, 오직 바다 주변의 작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으며 이와 비슷한 많은 장소에는 다른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나는 믿네. 지구의 표면에는 도처에 물과 안개와
    무거운 공기가 몰려드는 여러 가지 형태, 여러 가지 크기의 골짜기가 있기
    때문이네. 그러나 지구 자체는 순수한 하늘에 자리잡고 있네. 여기에는
    별들도 있네. 이 하늘은 우리가 혼이 에테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하늘
    가운데서 우리 지구는 침전물이 모여드는 밑에 있는 골짜기일세. 그러나
    이 골짜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구의 표면 위의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네. 이것은 마치 해저에 사는 생물이 자기는 물의 표면에 살고
    있고 바다는 그것을 통해 해와 기타의 별들을 보는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으며 허약하고 우둔한 탓으로 표면으로 떠올라 간 적이 한 번도
    없고, 대지가 그가 사는 세계보다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가를 물위로
    고개를 들어서 보았거나 심지어 보고 온 자에게 들은 적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처지네. 우리는 지구의 골짜기에
    살면서 표면에 살고 있는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는 공기를
    하늘이라고 부르고 이 하늘 속에서 별들이 움직인다고 상상하고 있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허약하고 우둔하기 때문에 공기 표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만일 어떤 사람이 외부의 한계에 도달하거나 새의
    날개를 달고 정상에까지 이른다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물고기처럼 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본성에 저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저 세상을 참된 하늘과 참된 빛과 참된
    땅이 있는 것임을 알게 될 거야. 대지와 돌,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지역은 마치 바다 속에서는 모든 것이 소금 때문에 썩는
    것처럼, 더럽혀지고 썩었기 때문이네. 그리고 바다 속에는 고상하고
    완전한 성장도 없고 오직 동굴과 모래와 무한한 진흙 밭이 있을 뿐이며
    해안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대지의 위와 하늘
    밑 사이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심미아스, 나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자네에게 들려 줄 수 있고 이것은 들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 이야길세.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나의 친구여,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네.
    첫째로 지구는 위에서 바라보면 여러 가지 빛깔을 칠한 열 두 조각의
    가죽으로 된 줄무늬가 있는 공처럼 보이네. 그리고 지구상에서 화가들이
    쓰고 있는 빛깔은 바로 그 견본이라고 할 수 있네. 그러나 저 위에 있는
    땅은 이러한 빛깔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그 빛깔은 이 세상의 빛깔보다
    훨씬 밝고 환하네. 거기에는 놀라운 자주색의 광택이 있고 찬란한
    황금빛이 있으며, 흰빛은 지구의 백악이나 눈보다도 더 희네. 그 땅은
    이런 빛깔과 다른 빛깔로 되어 있으며 그 빛깔들은 인간의 눈이 일찍이 본
    어느 빛깔보다도 그 수에 있어서 더 많고, 또 훨씬 아름답네. 공기와
    물로 가득 차 있는 이 골짜기(나는 이 골짜기에 대해 지금까지 말해
    왔네)는 독특한 빛깔을 갖고 있어서 여러 가지 빛깔들 속에서 번쩍거리는
    광선처럼 보이고 따라서 그 전체는 변화 가운데 통일 석이 깃들이어 있는
    단일하고 연속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지역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나무, 꽃, 과실 등-----도 역시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답네. 거기에는 언덕도 있고 이 언덕에는 돌들이 있는데 이
    돌들은 이 세상에서 진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에머랄드나 홍옥이나
    백옥이나, 기타의 보석보다 더 부드럽고 더 투명하며, 그 빛깔이 더
    아름답네. 이 세상에 있는 보석들은 저 세상에 있는 돌들의 조각에
    지나지 않아. 거기에 있는 돌들은 이 세상의 보석이나 다름이 없고 또 더
    아름답기 때문이야. 그 이유는 거기에 있는 돌들은 순수하고 이 세상의
    보석처럼 이 세상에 엉겨 붙는 썩은 염분에 의해 더럽혀지거나 썩지
    않은데 있네. 이 염분은 동물이나 식물과 마찬가지로 땅과 돌도 추하고
    병들게 만드는 것이데. 인 돌들은 저 세상의 보석이고 저 세상의 대지도
    금과 은 등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번쩍번쩍 빛나며, 이 보석들은 햇빛 속에
    드러나 있고 큼직하고 풍부하며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전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드네. 그리고 거기에는 동물과 인간도
    있는데 일부는 내륙에 살고 있고 일부는 우리가 바닷가에 살고 있듯이
    공기의 주변에서 살고 있네. 또 일부는 대륙 가까이 있어서 공기가 그
    둘레로 흐르고 있는 섬에 살고 있네. 요컨대, 마치 우리가 물과 바다를
    이용하는 것처럼 그들은 공기를 이용하며, 에테르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의 공기와 같네. 게다가 그 곳의 계절은 병을 일으키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살고, 공기가 물보다 더 순수하고 에테르가
    공기보다 더 순수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시각, 청각, 후각, 기타의
    감각은 훨씬 더 완전하네. 또한 거기에는 신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신전과 성지가 있어서 그들은 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신들의 대답을
    얻으며, 그들은 신을 알고 신들과 사귀고 있네. 그리고 그들은 해와 달과
    별의 참모습을 보며, 이 밖의 온갖 행복을 누리고 있네.
    이것이 대지 전체의 본성이며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본성일세.
    그리고 지구 표면에는 도처에 있는 골짜기에 따라 여러 지역이
    갈라지는데, 이 골짜기 중에는 우리가 사는 골짜기보다 더 깊고 더 넓은
    것도 있고, 더 깊기는 하지만 그 면적이 좁은 것도 있으며, 더 얕기는
    하지만 더 광활한 것도 있네. 모든 골짜기에는 그 밑으로 허다한 구멍이
    뚫려져 있고, 거기에는 지구의 내부로 이어지는 넓고 좁은 통로들이
    있으며 이 통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네. 이 통로로 마치 큰 대야에 물이
    넘나들 듯이 큰 물줄기가 흘러나오고, 흘러 들어가며 끊임없이 흐르는
    강들의 거대한 지하의 흐름이 있고, 뜨거운 물과 찬물이 솟아 나오며, 큰
    불과 불의 대하와 묽기도 하고 진하기도 한 흙탕물의 흐름(마치 시실리의
    흙탕물의 강과 그 뒤를 따르는 용암의 흐름과 같은)이 있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흘러가는 지역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네. 그리고
    지구의 내부에는 진동 또는 동요가 있어서 이러한 모든 것을 항상 위
    아래로 움직이게 하는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네. 지구의 모든 틈 중에서
    가장 넓게 갈라진 틈이 바로 지구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세.
    이것은 호머가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한 틈일세.

