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긴 하지만 여러분들 중에는, 자유에 대해서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새로운 관념, 여러분이 익숙해지기
까다로운 관념 앞으로 나서 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삶의 추한 면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상(일과 사물)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과도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좀 어려울 것 같은 것도 거듭 생각해 보면 볼수록, 거듭 따져 보면 따져 볼수록, 삶을
넉넉하게 사는 능력은 그만큼 폭넓어질 것입니다.
혹시 이른 아침, 수면에 비치는 햇빛을 본 적이 있는지요. 본 적이 있다면, 그 빛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부드러운지, 하늘에 하나뿐인 샛별이 나뭇가지에 걸린 그 시각에 검은 물결이
어떻게 춤추는지, 잘 알 것입니다. 본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너무 바빠서, 일상 잡사에
쫓기느라고 이 땅-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하는 이 땅-의 푸근한 아름다움을 미처 보지
못했거나 잊고 있었던 건가요? 우리가 공산주의자든 자본주의자든, 힌두 교도든 불교도든,
회교도든 기독교도든, 장님이든 절름발이든, 건강하든 행복하든, 이 땅은 우리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이 땅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자만의 땅, 권력을 가진 통치자, 한 나라의 귀족들에게만 속하는 땅이 아니라 우리의 땅,
여러분의 땅이자 나의 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름없는 사람들입니다만 우리 역시 이땅에
살고 있고 또 우리 모두 함께 어울려 이 땅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은 부자들의 세계이자
가난한 자들의 세계이며, 유식한 자들의 세계이자 무식한 자들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땅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땅을 느끼고 사랑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고요한 아침
같은 때 이따금씩 사랑하고 느끼는 게 아니라, 늘 그렇게 사랑하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비로소 이 땅을 우리의 것으로 느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자유만한 게 없습니다. 그런 데도 우리는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와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모두가-선생님, 부모님, 법률가,
경찰관, 군인, 정치가, 사업가-저마다 구석구석에서 자유의 길을 막을 만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유로와진다는 것은, 하고 싶은 짓을 한다거나, 여러분을 구속하고 있는 외적
환경에서 뛰쳐나온다는 게 아닙니다.
자유로와진다는 것은, 의존의 문제를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의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부모님에게 의존하고 있겠지요? 여러분은 선생님들에게, 요리사에게, 우편물
집배원에게, 날마다 우유를 배달해 주는 사람 같은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의존이라면 누구나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와지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아주 내면적인 의존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자기의 행복을 위해 남에게 기대는 것이 바로 이런
의존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에게 의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구속되는 정도가 심한, 타인에 대한 물리적 의존이 아니라, 이른바 행복을 구한답시고 남에게
내면적으로, 심리적으로 기대는 의존을 말합니다. 내면적으로 심리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할 때
여러분은 노예가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이를 먹으면서도 부모나 아내나 남편이나 구루나 어떤
이념에 감정적으로 의존한다면, 이는 여러분이 구속당하기 시작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이걸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데도 우리들 대부분은, 특히 젊은 시절에는, 이런 것도 모르고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자유로와지려면 모든 종류의 내면적인 의존에 저항해야 합니다. 의존하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와진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이해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유는 단순한 반발이 아닙니다. 자, 반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만일에 내가 여러분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말을 하거나 욕을 한다면, 여러분은 나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이게 반발입니다
이 반발은 의존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자주성이란, 이보다 정도가 심한 반발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반발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발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를 뛰어넘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은 나무를 사랑하고 새를 사랑하고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아무것도
베풀어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무를 가꾸고, 새를 먹이고, 애완 동물을 아껴 줍니다.
나무는 그늘을 베풀지 않고, 새는 여러분을 따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사랑은 늘 근심과
질투와 두려움과 뒤섞여 있기 때문이지요. 즉 우리는 남에게 내적으로 의존하고 있어서 사랑한
만큼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저 사랑하고 사랑을 거기에 남겨 놓으려 하지 않고 반대 급부를
요구하고 거둬들입니다. 바로 이렇게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사랑은 늘 짝지어 다닙니다. 사랑은 반발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거야 장사지, 시장에서나 사고 파는 것이지 어디 사랑입니까?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반대 급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주고 있다는 느낌조차 없어야 참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아는 것은 이런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여러분은 이런 사랑을 배운 바 없습니다. 여러분의
배움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부모님들은 오직 여러분이 좋은 직업을 구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
주는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에게 돈이 많다면, 여러분을 해외로 유학 보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어느 나라건, 부모의 목적은 여러분이 잘살고, 존경받을 만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여러분 때문에 그만큼 더
피곤해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오르려면 여러분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과
경쟁하고, 그만큼 무자비하게 이겨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야심이
있는 곳, 경쟁이 있는 곳, 따라서 사랑은 있을 수 없는 곳으로 보냅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사회가 끊임없이 부패해 가고 사람들이 늘 치고받고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정치가,
법률가, 이른바 귀족들이 입만 열면 평화 어쩌고 하지만, 이건 말짱 헛소리들입니다.
