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아니된다」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 누구가 인간으로 태어날 것임을 명령했음을 의미함이 아니라,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생명을
가지기 위해서 인간은 합리적 의식에 의해 이 생존 속에 새로이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합리적 의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의식에 의해서
표시되는 행복 속에 생활을 찾게 하고자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
행복 속에서 생활을 찾는 자는 생명을 가지게 되나, 이 속에서 생활을
찾지 못하고, 그것을 동물아의 행복 속에서 찾는 자는 이 사실 그 자체에
의해서 스스로 생명을 잃는 것이다. 예수에 의해 주어진 인생의 정의는 이
한가지 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적 행복이 희구를 인생으로 아는 자들은 이런 말씀을 듣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전혀 뜻이 없거나 혹은 극히 빈약한 의미인 어떤 감상적이고
신비적인―그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기분이 있기나 한 것처럼
보이게 해주는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그들로서는
들어가기 어려운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이것의 의미를 깨달수 없음은,
마치 메말라서 이제는 움이 트지 못하는 씨앗이, 습기를 띠고 이미 움트고
있는 씨앗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함과 같은 것이다. 메마른 씨앗으로서는
그 움터 나오려는 씨앗을 비쳐주는 태양도 그저 무의미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약간의 열과 빛을 더해 줌에 지나지 않은
그것이 움트기 시작한 씨앗에게 있어서는 생으로 태어나오는 원인이 된다.
이것은 마치 아직 동물아와 합리적 의식의 내적 모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이성인 태양의 빛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우연,
감상적이고 신비적인 말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태양은 다만 이미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만을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에게만 그치지 않고 동물에서도 식물에서도 생명이
어떻게 해서, 언제, 어디서, 생겨 나오느냐는 것을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알아낸 사람이 없다. 인간의 생명의 발생에 대해서 예수는「이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실제 어떻게 하여 인간의 내부에 생명이 발생하느냐함을 알 수
있을까? 생명은 인간의 빛이다. 생명은 만물의 생명이다. 삼라만상의
원천이다. 어찌 인간이 그 발생 상태를 알 수 있으리오? 인간에게는
발생하거나 멸망하는 것은 살아 보지 않은 것, 즉 공간과 시간 사이에
나타나 있는 것뿐이다. 생명은 참된 존재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발생하거나 멸망될 수도 없는 것이다.
7 합리적 의식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렇다. 합리적 의식은 인간에게 반박할 수 없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그가 자기의 개인적 입장에서 보는 오늘날 세계 조직에 있어서는, 즉 그
개인을 위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고, 그의 생명은 특별히 자기에게 행복을
얻으려는 소원인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 행복이 불가능한 까닭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스럽지 않은가? 그는 이 행복이 그에게 불가능한
까닭을 의심할 여지없이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있을 수 없는
이 행복, 자기 일신을 위한 행복을 생각하는 것으로만이 살아가고 있으니!
눈이 뜨이는 (방금 뜨이었을 뿐이다) 했으나 아직도 동물아를 자기에게
종속시키지 않는 합리적 의식을 가진 인간은, 만약 그가 자살이라도 하지
않는 한, 오직 이 불가능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가 살고 또 일하는 것은 자기 일신의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고, 모든 사람들, 모든 생물조차도 그저 그의 행복을 위해 그가
하나의 기쁨을 위해 살고 일하기 위한 것이고, 그만이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 자신이 경험과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생활에
관한 관찰과 이성은 각자에게 이 목적이 달성되기 어렵다는 것을 확실히
가르치고, 다른 생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사랑함에 그치게 하고, 다만
자기 하나만이 사랑 받게 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각자의 생활은 그저 부력(富力) 권력 명예 영광 감언
사기 등의 수단으로써 다른 생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하나를 위해서만이 생활하게 하고, 일체의 생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하나만을 사랑 받게 하려하는 데 있으니!