    멀리 멀리, 지하의 가장 깊은 심연이 있는 곳에.(호머 일리아드 )

    그리고 호머는 이것을 다른 곳에서 타르타로스(밑이 없는 나라. 최고의
    주권자에게 반항하거나 또는 그를 모욕한 자는 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라고 불렀고, 많은 다른 시인들도 이와 같이 불렀네. 그리고 이러한
    동요는 이 틈으로 흘러 들어가고 흘러나오는 강물 때문에 일어나며, 이
    강물들은 각기 그것이 흐르는 토지의 성질을 갖게 되네. 그리고 강물이
    늘 흘러 들어가고 흘러나오는 이유는 이 액체를 머물게 할 하상이나
    기반이 없어서 흔들리면서 위 아래로 물결치고 그 주변의 바람과 공기도
    마찬가지로 동요하기 때문일세. 바람과 공기도 물을 따라 위 아래로,
    여기저기로 땅 위를 떠돌아다니네. 마치 호흡을 할 때 공기가 항상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과 꼭 같네. 그리고 물을 따라 안팎으로
    동요하는 바람은 저항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네. 그리고
    물이 한꺼번에 이른바 지구의 낮은 부분으로 물러날 때, 물은 지구를 거쳐
    이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펌프로 물을 길어 올릴 때처럼 이 지역을 가득
    채우며, 또한 물이 이 지역을 떠나 이쪽으로 다시 쏟아져 들어올 때에는
    이 곳의 골짜기는 다시 채워지며 이 골짜기들이 채워지면, 지하의 통로를
    통해 각기 제길 을 따라 여러 곳으로 흘러가 바다와 호수와 강과 샘을
    이루게 되네. 그 후 물은 땅 밑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어떤 것은 많은
    지역을 오랜 시간에 걸쳐 감돌고, 어떤 것은 보다 적은 지역을 멀지 않은
    코스로 감도네. 그리고 다시 물은 타르타로스로 떨어지는데 어떤 것은
    지상에 솟아 나오기 이전에 위치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 또 어떤 것은
    그다지 낮지 않은 곳에서 떨어지지만 결국 모두 지상으로 솟아 나온
    위치보다는 어느 정도 낮은 위치일세. 그리고 그 중 일부는 다시
    반대쪽으로 터져 나오고 일부는 같은 쪽으로 터져 나오며 일부는 뱀이
    타래를 틀 듯이 지구를 한 바퀴, 또는 여러 바퀴 돌다가 가능한 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것도 있네. 그러나 결국은 언제나 갈라진 틈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서 그 틈 속으로 흘러가지 못하네.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이든 중앙까지만 흘러내릴 수 있고 더 앞으로는 흘러가지 못하네.
    강물 반대쪽에는 절벽이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이러한 강은 수다하고 강력하며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중요한
    것은 네 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긴 것을
    오케아노스(신화에 나오는 티탄의 하나. 세계의 큰 강, 대향을 신격화한
    것이다)라고 부르네, 오케아노스는 지구를 한바퀴 도네. 그리고 그
    반대쪽에 아케론(명부에 있는 강 중의 하나. 명부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서 모든 망령이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된다)이 흐르는데, 아케론은 땅
    밑으로 쓸쓸한 곳을 뚫고 아케루시아 호스에 다다르네. 사람인 죽으면
    대다수의 영혼은 이 호수 가로 가서 지정된 시간만큼-----어떤 영혼은
    오랫동안, 또 어떤 영혼은 잠시 동안-----기다리고 있다가 동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이 세상으로 보내지네. 셋째 강은 위에 말한 강 사이에서
    솟아 나오는데, 분출구 근처에 있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지중해보다도 더 큰 호수를 형성하네. 이 호수는 물과
    진흙으로 들끓고 있네. 여기서부터 탁류를 이루며 지구의 주위를 돌다가,
    다른 곳들을 거쳐서 아케루시아 호수의 맨 끝에 이르게 되지만 호수의
    물과는 섞이지 않고 지구의 둘레를 여러 차례 돌다가 타르타로스의 가장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네. 이것이 필리플레게톤(아케론 강의 지류로
    불타는 강 이라는 뜻이다)이라고 부르는 강으로서 지구의 다른 부분에서
    불을 분출시키는 것이네. 이 반대쪽으로부터 넷째 강이 흘러나와
    처음에는 유리처럼 검푸른 빛깔로 덮인 무섭고 황량한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네 스튀크스( 증오의 강 이라는 뜻) 호수가 형성되네. 호수로 흘러
    들어간 강물은 물 가운데서 이상한 힘을 얻고 필리플레게톤 강과 반대
    방향으로 땅 속을 돌다가 필리플레게톤 강과는 반대쪽으로 아케루시아
    호수 근처에 이르게 되네. 그리고 이 강물도 다른 강물과 섞이지 않고
    원을 그리며 흐르다가 필리플레게톤 강 맞은 쪽으로 타르타로스로
    떨어지네. 시인들은 이 강을 코키토스(죽은 자를 위해서 통곡하는
    통곡의 강 이다)라고 부르네.
    이것이 저 세상의 형편이네. 그리고 죽은 자가 각자의 수호신이
    따로따로 인도하는 곳에 다다르면, 우선 훌륭하고 경건하게 살았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에 따란 판결을 받게 되네. 그런데 착하게 산 것도,
    악하게 산 것도 아닌 사람들은 아케론 강으로 가서 준비되어 있는 배를
    타고 아케루시아 호수로 운반되어 거기에 살면서 악행을 씻어 내고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행한 죄악에 대한 처벌을 받고, 선행을 한 일이 있으면
    합당한 상을 받게 되네. 그러나 그들의 죄가 너무 커서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성물에 대해 빈번하고 무서운 모독을 가한 자,
    더럽고 무도한 살인자 등-----은 타르타로스로 던져지고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합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네. 또한 큰 죄를
    짓기는 했으나 구원받을 여지는 있는 사람들-----예컨대 순간적인 분노로
    말미암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행을 했으나 여생을 줄곤 후회하며 지낸
    사람들이나 이와 비슷한 처지에서 살인을 한 사람들-----은 타르타로스로
    던져져서 1년 동안 고통을 받지만 1년 뒤에는 물결이 그들을 밀어내 주네.
    단순한 살인자는 코키토스 쪽으로, 아버지나 어머니를 살해한 자는
    필리플레게톤 쪽으로 가네. 그리고 그들은 아케루시아 호수 가로 보내져,
    여기서 목청을 높여 그들이 죽였거나 악행을 가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가엾이 여기고 친절을 베풀어서 호수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애걸하게 되네. 그리고 만일 그들의 애원이 받아들여지면
    그들은 그 곳에서 나와 고통을 면하게 되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다시
    타르타로스로 보내져서 그들이 악행을 가한 사람의 자비를 얻을 때까지,
    다시 여러 강을 끊임없이 흘러 다니네. 이것이 그들의 재판관이 내린
    판결이기 때문이야. 뛰어나게 거룩한 생활을 한 사람들은 이 지상의
    감옥으로부터 풀려나 저 세상에 있는 순수한 집으로 가서 보다 순수한
    땅에서 살게 되네. 이 사람들 가운데서 철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정화한 사람들은 그 후로부터는 전혀 육체 없이 아주 아름다운
    집에서 살게 되네. 이 집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고 게다가 지금은
    설명할 시간도 없는 것 같네.
    그런데 심미아스,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인생에서 덕과 지혜를 얻기 위해 못 할 일이 없지 않은가? 보상은
    아름답고 희망은 크지 않은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앞에서 한 영혼과 그 집에 대한 설명이
    꼭 사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또한 나 자신도 확신하는 것은 아니네.