자, 여러분이나 나나 이 자유의 문제라는 걸 좀 철저하게 이해해야겠습니다.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우리들끼리 한 번 검토해 보아야하겠습니다. 왜요? 사랑하지 않으면 생각도, 주의도
기울여 볼 수 없을 것이요, 도무지 어떤 문제를 사려깊게 따져 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려깊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맨발로 자주 다니는 길에 뾰족한 돌 하나가 솟아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이 돌을 뽑아냅니다. 누가 뽑으라고 해서 뽑는 게 아니고 남을 생각해서
뽑는 것이지요. 남이라는 게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고, 강을 바라보고, 이 땅의 풍요로움을 즐기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관찰하면서
그 날개짓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삶이라고 불리는 이 엄청난 구경거리 앞에서 눈을 씻고
마음을 여는 경지-여기에 자유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유는 아무 가치가 없는
관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따라서 내적인 의존을 이해하고 이를 분쇄하는 사람, 이로써 사랑이
무엇인지 깨친 사람에게만 자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만이 새 문화, 다른 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욕망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욕망을 없앨 수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질문하시는 분이 젊은 분이군요. 왜 이분은 욕망을 없애야 할까요? 여러분은
이해하시겠습니까? 젊은 분입니다. 삶에의 충동과 생명력에 넘치는 젊은 분입니다. 이런 분이 왜
욕망을 없애야 합니까? 이분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최상의 미덕이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신, 혹은 이름붙일 수 있는 궁극적인 실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욕망이란 어디서 유래한 것이냐, 어떻게 하면 이를 없앨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없애려는 충동 자체가 역시 욕망이 아닐는지요. 이러한 충동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욕망의 근원, 본원은 무엇일까요? 욕망은 어디에서, 무엇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마음이 끌리는
걸 보면 가지고 싶어합니다. 자동차, 혹은 보트를 보면 가지고 싶어합니다. 혹은 부자가 이룬
것을 성취하고, '산야시(고행자)'가 되어 보고 싶기도 합니다. 욕망은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보고,
만지는 것, 여기에서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고, 이 마음이 동요되는 데서 욕망이 생깁니다. 자,
욕망이 갈등을 일으킨다는 걸 알고 여러분은,"어떻게 하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욕망이 일으키는 근심, 걱정,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욕망
자체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 욕망의 나무에 열린 쓰디쓴 과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욕망과 한덩어리로 어우러진 고통, 고민, 투쟁,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벗겨내고 이로써 즐거움만 남길 수 있는데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욕망의 정도야 어떻든 얻고, 성취하고,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는 한 근심, 슬픔, 공포도
여기에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고,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야심을 버리는 것은,
우리가 욕망 자체가 썩어빠진 것임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욕망 자체의 부패하는 속성을 알
때만 가능합니다. 형태야 어떻든, 권력-국무총리, 판사, 사제, 구루의 권력-에의 욕망이라는 게
나쁘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권력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심이 필경 부패하고 마는 것이며, 권력에의 욕망이 나쁘다는 걸 꿰뚫어 보지 못합니다.
꿰뚫어 보기는커녕, 권력을 좋은 일에 쓰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게 웃기는 소립니다. 의롭지
못한 수단은 결코 의로운 목적에 쓰이지 못하는 법입니다. 수단이 나쁘면 결과 또한 나쁜
법입니다. 좋다는 것은 나쁘다는 것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좋은 것은 나쁜 것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서야 나타납니다. 따라서 욕망과, 욕망의 결과와, 욕망의 부산물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욕망 자체만 없애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이 사회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가 있는지요?
크리슈나무르티: 여러분 사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회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렇지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책에서 구구절절이 끌어다 대지도 말고요.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사회란 여러분과 나,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을 겝니다.