사람들이 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 될 수 있는 데까지는 무엇이든
해왔으며 또 현재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저들이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나의 생활은 행복에 대한
희구다」라고 인간은 자기에게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만인이
오직 나만을 자기네들 자신보다도 사랑해 줄 때 비로소 가능한데, 모든
생물은 그저 자기만을 사랑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들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헛수고다. 헛수고이기는
하나 나로서는 그 밖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몇 세기의 세월을 거쳐서 인간은 발광체로부터의 거리를 알고, 그들의
무게를 정하고 태양이나 별의 성분을 밝히기는 했으나, 개인적 행복의
가능을 부정하는 이 세상의 생활을 어떻게 조화하면 좋으냐 하는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5천년 전의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의식은 각자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대는 행복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만인이 그대를 그들 자신 이상으로 사랑해 줄
때에 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합리적 의식은 사람에 대해서 너무
무리한 청구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따라서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인간에게 계시되는 유일한 행복은 너무 같은 의식의 손에 의해서 또다시
감추어져 버리는 것이다.
몇 세기의 세월이 경과해도 인간 생활의 행복에 관한 수수께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이 수수께끼는 이미 아득한 옛적에 해결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결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것을 풀지 못했는가 함은 이상스럽게 여기며, 그들은 벌써
옛적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을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그만큼 현대 세계의 그릇된 가르침 속에서는 곤란한 것
같이 여겨지는 이 수수께끼의 해결도 극히 간단하고 또 자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만인이 그대를 위해서만 생활해 줄 것을 바라고, 그들 자신
이상으로 그대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 그런데 그대의 이
희망이 달성될는지도 모를 상태는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든
생물이 타자(他者)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상태다. 그 때에 비로소 그대로 또 다른 모든 생물과 만물로부터
사랑 받게 되고, 그들 중의 하나인 그대도 그대가 바라는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토록 행복이란 모든 생물이 자기 자신보다 남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대에게 가능한 것이라 한다면, 하나의 생물인 그대도
마땅히 그대 자신보다 다른 생물을 더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오직 이
조건에 있어서만이 인간의 행복과 생활은 가능하다. 오직 이 조건에서만이
인간의 생활에 해독을 끼치는 것이 절멸되고, 생물의 투쟁, 참혹한 고통
및 죽음의 공포도 근절되는 것이다.
실제 개인적 존재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첫째는,
서로가 개인적인 행복만을 찾고 있는 생물의 투쟁이며, 둘째로는 생명의
낭비(浪費)와 포만(飽滿)과 고통으로 이끄는 열락(悅樂)의 속임이고,
셋째로는 죽음이다. 그럼 이 행복의 불가능을 없애고, 인간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의 개인적 행복에 대한 희구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로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임을 가정해야 한다.
인생이란 개인적 행복에 대한 희구라는 인생관으로써 세계를 볼 때,
인간은 거기에 서로 멸망케 하는 불합리한 생물의 투쟁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것과는 전혀 틀리는 것, 즉 생물의 투쟁의 우발적
현상과 더불어 같은 존재의 끝없는 상호봉사, 그것 없이는 세계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되므로 봉사를 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의 생활을 남의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만을 인정한다면, 여태껏 도달할 가망이 없던 개인적 행복으로
지향된 모든 무의미한 활동도 세계의 법칙과 일치해서 자기와 전 세계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행복 달성으로 지향될 다른 활동과 바꾸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생활을 비참하게 하고, 인간에게 그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둘째번 원인은, 생명을 낭비하고 포만과 고통으로 이끄는 개인적 열락의
속임수였다. 인간은 그저 남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서 자신의 생활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열락이 지니는 속이기 쉬운
갈망(渴望)은 사라지고, 동물이라는 밑바닥 없는 통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
지향되어 온 무익하고 괴로운 활동도 이성의 법칙과 일치하는 다른 존재의
생활을 지탱하려는 그의 행복에 없어서는 안될 활동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활동을 절멸시키는 개인적 고통의 괴로움은 확실히
유익하고 가장 기꺼운 활동을 일으키는 남에 대한 동정의 감정으로 바뀔
것이다.
개인적 생활을 비참하게 하는 세째번 원인은 죽음의 공포였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자기의 생활을 그 동물아의 행복에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행복에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기만 한다면, 죽음이라는 괴물은 그
눈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대체로 죽음의 공포는 그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삶의 행복이 상실된다는
공포로부터 생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약 자기의
행복을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 상정(相定)할 수 있다면, 즉 그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면, 죽음도 역시 자기 하나만을 위해서
생활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 같은 행복과 생명의 중단은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남을 위해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것이 행복과
생명의 소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존재의 행복과 생명은 다만 그들에게 봉사하는 인간의
생명에 의해서 절멸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때로는 그 생명이 희생에
의해서 높여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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