    그러나 영혼이 불사임이 증명된 이상, 그는 앞에서 말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험을 하더라도 타당하지 못하거나 가치 없는 일은 아니라고
    나는 말하겠네. 모험은 유쾌한 것인 만큼 그는 이러한 말로써 스스로를
    위안해야 할거야. 내가 길게 이야기한 까닭도 여기에 있네. 그러므로
    육체의 쾌락과 장식은 그에게는 이질적인 것이고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하여 이를 물리치고 지식의 쾌락을 추구해 온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혼에 갈채를 보내도 좋다고 나는 말하고 싶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자기 영혼을 이질적인 장식들이 아니라 영혼 자신의 보석, 곧
    절제와 정의와 용기와 숭고함과 진리로 단장해 온 것이네. 이러한 것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영혼은 때가 오면 서슴지 않고 명부로 가는 여행에
    나서게 되네. 심미아스와 케베스여, 자네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떠나야 하네. 비극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운명의 소리가 이미
    나를 부르고 있게. 곧 나는 독약을 마셔야 하네. 그래서 우선 나는
    여자들이 내가 죽은 다음에 내 시체를 씻느라고 고생하지 않도록 목욕을
    하는 것이 좋겠어. 소크라테스가 말을 마치자, 크리톤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 우리들에게 부탁할 말은 없나? 자녀에 대해서나
    우리들이 해 줄 수 있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든지-----.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크리톤, 특별히 부탁할 것은 없네. 오직
    한 가지, 내가 자네들에게 늘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돌보게. 이와
    같이 하겠다고 약속하든 않든 간에, 이것이 나와 나의 가족과 우리들
    모두에게 이바지하는 길일세. 그러나 자네들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자네들에게 권고한 길을 따라서 걸어가지 않으려고 한다면,
    지금 처음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아무리 많은 공언을 하고
    약속을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걸세.
    우리는 최선을 다 하겠네. 라고 크리톤은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네를 어떤 방식으로 묻어 줄까?
    자네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그러나 자네는 나를 꽈 잡고 내가
    달아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걸세. 이렇게 말하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을 돌아보며 웃음을 띄우고 덧붙였습니다. 나는 크리톤으로
    하여금 여기 있는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했고 토론을 주도해 온 동일한
    소크라테스임을 믿게 할 수가 없군. 그는 나를 어떻게 묻으면 되겠느냐고
    묻는 거야. 나는 독약을 마시고 자네를 곁을 떠나 축복 받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간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숱한 말을 했건만,
    이러한 말들이 크리톤에게는 소용이 없었던 것 같아. 이러한 말로
    자네들과 나 자신을 달래기는 했지만-----. 따라서 법정에서는
    재판관들에게 그가 나를 위해 보증인이 되어 주었거니와, 지금은
    자네들이나를 위해 그에 대한 보증인이 되어 주길 바라네. 그러나 이번의
    보증은 전번과는 다른 거야. 저번에는 그는 내가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것을 재판관에게 보증했지만 이번에는 자네들이 나는 머물러 있지 않고
    떠나 버린다는 것을 그에게 보증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야. 그래야만 나의
    죽음을 보아도 그는 덜 괴로워할 것이며, 내 시체가 화장되거나 매장되는
    것을 보더라도 슬퍼하지 않을 걸세. 나는 내가 무서운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가 슬퍼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또한 매장할 때에 소크라테스를
    입관시키자 든지, 무덤까지 소크라테스를 따라가자 든지, 소크라테스를
    묻자 고 말하는 것을 바라지 않네. 바른 말을 하지 않는 그 자체가 나쁠
    뿐이니라 영혼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네. 친애하는 크리톤,
    기운을 내게. 그리고 자네는 오직 내 육체를 묻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게. 그리고 관계에 따라 자네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묻어
    주게.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마치고 일어나 목욕을 하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크리톤은 그를 따라 들어가며 우리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대로 있으면서 지금까지 토론해 온 것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마치 우리들의 아버지와 같았는데 이제 우리는 그를 여의고
    여생을 고아처럼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가 목욕을 마치자, 그의
    자식들이 그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에게는 어린 아들 두 명과 장성한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부인들도 왔습니다. 그는
    크리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몇 가지 지시를
    했습니다. 그들을 보낸 다음에 그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가 방안에 있는 동안에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이제 해가
    질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그는 다시 우리들과
    함께 앉아 있었지만 말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곧 11집행 위원의
    하인인 간수가 들어와서 그의 옆에 서서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저는
    당신이 이 곳에 온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점잖으며 가장
    훌륭한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처럼 화를 내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여 독약을 마시라고 명령하면, 당신도 아시다시피 비난을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안녕히 가십시오.
    운명의 짐을 가볍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무슨 심부름을 왔는지
    아실 테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말을 마치고 간수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서 나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간수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자네도 잘 있게.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가겠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참 좋은 사람이야. 내가 감옥에 들어온 이후로 그는 늘 나를 찾아와서
    때때로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네. 그는 참으로 나에게 친절했어.
    그리고 보게, 지금도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크리톤, 우리는 그간 하라는 대론하지 않으면 안 되네. 자, 그럼 독약이
    준비되었거든 잔을 가져오라고 하게.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면
    담당자에게 준비 하라도 하게.
    크리톤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아직도 산마루에 있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약을 마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네. 약을 마시라는 통고를 받은 후에도 먹고 마시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즐기네. 서두르지 말게. 아직도 시간은 충분하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알았네, 크리톤. 자네가 지금 말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들은 지연시킴으로써 얻은
    것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나 나는 그들이 예를 따르지 않는 것이
    올바른 일일세. 나는 독약을 조금 늦게 마셨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네. 이미 죽은목숨을 조금 더 살려
    두고 아까워하면 내 눈에도 웃음거리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걸세. 제발 내
    말대로 하게. 내 말을 거부하지 말게.
    크리톤은 옆에 서 있는 하인에게 신호를 했습니다. 하인은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에 독배를 든 간수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나의 좋은 친구여, 자네는 이 일에 경험이 많을 테니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진 가르쳐 주게. 간수는 대답했습니다. 다리가 무거워질 때까지
    걷기만 하면 됩니다. 다리가 무거워지면 누우십시오. 독약이 효과를
    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잔을 소크라테스에게
    주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고 온화한 태도였고
    조금도 두려운 빛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안색이나 표정이 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간수를 바라보며
    잔을 들고 말했습니다. 이 잔에서 어떤 신에게 헌 주를 하면 안 될까요?
    됩니까, 안 됩니까? 간수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우리는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양만을 준비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알았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역행이 편안하도록 신에게
    기도는 드릴 수 있을 테고 또 기도를 드려야만 해. 이것을 기도 드리자.
    내 기도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나서 잔을 입술에 대고 그는 아주
    태연하고 유쾌하게 독약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우리들은
    대부분 슬픔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독약을 마시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또 독약을 다 마셔 버린 것을 보고 나서는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벗과 헤어지는 나 자신의 불운을
    생각하고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제일 먼저 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크리톤은 눈물을 억제할 수 없게 되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 후에 울음을 터뜨렸으니까요. 그런데 그 순간에 줄곧
    울고 있던 아폴로도로스가 큰 소리로 처절한 통곡을 하기 시작해서
    우리들은 모두 마음에 약해졌습니다. 소크라테스만이 침착하더군요. 이
    이상한 울음소리는 무언가? 내가 여자들을 내보낸 것은 주로 이와 같이
    부끄러운 행동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네. 나는 사람은 조용히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그러니 조용히 참게. 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서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걸어다니다가 다리의 힘이 없어지기 시작한다고 말하고는
    드러누웠습니다. 간수가 가르쳐 준대로 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독약을 준 간수는 가끔 그의 다리와 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간수는 그의 발을 세게 누르면서 감각이 있느냐고 소크라테스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없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리를 눌러보고
    차츰 위로 올라가면서 눌러보더니 간수는 몸이 차가워지고 굳어진다고
    시늉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자신도 이것을 느끼고
    말했습니다. 독이 심장에까지 미치면 마지막이네. 하반신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얼굴을 가린 것-----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울 들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 소크라테스가 닭 한 마리를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빚졌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헌납하라고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실재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순전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빚을 갚아 주겠나?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꼭 갚아 주겠네. 더 할 말이 없나? 라고
    크리톤이 말했습니다. 이 물음에는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1, 2분
    후에 몸이 약간 움직였습니다. 간수가 얼굴을 가린 것을 벗겨 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크리톤은 그의 눈을 감기고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이것이 우리의 벗의 최후였습니다. 이 벗에 대해서는
    나는 진심으로 당대의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소크라테스는
    가장 현명하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 설

    1. 독배의 음미

    희랍 연구가 알렉산더 엘리어트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으로부터 사형에
    이르는 과정을 극화한 재판 의 끝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소크라테스 : (벌떡 일어나 얼굴을 가렸던 것을 치우며)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꼭 갚아 주게.