인간 관계가 사회를 만듭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는 소유욕의 관계를 토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돈, 권력, 재물, 권위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는 모두 지위와 명성을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유욕의 사회를 구축한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욕에 발목을 잡히고 있는 한, 우리가 지위와 명성 같은 것을 바라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사회에 속해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이 사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이런
것을 바라지 않고, 그저 겸손하게 자신의 현재 상태에 머무르고 있을 경우 이 사람은 이 사회
밖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사회에 저항하고, 따라서 이 사회와 단절되어 있습니다.
불행히도 지금의 교육이 겨냥하는 것은 여러분을 이 소유지향적인 사회에 길들이고,
적응시키고, 이 사회에 알맞도록 여러분을 조정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책이 관심을 쏟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제대로 길이 드는 한, 여러분이 야심적이고
소유 지향적이고 적당한 부패 상태를 용인하고, 남들을 제쳐가며 지위와 권력을 획득하는 한,
여러분은 훌륭한 시민으로 대접받습니다. 여러분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워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정한 틀에 여러분을 깎아 맞추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육의 참 할 일은 여러분을 관리, 혹은 판사, 혹은 국무총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을 도와 이 썩어빠진 사회의 구조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참 자유안에서 자라게 해 주는
일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이 썩어빠진 사회를 털어 버리고 전혀 다른 사회, 새 세상을 꾸며
낼 수 있지 않겠어요?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구세대에 저항하는 이들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 세상-소유욕, 권력의 명성을 그 바탕으로 깔고 있지 않는
세상-을 꾸밀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뿐이기 때문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이러시겠지요. "될 법이나 한 이야기야? 인간의 속성이란 어차피 그런 거야.
그러니 헛소리 말어." 하지만 우리는 어른들의 마음을 무장 해제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틀에 맞게 짜맞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확실히 교육에는
치료 기능도 있고 예방 기능도 있습니다. 여러분같이 조금 철이 든 분들은 이미 틀이 잡혀
있습니다. 이미 짜맞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야심만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처럼,
장관처럼, 혹은 어느 누구처럼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교육의 참 기능은 길들여진 여러분
마음의 매듭을 푸는 일을 도울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삶의 전과정까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자유안에서 성장하여 새세상-현재의 세상과는 전혀 달라야 하는-을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일반
대중들은 이 일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교육이 학생은 물론이고 교육자까지 교육시키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왜 싸웁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사내아이들은 왜 싸웁니까? 여러분은 이따금씩 동생과도 싸우고, 여기 있는
친구들과도 싸우지요? 왜요? 여러분은 장난감을 놓고 싸웁니다. 다른 아이가 공을 빼앗아 갔다고
해서, 혹은 책을 가지고 갔다고 해서 여러분은 싸움질합니다. 어른들도 똑같은 이유로 싸웁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이들의 장난감이 어른의 경우는 지위, 부, 권력이 되는 것뿐입니다. 여려분은
권력을 원한다, 나 역시 원한다, 그러면 우리는 싸웁니다. 국가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전쟁이란 이렇게 단순한 것인데도 철학자, 정치가, 종교인들은 괜히 복잡하게
말합니다. 이것 보세요.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도-삶의 넉넉함, 실존의 아름다움, 투쟁,
정신적 고통, 웃음, 눈물을 이해하고도-마음을 단순하게 쓴다는 것은 대단한 기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법을 알 때 비로소 여러분은 마음을 단순하게 쓸 수 있습니다.
--질투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질투란, 여러분의 현재 상태에 불만이 있어 다른 것을
부러워하는 것 아닙니까?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에서 선망이 비롯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보다 박식한 사람, 보다 잘난
사람, 혹은 보다 큰 집에 사는 사람, 보다 큰 권력, 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은 보다 신심이 깊은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보다 나은 명상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신에게 도달하고 싶어합니다. 현재 상태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즉 여러분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이해하자면, 현재 상태를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하고 싶다는 욕망이 선망과 질투를
낳습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현재 상태를 이해하고 있으면, 그 이해 안에서 여러분의 현재 상태는
이미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여러분이 받는 교육은 여러분에게, 현재 상태로부터
달라지라고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질투할 때마다 교육은 여러분에게 속삭입니다.
"질투하지 말아라. 그건 몹쓸 일이야."하고.
