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우리가 리얼리티(진실, 실재)의 체험을 요구할 때

별관신사 2015. 2. 2. 06:58

우리가 리얼리티(진실, 실재)의 체험을 요구할 때-우리 모두가 그러기를 바라고
왔거니와-그걸 체험하려면 그걸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리얼리티)을 투사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리얼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생각과 시간의 장속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고가 리얼리티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리얼리티일 수가 없다. 우리는 새로운 체험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아는 어떤 것만을 인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체험을 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전혀 새롭지가 않다. 여러가지 환각제로서 그렇게 하듯 의식의 팽창을 통해서
더욱 나아간 체험을 하고자 하는 것은 여전히 의식의 범위 속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아주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좀더 넓고 깊은 체험을
찾고 갈망하는 마음은 아주 얕고 무딘 마음이라는 것,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기억과 더불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만일 우리가 전혀 아무 체험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깨어 있기 위해서 체험과 도전에 의존한다. 만일 우리들 자신 속에 아무 갈등이 없고,
아무 변화, 아무 불안(소동)이 없다면, 우리는 깊이 잠들 것이다. 그래서 도전은 대부분의

우리에게 필요하다. 도전 없이는 우리의 마음이 우둔하고 무거워질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 많은 흥분과 강렬함을 주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예민하게
하기 위해 도전과 체험에 의존한다. 그러나 깨어 있기 위해 도전과 체험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디게 할 따름이다-즉 그것은 우리를 전혀 깨어 있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도전이나 체험 없이 완전히-즉 내 존재의 일부분이 아니라 완전히 깨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자문한다. 이것은 육체적 및 정신적으로 대단한 감수성을 암시한다. 즉 그것은

내가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요구하는 순간 나는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구와 만족에서 자유롭게 위해서는 나 자신을 연구, 조사할
필요가 있으며, 요구의 본질 전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구는 이중성으로부터 나온다-<나는 불행하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바로 그 요구가 불행이다. 누가 착해지려고 노력할 때, 바로 그 선이 그것의
반대인 악이다. 긍정된 모든 것은 그것 자체의 반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것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것을 강화한다. 당신이 진실 혹은 리얼리티를 체험하고
싶어할 때, 바로 그 요구는 있는 것 what is에 대한 당신의 불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 요구는 그것(요구)과 반대되는 것을 낳는다. 그리고 그 반대되는 것 속에는 있었던

것 what has been이 들어 있다. 그래서 그는 이 끊임없는 요구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중성의 회랑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 자신을 아주 완전하게 알므로써
마음이 더 이상 뭔가를 찾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마음은 체험을 요구하지 않는다-즉

그것은 도전을 바라지 않으며 도전을 알지도 못한다, 그런 마음은 <나는 잠들어 있다>거나
<나는 깨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있는 그대로이다. 오직 좌절하고, 좁고,
얕은 마음, 제약된 마음만이 항상 더 많이 얻고자 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더 많이> 없이

살 수 있는가-이 끝 없는 비교없이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가? 정말 그럴 수 있는가? 그러나
자기 스스로 해답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