    크리톤 : 꼭 갚겠네. 더 할 말이 없나.
    소크라테스(대답이 없다. 그는 마지막 1분, 또는 그 이상을 평화스러운
    잠으로 보내는 것 같다. 그러자 몹시 떨면서 숨을 헐떡이고 허공을
    움켜잡는다. 얼굴을 가린 것이 벗겨진다. 소크라테스의 응시하는 눈은
    굳어져 있었다. 그는 죽었다.)
    크리톤 : 자네는-----자네는 이제 이 세상에 없구나, 옛
    친구여.-----자네는-----우리를 위해 축배를 들었네.
    안티스테네스 :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 내가 아는
    한 세계에서 가장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 그는 죽었습니다.
    크테시포스 : 소크라테스가 죽다니? 말하자면-----그는 인류를 위해
    축배를 든 것입니다.
    에케크라테스 :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고 한
    그의 말은 무슨 뜻인가?
    크리톤 : 글세-----무슨 뜻이었을까?
    크리토불로스 : 아버지, 이제 가시지요. 아마 우리가 그 빚을 갚을 때,
    그 말의 뜻을 알게 되겠지요.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켜 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닭 한 마리 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소크라테스가 닭 한 마리를 빚졌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헌납하라고 했다는 설, 둘째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실재 인물이
    있었다는 설, 셋째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을 순전한 농담이었다는
    설이다.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켜 본 사람들이 닭 한 마리에서 찾고자 한
    의미는 첫째 해석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 또는 인류를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축배를 들었다고 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를 인류를 위한 축배로 보고 있다. 무엇을 위한 축배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인류의 쾌유를 위한 축배였을 것이다.
    아테네에는 병으로부터 회복된 사람은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임종의 자리에
    있었던 만큼 쾌유에 대한 감사로 닭을 바칠 입장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굳이 마지막 순간에 의신에게 닭 한 마리를 바칠 것을 유언으로 남긴
    사실에는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인 병을 고치려다가 독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든 인간의 병은 고쳐져야 하는 것, 언젠가 인류가
    모두 착하고 참된 마음으로 돌아가는 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나를
    대신해서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바쳐 다오. 하는 절실한 의미가
    깃들어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그가 마신 독배는 인류를 위한
    축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닭 한 마리의 뜻을 이렇게 풀이하면 닭 한 마리의 의미
    에서 우리는 지성인의 기본 자세 또는 역할에 대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지성인 이해야 할 일은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감사의 뜻으로 닭 한 마리를 바치는 것 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정신적 쾌유를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 지성인의 기본적인
    역할이다.
    인간 양심의 등에 가 되는 것이 지성인의 참된 자세임을 보여 준 것이
    소크라테스를 성인의 열에 오르게 한 으뜸가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자신을 소피스트와 구별하고 필로소포스, 곧 애지 자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리라. 그는 지식을 호구의 방편으로
    삼는 지식 장이 아니라 참된 슬기를 깨우치고 깨우쳐 주며 밝은 인류의
    양심을 바탕으로 인류를 행복으로 이끄는 실천적 지혜를 추구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변명 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명성을 얻은 것은 오직 나에겐 일종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그것은 일종의 인간적
    지혜입니다. 이러한 지혜라면 나는 실제로 갖고 있다고
    자신합니다.-----나의 지혜라는 것이 실제로 일종의 지혜인가, 또 어떠한
    지혜인가에 대해서 증인으로 나는 델포이의 신을
    세우겠습니다.-----카이레폰은 일찍이 델포이에 가서-----나 이상으로
    현명한 자가 있는 가라는 신탁을 구했습니다. 예언자는 나 이상의 현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나는 이 말을 듣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암시하는가?-----나는 오랫동안 신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생각한
    끝에-----현자라는 세평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신탁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고 싶었습니다.-----나는 정치가의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그와 대담하면서 과연 이 사람은 여러 사람들에게
    현자로 보이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나는 거기에서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이에 대해 나는 알지도
    못하거니와 알고 있다고 믿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무지의 자각 에 도달한 소크라테스는 시대의 지도자로서
    군림하여 자기의 주장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그의
    어머니의 직업에 따라 영혼의 산파 라고 자처하고 어디서든 사람들이
    참된 지혜를 얻는 일을 도왔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그
    불가류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신성하고 절대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겸손한 조수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지혜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
    분양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며, 아테네든
    또는 어떤 다른 나라든 행복을 얻고 발전을 하는 경우, 한 사람 또는
    일군의 지도자나 사이비 현자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또는
    대중 전체의 지혜의 집결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지혜를 인간 자신 속에서 구하면서, 아테네 최고의 현자인
    그가 할 일은 권력에 아부하여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거나, 신기한 지식을
    팔아 피부를 하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거리에 넘쳐흐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진정한 지혜를 길어 내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가 노예와도
    서슴지 않고 대화한 것은 인류 공통의 지혜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이
    얼마나 성실한 것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지성인이란 무엇인가? 고고한 자는 아니다. 전문 지식, 특수 기술,
    풍부한 정보를 갖고 이를 무조건 판매하는 자도 아니라.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착한 인간성을 자각하도록 도와주는 자, 따라서 인간에 대한
    충분한 존경심과 두려움을 갖고 올바른 역사의 방향을 가려내며 대중
    속에서 대중의 슬기를 깨우쳐 주는 조수, 그리하면 인간성에 깃들인 모든
    악을 제거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적 건강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자-----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지성인의 역할인 것이다.
    그래서 변명 에서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소크라테스여-----지혜의 애구를 그만두지
    않으면-----그때 너는 죽어야 한다 고 선언하더라도,-----나는 여러분을
    따르기보다는 신을 따를 것이다. 그리고 나의 호흡과 힘이 계속되는 한,
    지혜를 애구하고 여러분에게 충고하고-----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따르겠다고 한 신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다이몬의 금지하는 소리를 듣고 이 말에
    복종했다고 했으며, 이 다이몬의 소리는 끊임없이 그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일깨워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인간의 양심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본다면 소크라테스의 양심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원천이었다. 가혹한 자기 부정을 통해 새로운 자기를 세우려는
    부정의 정신은 소크라테스의 이성의 원천이었고 용기의 샘이었으며 정의와
    덕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의 정신이 인간의 가장 값진 정신이라는 사실에는
    고금을 통해 변함이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선량한 시민이었다. 아테네 시민 이상의
    존재도, 이하의 존재도 아니었다. 그가 하고자 한 일은 아테네 시민의
    양심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흔히 철학 또는 사상과 사회의 괴리를 말하면서 생활과 사상이 일체가
    되었던 시대가 그리스 시대였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전형을
    소크라테스에게서 보는 것이다.