그래서 여러분은 질투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이 애쓴다는 것 자체가 바로 질투의
일부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달라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쁜 장미가 예쁘다는 거야
여러분도 아시겠지요. 그러나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생각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예지와 이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현재의 우리 교육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을
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떻게 통찰하고 탐구해야 할 것인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생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알게 될 때 학교가 비로소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왜 무슨 일에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크리슈나무르티: 어린 소녀가 이런 걸 묻는 데, 누가 시킨 짓은 아닌 듯합니다. 어린 나이에, 이
소녀는 왜 매사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그 까닭을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른들은 뭐라고
하시겠어요? 여러분이 소녀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어린 소녀가 매사에
만족하지 못하는 까닭을 묻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보아하니 교육자들 같으신데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이 비극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명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둔합니다. 지쳐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죽어 있습니다.
왜 인간은 만족을 모를까요? 행복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의 추구를 통해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이 관계에서 저 관계로,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이 이념에서 저 이념으로 옮겨 다닙니다. 혹은 더러는 삶을 스스로 침체시키고 거기에
은둔해 버립니다. 만족이란, 달라지겠다는 욕망이 없는 상태에서, 비관하지도 않고 비교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 눈에 보이는
대로 그저 받아들이고 가서 잠이나 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더 이상 비교하고,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고, 따라서 달라지겠다는 욕심 없이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바로 이러한 자각 안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읽어야 합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왜 읽어야 하지요? 조용히 잘 들으세요. 당신은, 왜 놀아야 하느냐, 왜 강을
바라보아야 하느냐, 왜 잔인하게 굴어야 하느냐고는 묻지 않는군요, 그렇지요? 당신은 싫은데 왜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읽기, 놀기, 웃기, 잔인하게 굴기,
착하게 굴기, 강 구경하기, 구름 바라보기-이 모든 것이 삶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읽을 줄도 모르고, 걸을 줄도 모르고, 나뭇잎의 아름다움조차 느낄 줄 모른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삶의 조그만 귀퉁이가 아니라 온전한 삶 자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래서 당신을 읽어야 하고, 또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노래를 불러야 하고,
춤을 추어야 하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게 곧 삶이니까요.
--부끄러움이란 무엇입니까?
크리슈나무르티: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 질문을 할 때 당신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이처럼 이 강단에 나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면
어때요, 부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까? 문득 아름다운 나무나, 예쁜 꽃이나 둥우리에
앉아 있는 새를 만나면 조금 부끄럽고 난처하다는 느낌 때문에 가만히 서 있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보세요, 부끄러워한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부끄러움이란 자의식과 관계가 깊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만,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은 참 대단한
사람이고, 유명한 사람이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이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때의 부끄러움은 자의식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부드러운 수줍음
같은 부끄러움이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의식이 없습니다.
4 귀를 기울인다는 것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왜 나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혹시 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요? 누구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모두 말하는 사람 앞에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의 생각과 딱
맞아떨어지는 말을 들으려고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앉아 있습니까?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저 자기의
생각과 맞아 떨어지는지 보려고 귀를 기울이는 것과는 전혀 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려고, 그래서 그 생각을 고무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의 경청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아무데도 걸리는 데 없이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극히 예민하고, 날카롭고, 움직이고,
묻고 있으며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니 귀를 기울이는 이유, 귀를 기울이는 대상을 따져 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아무데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아무 데도 정신을 집중시키려 하지 않는 채로,
그러나 마음을 조용히, 차분하게 안정시키고 그저 앉아 있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 본 적이
있는 분에게 묻겠습니다만,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리지요? 가까운 데서 나는 소리, 코 앞에서 나는
소리는 물론이고 아주 먼 데서 나는 소리도 다 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소리라는
소리는 다 듣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비좁은 도랑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아주 편안하게, 긴장을 풀고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굉장한 변화-여러분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바라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생기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변화는 대단한 아름다움과 심오한 통찰을 거느립니다.
이따금씩 해 보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해 보세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되, 나에게만 집중하지
말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에게 귀를 기울여 보세요. 모든 종소리, 송아지 목에 걸린 종소리,
사원의 종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먼 곳을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 소리, 길 가는 마차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는 여러분의 주의를 가까운 데로 옮겨 내 말에도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러면 듣는다는 게 심오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시키는 데로 하되
마음을 아주 고요한 상태로 다스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은 저절로
고요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모든 사물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고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편안하게,
흐뭇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여러분은 마음과 정신에 놀라운 변화-여러분이 생각도 못 해
본 변화, 혹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일으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지요? 생각이라는 게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고, 혹은 생각은 마음이 짜맞추는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늘 이 생각과 씨름합니다.