    그는 결코 아테네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곧 그는 그가 사는
    시대와 사회에 가장 충실한 지성인이었다. 그가 구원하고자 한 것은
    아테네 시민이요, 아테네였다. 단지 그는 일시적인 기술적 처리로 잠시
    위기를 멈추게 하는 잔재주를 외면하고 아테네를 영원히 살리는 길,
    아테네가 인류의 영원한 이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희생하는 길을 모색했던
    것이며 그 길을 인간의 영혼의 정화, 곧 이성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발휘에서 구했던 것이다.
    진리의 소유가 아니라 진리의 발굴이 지성인이나 사상가, 더 나아가
    인간의 역할이 아닌가. 유일, 불변 절대의 진리를 인간이 소유할 수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의 진보를 바랄 필요도 없고 진보는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항상 새로이 발굴되는 것이며 진리 발굴의 광맥은
    바로 그 사상가가 태어난 시대요 사회다. 그 시대의 생활이나 그 시대의
    사회를 떠나서 생생한 진리가 탄생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사는 시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진리를
    발굴하려고 노력한 그 시대의 사상가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소크라테스의 위대성이 조금이라도 손상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의 위대성은 더욱 빛난다. 그는 공허한
    이론가가 아니라 철저한 실천가였기 때문이다. 그가 몸소 보여 준 실천이
    인류의 불명의 지혜로 숭앙되는 것은 인간이 자기가 사는 시대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있는가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멸망하여 역사책 갈피 속에 잠들었지만, 아테네
    인에게 독살된 소크라테스의 슬기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까닭은 그가
    공허한 능변가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가였다는 점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기에서 나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이나를 처형함으로써
    신이 여러분에게 준 선물에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생각건대 여러분이 만일 나를 사형에 처한다면 다시 나와 같은 인간을
    발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우습게 말하면
    신으로부터 이 도시에 주어진 자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비유컨대
    거대하곤 기품 있는 군마이나, 거대하기 때문에 운동이 둔해져서 이를
    각성시키는 등에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아테네를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절실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소명 의식이다. 자기가 사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투철하고 불굴 하는 사명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시대나 사회에 순응하는, 우둔한 시대의 노예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꾸
    우둔해 가는 거대한 군마처럼, 타락과 몰락이 현상을 보이는 아테네에
    각성의 새 바람을 일으키려는 한 마리의 외로운 등에 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신을 믿지 않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발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처럼 오직 이성에만
    충실하고 마치 걸어다니는 양심 처럼 비난이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시와 비를 가리며, 자유롭고 대담하게 자기의 소신을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 또한 가차없는 질문과 추구에 의해 인간을 음미하고 그
    사이비 지식을 적발하여 다른 사람의 자부심, 또는 허영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 한 마디로 철저한 비판자였던 사람은 귀찮은 존재로 혐오를 받고
    많은 적을 만들기 마련인 것이다. 지성인은 항상 그 시대에 대한 반항자
    라는 일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고귀한 존재라고 한다면, 지성인은 눈먼
    다수 자에 의해 적대시되는 악운을 감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테네 시민을 인간의 이성에 눈뜨게 하고 덕을 닦아 참된 행복을
    획득하도록 하는 것이 신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여기고 비판과 음미를
    멈추지 않은 소크라테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를 두려워하는 적들의 모진
    공격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세인의 주목을 받고 경계의 눈초리를 받게 된 것은 그를
    열렬히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 명문의 자제들인 데다가, 특히 수재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대중을 선동하여 권력을 추구하는 선동 정치로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탈바꿈한 시대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정치가와
    소피스트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었고,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탁을
    확인하기 위한 순방 과정에서 더 많은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새로운 교양을 구하는 청년들의 요구에 따라 등장한
    직업적 교사였다. 그들은 그리스의 주요 도시를 편력하며 강연을 하고
    또는 자연과 안간에 대한 신기한 지식을 가르쳤는데 그들이 특히 중요시한
    것은 수사 능변의 술 이었다. 대중 선둥이 권력에 접근하는 첩경이었던
    당시의 아테네에서는 능변은 정치가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확고한
    주장도 식견도 없는 대중을 움직이는 데는 능변 이상의 무기는 없었다.
    이러한 능변술 또는 수사학의 최고 목적은 무력한 이론을 유력한
    이론으로 만드는 것 (프로타고라스의 말)이었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곧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개개인이다. 따라서 사고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보편적인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주관주의,
    상대주의가 된다. 이와 같이 절대적 진리 내지는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갖지 못한 소피스트는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무이상,
    무정견을 가르쳤고, 따라서 수사학의 목표인 무력한 이론을 유력한
    이론으로 만드는 것 도 진리든 진리가 아니든 이를 개의치 않고, 오직
    교묘한 말솜씨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잔재주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트라시마코스의 방자한 정의의 규정, 곧 정의는 강자의 이익 이라는
    주장도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요컨대 소피스트들에게는 진리에 대한 신념도 진리 발굴의 용기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피스트가 환영받고, 또 이러한 소피스트마저 귀찮아서 추방해
    버린 중우정치의 고장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는 눈 안에 가시 와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건전하고 뿌리 깊은 사회가 아니면 정론은 항상 외롭고 적대 받기
    마련이다. 특히 끊임없는 선동 속에서 문자 그대로 나쁜 이론을 좋은
    이론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에서는 정론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지성인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에
    아부하거나 아니면 현실 도피의 안일한 길을 택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지성은 잠드는 것이 아니라 잠적해 버린다. 아무런 알리바이도
    없이-----.
    소크라테스의 비극은 안이한 지성인의 길 중 어느 것도 택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는 권력에 아부하지도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과감하게 현장에 뛰어들어 정면으로 그 시대, 그 사후의 병과
    싸운 것이다. 다만 그는 무기를 들고 권력을 탈취하거나 감언이설로
    기만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로써 싸운 것이다. 그는 잠든 아테네 시민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 다시 말하면 아테네 인의 자유 의식을 소생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지성인이 그 고유의 부정 정신과 여기에서 우려 나오는 자유 의식을
    버리지 않는 한, 그는 부정할 구체적 현실이 필요하고, 이 현장에서
    진리의 증인이 되는 길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 그는 오직 아테네 시민이었고, 또 정직한 아테네
    시민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은 세계 시민이 되었다는 패러독스를 남겼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셔야 했던 까닭은 그 시대인 들의 무지, 또는
    진리에 대한 외면에 있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일생 동안 한 번도
    그의 태도를 바꾼 적이 없었는데 왜 만년에 이르러서야 기소되었을까?
    그 이유는 아테네의 정치적 몰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르시아 전쟁에 대승한 아테네는 흥륭의 극에 달해 펠리클레스 시대는
    아테네의 황금 시대가 되었으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참패한 후에는
    하루아침에 그 위세가 꺾여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전 그리스
    지배의 야망이 좌절되고. 이어 30인 전제 자의 공포 정치에 시달리다가
    다시 민주정치로 돌아와서 오직 복고만을 꿈꾸고 새로운 진취성을
    무시했던 반동의 시대가 되었을 때, 많은 사이비 애국자, 특히 보수적인
    애국자들을 이러한 불행과 몰락의 원인을 새로운 사상, 특히 그
    무신앙에서 구했다. 그들은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가나 국민의 복지는 신들의 은총과 수호에 달려 있다고 민중은 믿고
    있었으므로, 그 동안의 불행이 신을 믿지 않음으로써 생긴 것이요, 신의
    노여움의 발로라고 하는 것은 가장 그럴 듯한 이유가 되었다.
    아낙사고라스나 대표적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조차도 무신앙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아테네로부터 도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수적인
    애국자들은 민중에 영합하는 일면도 무시하지 않으며 위험 사상 의
    박멸에 나섰다. 침묵이 호신 책인 무지와 선동의 와중에서 소크라테스는
    침묵의 미덕을 발휘하지 않고 오히려 비판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갈았다. 그 결과로 그는 무신론자, 청년을 타락시킨 자로서 고발된
    것이다.
    원래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믿고 신에게 공양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것은 미신적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 색채가 강렬한
    신앙이었다. 그는 전통적 신앙을 인정하면서도 그 비도덕적인 면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게다가 그는 다이몬의 계시를 받는다고 하였으므로
    그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신을 끌어들인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무신론자의 혐의를 받은 원인이었다.
    또한 그는 아테네의 일반적인 풍조는 도외시하고 정치 생활을 기피하고
    청년을 가르치는 데만 열중하였으므로 공민으로서의 의무를 게을리 하고
    유능한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거리낌없이 중우정치 내지는 독재정치로 흐르기 쉬운 민주정치의 약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오해와 증오는 장기간에 걸쳐 누적되어 오다가
    정치적 몰락의 한 징조로서 폭발된 것이다.
    요컨대 당시의 아테네에 있어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의 양심이 스스로 초래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죽음이 유일한 보상임을 알면서도 참된 지성인의 양심과
    사회 정의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인으로 살지 못하는 바에는 자유인으로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죄는 중대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가 법정에서 불손한 말을
    삼가고 연명을 애원했더라면, 그는 무죄나 가벼운 처벌을 선고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투표가 근소한 차이로 유죄를 결정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양심을 어기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사상을 법정에서
    토론하였다. 우리는 변명 에서 소크라테스의 자유인으로서의 늠름한
    면모에 접하고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끝까지 자유인으로 남기를 택했던
    그에게 사형은 당연한 결과였다.
    판결을 받고도 우연한 사정으로 소크라테스는 30일 동안을 옥중에서
    지냈다. 그 동안 크리톤을 비롯한 친구들의 주선으로 탈옥의 기회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아테네 시민과 신들에게 한 약속을 어기고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비록 악법이라 하더라도 국법에
    복종함으로써 떳떳한 죽음을 보여 주는 것이 그의 의무임을 강조하고
    탈옥을 권유하는 크리톤을 힐책한다. 대화편 크리톤 은 이와 같은 그의
    신념이 토로된 대화편이거니와 크리톤 에서 그의 성자다움은 역력히
    나타나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뿐 아니라 파이돈 에 토로된 영혼 불멸의
    신념과 엄숙한 임종은 우리들에게 인간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숙고하게
    만든다.
    자기의 신념을 위해 살던 소크라테스는 신념을 위해 죽은 것이다.
    어둠에 가려져 빛이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리는 어디까지나 진리라는
    신념은 그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정신적
    생활의 기본이었고 따라서 그는 진리에 대한 증언을 위해 죽음을 서슴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죽음은 그의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며 그의 사상의 정점이었다.
    그가 죽음을 피했더라면 그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현실감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정신의 위대성과 자유의 절대성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기회를 가졌던 행복한 지성인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죽음은 자유롭고 용감하고 성실한 인간의 최대한 영광은 진리를
    위한 죽음임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죽음에의 용기를 갖지
    못한 자는 역사와 인류에게 진리를 증언하고 참된 인간이 될 수 없음을
    역력히 보여 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자연 철학에서 인간학으로 전환시킨 최초의
    철학자라는 철학 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거니와,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폴리스적 인간이었다. 이러한 점에서는 소피스트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는 공통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폴리스적 인간의 문제를 각자의
    문제로서 주체적으로 다루고 또 이러한 문제를 개념적으로 규명하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독자성을 갖는다
    폴리스적 인간의 최대의 문제는 행복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성을 잘 가꾸어야 한다고
    했다. 예지인 이라는 인간관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그는 롤리스적
    인간의 본질을 이성에서 구했던 것이다.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특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덕의 기본 조건으로서 지
    를 말한다. 덕은 곧 지 라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덕을 닦기 위해서는
    먼저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고 하는
    행위는 비록 그것이 선한 행위라 하더라도 덕은 될 수 없고, 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안 다음에 이를 몸에 익힐 때 비로소 덕이 생긴다.
    그의 지덕 일치, 또는 지행일치의 사상의 근저에는 너 자신을 알라 는
    그의 중심 사상이 놓여 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자각 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무지의 자각 에서
    진지 에 도달하려 했고 진지에 의해 획득되는 덕을 실천하는 데서 인간의
    주체성을 살리려고 했다.
    인간을 자각시키는 방법이 영혼의 산파술이라고 일컬어지는 문답법
    이었다. 문답법은 일정한 기성의 지식을 분향하는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갖고 있는 편견과 오류를 비판하고 지적해 줌으로써
    스스로 자유로운 입장에서 이전에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자기 비판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진정한 이성에 눈뜨게 하여 자기 자신을 알게 하는 방법, 곧 눈먼 영혼의
    깊은 잠을 깨워서 진정한 자기와 진정한 자유를 자각시키는 방법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며, 이 문답법은 플라톤의 대화편 에 여실히
    재현되어 있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의 자율을 자각을 통해 실현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성에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고, 내면성을
    뿌리는 양심에 있다고 믿었다. 그가 중요한 일은 다이몬의 소리 에 따라
    결정했다고 한 것만 보아도 인간 내면의 소리, 곧 양심의 소리를 얼마나
    귀중히 여겼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이성과 양심의 도적과 철학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 보여 준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보상으로 준 시대는 결국 이성과 양심이
    없는 시대, 자유와 자각을 두려워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에는 이성의 살해, 양심의 살해, 자유의
    말살이라는 의미가 깃들이어 있다. 그런데 인간의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서 이성과 양심과 자유가 박탈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편견과
    불의와 자의와 방종이 날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의 신탁처럼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어떠한 박해, 어떠한 권력으로도
    인간의 양심과 이성과 자유는 살해되지 않는 것임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그의 독배는 불멸의 이성과 양심과 자유에 대한 축배가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변명을 이렇게 마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갈 때가 왔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아 남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중에서 누가 더 좋은 운명에 마주치는가 하는
    것은 신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떳떳한 자세이며 확고한 신념인가. 이성과 양심과 자유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지 않는 사림이라면 감히 무서워 입밖에도 내지
    못할 말을 하고 있다. 그의 이 말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자유는
    불명이며 결코 지상에서 제거되지 않은 것임을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과 양심과 자유가 살아 있는 한, 인간의 지성이 있고 지성인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소크라테스는 존재할 수
    있다. 그렇건만 지성인이 존재하는 사회에도 소크라테스는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주체적 신념과 용기의 결여가 그 이유인
    것이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재생은 오직 소크라테스적 자유인 기질로부터만 가능할 것이다.
    제일 처음에 닭 한 마리의 의미 를 생각했다.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인간의 병이 쾌유되는 날 바쳐 달라고 한 닭 한
    마리의 의미 를. 이 닭 한 마리를 갚을 책임을 크리톤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 그것은 온 인류가 소크라테스에게 진 빚이며 온 인류가
    모든 사람에게 진 빚이다. 그러나 이 빚을 갚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인간의 병이 쾌유되어야 한다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이 자유롭고
    순수하게 발휘되는 인류의 영원한 이상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빚을 갚을 날을 더
    지연시키고 있는 그러한 시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만일 빚을 갚을 날을 지연시키고 있다면 인간의 병이 더
    악화되고 있다는 징조이다. 그리고 양의가 없다는 증거다.