그러나 모든 소리-강둑에 밀려와 부딪치는 물소리, 새의 노랫소리, 아기 우는 소리, 어머니의
꾸지람 소리, 친구가 놀려대는 소리, 아내 혹은 남편의 잔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며,
여러분은 언어의 세계 저편, 우리의 존재를 쥐어뜯는 언어적 표현 저편에 있는 세계에 도달해
있다는 걸 실감할 것입니다.
언어적 표현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 이유를 따지기 전에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젊든 나이를 먹었든, 경험이 없든 경험이 풍부하든 상관없이
모두 행복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학생이라면 놀이를 즐기고, 공부하고, 하고 싶어하던
자질구레한 일들을 통해 행복을 누리고자 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은 재산이나 돈에서, 좋은
집을 갖는 일에서, 마음 맞는 아내나 남편, 좋은 일자리를 얻는 일에서 행복을 구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더 이상 만족을 주지 못하면 우리는 다른 데로 옮겨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집착을 버려야겠다.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출가를 실천합니다.
가족을 떠나고, 재산을 포기하고는 세상을 등집니다. 아니면 동류끼리 모여 교우를 논하고, 한
지도자, 구루, 도사를 따르고, 한 가지 이상을 따르고, 필경은 자기 기만, 환상, 미신이 터부인
교리를 믿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하고 종교 집단에 몸을 붙일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아시겠어요?
머리를 빗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자신의 외모를 보기좋게 가꾸는 것은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시험에 통과하고, 이름 뒤로 몇 자 직함을
거느리고, 일자리를 구하고, 집과 재물을 사들이고,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지도자들이 보이지
않는 도사들로부터 한 소식 옳게 받았다고 주장하는 종교 집단에 몸 붙이고-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행복을 찾아보겠다는 이 엄청난 욕심, 이 강박 관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행복이란 이렇게 한다고 쉽사리 오는 게 아닙니다. 왜? 행복이란 이런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로써 기쁨을 느낄지 모르고, 이로써 새로운 만족을 얻을 지 모릅니다만
조만간 이것도 시들해지고 맙니다. 우리가 아는 사상(일이나 현상, 사물) 안에는 영원한 행복은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키스 뒤에는 눈물이 있기 마련이요, 웃음 뒤에는 고통과 고독이
도사리고 있는 법입니다. 모든 것을 시들고, 부패합니다. 그러니까 젊을 때 행복이라고 하는 이
요상한 것의 정체를 좇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육의 필수 조건입니다.
행복이란, 쫓아다닌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이건 굉장한 비밀입니다. 내가
몇마디 말로 이걸 좇아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내 말에 귀나 기울여 들은 걸
읊조린다고 해서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건 아닙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행복의
순간은 여러분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옵니다. 행복을 누려 보겠다고 애쓰고 있지 않을 때,
참으로 뜻밖에, 그리고 신비스럽게 순수와 존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복이 거기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지에 이르려면 굉장히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조직에도 가담하지 말고, 보다 나은 존재가 되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이 모든 노력을 포기할 때, 보다 나은
인간이 되겠다고 더 이상 애쓰지 않을 때 우리 앞으로 나섭니다. 진리는, 마음이 조용히 시간을
여러분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입니다만, 행복을 맞기 위해서는 두려움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물을 두려워하는 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을, 선생님을 두려워하는 한, 시험에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고, 진급하지 못할까 봐,
교조에게 가까이 가지 못할까 봐, 진리와 가까워지지 못할까 봐, 남들로부터 호감을 얻지 못할까
봐, 친구로 대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한 행복 같은 것은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여러분은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혼자 걸을 때일 수도 있습니다. 청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찾지도 않았던, 사랑, 진리, 행복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문득 거기에 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제대로 교육받는 일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교육이 아닙니다. 왜냐구요?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이게 무슨 교육입니까? 여러분의 선생님은, 시험을 잘 치를 준비만 시킬 줄 알았지, 가장 중요한
삶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이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그럭저럭 삽니다. 그저 끌려 다닐
뿐입니다. 이러니 산다는 게 지긋지긋할 밖에요. 진지하게 살려면, 참으로 크고 깊은 사랑을
실천하고 침묵을 민감하게 느낄 줄 알며, 경험이 풍부하되 예사롭지 않고 단순 소박해야 합니다.