    이성과 양심과 자유를 병들게 한 원인을 가려내서 희생의 길을 열어 줄
    양의는 누구인가?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시대보다 더 우수한 지성인이
    양산되는 현대에 왜 양의가 없는가?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양의가 없는
    이유는 다 알고 있다. 곧 닭 한 마리에 빚 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갚겠다고 나설 용기와 신념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적
    인간에 자족하고 전자과학적 정밀성에만 만족하는 인간의 로봇화 현상,
    자유의 상품화 현상, 양심의 기능화 현상을 극복하는 소크라테스의 처방은
    한 마디로 끝날 것 같다.
    지성은 용기다.-----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의 의미가
    아닐까?

    2. 용기란 무엇인가?

    위험과 공포에 단호하게 직면하는 정신적 도덕적 힘이 용기다.
    그러므로 작든 크든 위기를 맞이하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용기이며 용기
    없이는 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물론 용기가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용기 없이는 위기에 당당하게 직면하고 대항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 용기라고 했고, 이 중용을 아는
    데는 사려라는 지적 덕이 요구된다고 했거니와, 진정한 용기는 우선
    이성적이기를 요구한다. 합리적인 정세 파악은 주체적 결단의 기반이
    되는 것이며 용기는 주체적 결단과 그 실천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다.
    주체적 결단은 용기의 원천이다. 여기서 결단은 행위에 있어서의 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최후의 결정을 말한다. 이러한 결단에는
    물론 사회적인 여러 조건 등, 객관적 조건이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근원적으로는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한 주체적 선택인 것이다. 가장 참되고
    훌륭한 자기를 선택하고 그러한 자기를 통해 가장 참되고 훌륭한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결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결단을 원천으로
    하는 용기는 생명의 물리적 힘 그 자체 일 수도 없고 단순한 반항의 힘도
    아니다.
    현존 재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 따라서 자유로운
    결단을 위해서는 죽음도 각오한다는 것, 여기에 진정한 용기가 성립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용기에는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
    위대한 용기를 실증한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를 드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는 신이 아테네로 보낸 아테네의등에이며
    걸어다니는 아테네의 양심 이었다. 그가 변명 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거대하고 기품 있는 군마와 같으나 거대하기 때문에 운동이 둔해서 이를
    각성시키는 등에가 필요하고, 그 등에가 바로 자기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소명 의식이었다.
    그의 선택은 타락과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아테네를 세계의 중심 으로
    재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아테네의 지배적인
    풍조에 비판적이었다. 아테네를 구제해야 한다는 그의 사명감은 허위에
    대한 비판과 부정으로부터 출발된 것이었고,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참된
    용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는 신랄한 비판자였다. 그는 아테네의 썩은 현실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대가는 청년을 타락시키고
    풀리스의 제신을 모독했다는 죄명 아래서 사형을 받는 것이었다.
    그의 용기는 재판 후 그가 태연히 독배를 마신 데에 집약되어 있다.
    독배를 마시는 과정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용기의 두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독배를 마시게 된 원인은 그의 현실 부정에 있었다.
    아테네의 윤리적 재건을 염원하는 소크라테스로서는 목전의 부패한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러한 부정을
    통해서만 아테네 시민을 이성과 진리를 눈뜨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보여 준 그의 용기는 현실을 부정하는 용기 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옥중에서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할 때, 그는 설령 악법이라
    하더라도 국법에 복종하는 것이 자기의 약속을 지키는 길이라고 하면서
    탈옥 권유를 물리친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봉착한 문제 상황을
    보게 된다.
    그는 법정에서의 변명을 통해 그에 대한 재판이나 판결이 부당한 것임을
    명백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죄가 인정되고 사형 언도를
    받음으로써, 사실상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부정하려던 현실에 의해 좌절을
    당하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재판 과정에서 신념과
    용기를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그는 부당한 법과 재판관에 의해 부당한 재판을 받은
    만큼 탈옥에는 일종의 정당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의 탈옥은
    그의 철저한 부정 정신으로 보아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탈옥을 거부한 것은 그가 부정하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부당한 판결로 죽음을 강요하는 현실에 복종하겠다는 것은
    현실의 부정으로부터 현실의 긍정으로 반전된 것이다. 그는 불가항력적인
    부당한 권력의 강요로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현실의 부정에서 현실의 긍정으로, 곧 극에서 극으로 옮겨 간 그의
    태도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실의 긍정이 결코 그에게는 구원의 길이 아니었고 오히려 죽음의
    길이었다는 점이다.
    재판 그 자체까지도 재판하던 소크라테스가, 그만큼 철저한 부정 정신의
    소유자이던 소크라테스가 태연히 독배를 마심으로써 그러한 현실에
    순응했다는 사실은 용기의 또 한 측면, 곧 현실을 긍정하는 용기를 보여
    준다.
    파이돈 에서 도도하게 진술한 내세에 있어서의 영생에 대한 신념이
    죽음을 태연히 맞이하고 가혹하게 부정하던 현실을 긍정하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다른 면에서 그의 현실 긍정의 원천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용기의 두 측면이다. 곧 용기는 현실을
    긍정하는 한 면을 갖고, 또한 면에 있어서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용기는 현실의 완전한 부정에서는 탄생될 수 없다. 참으로
    용기 있는 자는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일단은 자기가
    놓여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긍정이 필수적인 것이다.
    용기가 어떤 현실을 부정하려는 비판 의식, 자유 의식의 발로인 한,
    용기는 부정할 구체적 현실이 필요하고 이 현장에서 진리를 증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현실의 긍정은 현실에서의 순응이나 현실의 수동적인
    수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일차적 선택은 아테네라는 현실의 근원적 긍정
    이었다. 그는 아테네를 멸망시키거나 아테네로부터 도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를 사랑하고 아테네를 재건하려는 염원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테네 안에서 미움받는 등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아테네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테네에 반항한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은 그의 근본적인 긍정 에
    철저하려는 용기였다고 볼 수 있다.
    현실 도피와 현실 부정을 동일한 것으로 보려는 착각이 있다. 그러나
    현실 부정이 결코 현실 도피가 아님을 보여 준 것이 소크라테스의
    용기였다.
    앞에서 진정한 용기는 이성적이고 주체적이며 무한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했거니와, 현실 도피에서 이성적 주체적 태도를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실 도피는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도피는 위험이나 공포에 단호하게 직면하고
    극복하려는 힘의 발휘가 아니라, 반대로 위협감 또는 공포감의 소산이다.
    가능한 한, 감정적으로나마 현실을 없는 것으로 가장하려는 일종의 감정의
    반응이 현실 도피이며 용기가 아니라 비겁의 소산이다. 현실을 없는
    것으로 돌려버리려는 태도이기 때문에 대결할 대상이 없다. 투쟁 없이
    패배를 자인하는 태도인 것이다.
    현실 도피에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부정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그것이 최대의
    현실 부정이라고 하는 것은 기만하기 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조국의
    현실이 역겹다고 해서 조국을 무화하려는 사람에게는 구체적으로 대결해야
    할 역겨운 현실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현실로부터 도피한 자는
    행동할 이유도 행동할 장소도, 대상도 없다.
    현실 부정은 현실 도피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관념적인 현실 부정과 행동적인 현실 부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현실
    부정은 궁극적으로는 부정 행위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현실 도피는 흔히 현실 도피자의 자기 합리화에 그친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는 행위에 나타나는 것이며 결단은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부정은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 행위를 요구하고, 따라서
    행위의 구체적 대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과정에서 정신적
    도덕적 힘으로서의 용기는 구체화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행위의 구체적 대상은 무엇인가? 부정하려고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현실이다.
    현실 도피가 현실을 전적으로 긍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라면 현실 부정은
    일단은 현실을 긍정하는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의 부정은
    현실을 초극하려는 용기이기 때문에 그 출발점에는 근원적인 긍정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도덕적 타락을 부정한 것이지 아테네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도덕적 타락이라는 현실을 담고 있는 아테네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비록 거기에 부패와 부정과 타락이 충만해 있다 하더라도, 아테네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화할 수는 없었다. 그의 근원적인 선택은 아테네였고,
    아테네에 대한 긍정이 그의 용기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문이 가능하리라. 아테네 자체 를 긍정한 것과 아테네의
    현실 을 긍정한 것은 다르지 않는가? 이것은 마치 실체와 현상을
    구별하려는 방법과 같다. 아테네라는 실체가 따로 있고 아테네의 일시적
    현상으로서의 현실은 이와는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아테네의 실체와
    아테네의 선상을 구별하는 것은 적어도 행위에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행위의 구체적인 대상으로서는 아테네는 바로 그 현실 이외의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국이 따로 있고 조국의 현실이 따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조국은 바로 역사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긍정하려는 현실과 부정하려는 현실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사변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긍정하면서 부정한다는 역설이
    성립하고 긍정 즉 부정이며 부정 즉 긍정이라는 변증법적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전제하고 이상에서 한 말을 음미해야
    한다. 우리가 부정하려는 현실의 역사적 귀결로서의 현실이다. 그
    안에는 과거로부터 누적되어 온 온갖 것이 현존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긍정하려는 현실을 현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곧
    그것은 시간적으로는 현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래가 포함되어 있다.
    현실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을 통해 이미 미래를 선취하고 있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부정하려는 것은 현재적 현실이며 긍정하려는 것은 미래적
    현실이다.
    소크라테스가 부정한 것은 현재의 아테네 였고 그가 긍정한 것은 현실
    속에서는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 도덕적 자각까지도 실현된 현재 속의
    미래의 아테네 였다.
    만일 현재적 현실, 곧 목전에 실현, 전개되어 있는 현실을 긍정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순응 내지는 추종이다. 진정한 현실 긍정은
    미래적 현실, 곧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자신의 주체적 결단에 의해
    선취된 미래가 가능성으로서 깃들이어 있는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긍정을 지금까지 근원적 현실 긍정 이라고 표현해 온
    것이다.
    앞에서 결단은 용기의 모태라고 하였다. 결단은 용기의 구체적
    내용이며 그 대상은 현실이다. 그러므로 용기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용기에 대한 수많은 이론에서보다 소크라테스의
    구체적인 용기에서 더 많은 감동을 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단은 주체적 선택이며 이러한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미래를 선취한다.
    우리의 선택은 항상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다.
    결단 그 자체는 모험이다. 여기에는 얼마나 정확하고 합리적인 현실
    분석이 수행되었는가, 현실이 갖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미래 공상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등 난 문제가 따른다. 싸르뜨르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선택은 결국 세계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고, 그
    결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영원히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선택한 것이 그 국가에 남기는 결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생각하면 결단의 무서움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결단은 진정한 용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비겁한
    자는 결단을 회피할 것이며 만용밖에 모르는 자는 결단하기 전에 행동부터
    시작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성실을 다 기울였다는 자신, 자신의
    선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다는 신념, 그것이 인류를 위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용기 없는 자라면 이러한 결단에
    도달하기 전에 절망하고 말 것이며 오히려 이러한 결단을 요구하는 용기는
    근원적인 현실 긍정을 하는 용기일 것이다. 이러한 용기의 구현을
    우리는 소크라테스에게서 보는 것이다.

    (위의 독배의 의미 용기란 무엇인가? 는 각기 다리 지(72년
    4월호)와 고대 신문 (73년 5월 22일자) 에 발표되었던 것을 다시 수록한
    것이다. 후자는 약 3분의 1을 생략했다. 문체가 다르고 중복되는 점도
    있고 해설의 범위를 벗어나는 점도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이해를 위해
    그대로 수록하였다)

    3.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스턴은 역사 철학을 말하면서 아무리 위대한 사상을 품고 있고 아무리
    훌륭한 경륜을 갖고 있더라도 이것이 객관적인 기록으로 남지 않는 한
    역사는 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플라톤이 없었더라면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제자 플라톤이 스승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대화편 이 소크라테스를 알려 주는 유일한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생애는 쉽게 알아볼 수 있으므로 소개하지 않고
    소크라테스와의 관계만을 간단히 적기로 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은 20세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아테네
    청년 누구 나가 그랬듯이 정치를 지망하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알 고부터는 그의 영향을 받아 철학 연구에 전념하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할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이 사형 당하는 비극을 겪고 그는 정계 진출의 뜻을 버렸다. 스승의
    죽음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가 스승의 죽음에
    직면한 것은 28세 때였다.
    그는 기원전 387년 아테네의 서쪽 아카데모스에 학원을 짓고 여기서
    여생을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플라톤의 저술은 28편이 남아 있다. (기타 플라톤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이 적지 않으나, 플라톤 연구자들은 28편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
    중 변명 과 서한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화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 대화편 에는 대부분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존경심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사상의 충실한 계승 파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사상을 발전시켜서 체계화한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따라서 대화편 의
    주인공이 소크라테스로 되어 있더라도 과연 그것이 전부 소크라테스의
    사상인가 하는 점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플라톤의 사상이 전술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발전시킨 플라톤의 사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플라톤 연구가들은 플라톤의 초기의 대화편 은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재현이라고 볼 수 있으나 중기, 후기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플라톤의 독특한 사상이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중기 이후의 대화편 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화된 소크라테스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구가가 아니면 이러한 문제를 중요시할 필요는 없는
    줄 안다. 그것이 누구의 사상이든 우리는 거기서 정신의 양식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목할 대화편 변명 크리톤 파이돈 중 변명 과 크리톤
    은 초기 (40세까지)에 속하고 파이돈은 중기(60세까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편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충실히 재현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줄 안다.
    변명 , 크리톤 , 파이돈 의 세 편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으로부터
    사형에 이르기까지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세 편을
    통해서 우리는 재판에서 사형에 이르는 과정을 알 수 있고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짐작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적 399년 봄에 사형되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70세였다고 전하므로 그는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아테네가 승리하고
    10년이 지난 기원전 469년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아테네에서
    석공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크라테스도 젊었을 때는 석공으로 일했다고 전한다.
    소크라테스의 전반 생애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초기에는 소피스트였다는 것은 확실한 듯하지만 그 후의 사상적 경로나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진 않다.
    따라서 재판으로부터 사형까지를 전한 변명 , 크리톤 , 파이돈 은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아는데도 귀중한 문헌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 세 편의 대화편 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의 인간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 세 편을 읽고 나면 왜 소크라테스를 성인이라고 하고
    가장 참된 철인이라고 말하는지 그 까닭에 수긍이 갈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위대하다거나 플라톤의
    문체가 아름답다거나 하는 이유보다도 세 편의 대화편 을 통해 여실히
    재현되는 소크라테스의 인간성인 것이다.
    어떠한 사상도 인간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위대해질 수도, 감동적인
    것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구석구석에서 인간성의 퇴폐 ,
    인간의 부재 가 절규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인간성을 접하고 강한 감명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 회복 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리라고 믿는다. 이러한 의도에서 그리스어를
    모르면서도 이 세 대화편 을 우리말로 옮겨 본 것이다. 가능하면 쉬운
    말로 옮겨 소년들까지도 가까이 할 수 있는 번역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역자의 의도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오직 두려움을 느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