또한, 투명하게 생각할 수 있고 편견이나 미신, 희망이나 두려움에서 자유로와진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삶입니다. 이렇게 삶을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여러분이 받은 교육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깔끔하고 예의바르게 처신하는 법을 배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온 사회가 비틀거리는데 이런 피상적인 것들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집이 불타는 데
손톱 소제를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무도 이런 것에 대해 얘기해 준 바
없고, 아무도 여러분과 함께 이를 실천하려 한 바 없습니다. 매일매일 특정 과목-수학, 역사,
지리 같은-을 공부하면서 반드시 보다 깊은 이러한 문제를 토의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 삶이 풍부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신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참 종교가 아닐지요?
크리슈나무르티: 먼저,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 따져 보기로 합시다. 이게 제대로 접근하는
방법이 아닐는지요.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다른 걸 좀 생각해 볼 수 있을
테지요. 이건, 더러워진 유리창을 닦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더러워진 유리창을 닦고 나면 이
유리창 저쪽이 환하게 보일 테니까요. 그러니까 먼저 종교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우리 마음에서 쓸어버릴 수 있을지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생각해 보겠소." 이런 소리는 하지 맙시다. 공연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여러분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개의 나이든 사람들은 이미 발목을 잡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종교가 아닌 것에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어서 공연한 일로 구설수에 말려들지 않으려
할겁니다.
자, 그러면, 종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종교가 대충
어떤 것인지-신에 대한 믿음 어쩌구 저쩌구하는-골백번도 더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 말해 보라는 사람은 못 보았을 겁니다. 여러분과 내가 한 번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건, 다른 사람 말을 듣건, 언표된 것만 받아들이지 말고,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데 귀를 기울이세요. 일단 여러분 스스로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 알게 되면, 평생 어떤
종교의 사제나 책도 여러분을 못 속입니다. 뿐만 아니고 두렵다는 감정이, 여러분이 믿고
따를지도 모르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 종교가 아닌지 검토하기 위해
먼저 일상 생활 차원에서 시작해서 정도를 높여 가 보기로 하지요. 멀리 가려면 가까운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가까운 곳에서의 한 걸음이 가장 중요한 한 걸음입니다. 자, 무엇이
종교가 아닐까요? 종교 의식이 종교일까요? 푸자를 거듭한다-이게 종교일까요?
참 교육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면, 여러분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로운-교조주의, 미신, 종교의식으로부터-인간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종교인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종교 의식은 분명히 종교가 아닙니다. 의식을 행한다는 것은 선대에서 여러분 앞으로 넘어온
형식을 되풀이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식을 행하면서도 기쁨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사람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게 종교일까요? 의식을
행하면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도 아무것도 모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했으니까 여러분도 하는 것입니다. 안 하면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들을 테니까요. 이것은
종교가 아니겠지요?
그러면 신이 있다는 신전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인간이 상상으로 빚어낸 신상이 있습니다.
그 신상은 상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일 뿐이지 실체는 아닙니다. 상징은, 언어는, 상징이나
언어가 표상하고자 하는 실체가 아닙니다. '문'이라는 단어가 문인 것은 아니겠지요? 언어는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전으로 예배하러 갑니다. 무엇을 예배합니까? 상징일 수 있는
신상이겠지요. 그러나 상징은 실체가 아니지요. 그러면 왜 신전에 갈까요? 사실이 이렇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종교를 비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상종해도 좋을 사람이든
상종하면 안 될 사람이든, 바라문(인도의 네 계급 중 가장 높은 승려 계급)이든 바라문이 아니든,
신전에 가는 사람들을 두고 내가 시비할 이유는 없습니다. 갈 테면 가라지요. 아시다시피 나이
지긋한 분들은 상징을 종교로 만들어 놓고 이 종교를 위해서라면 다투고, 싸우고,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은 거기 없어요, 신은 절대 상징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상징이나, 신상을 예배하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은 종교일까요? 이건 좀 까다롭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데서 시작했습니다만, 이제
조금씩 멀리 나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종교냐... 기독교도는 이렇게 믿고, 힌두 교도는
저렇게 믿고, 회교도는 이런 식, 불교도는 저런 식으로 믿으면서도 이 모두가 스스로를 일컬어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들 모두에게 나름의 신전, 신들, 상징, 믿음이 있습니다. 이게
종교일까요? 신을, 라마를, 시타를, 이시와라(힌두교 신들)를, 그리고 그 밖의 신들을 믿으면 그게
종교일까요? 이런 믿음을 어디서 얻었던가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믿었으니까 믿는 게
아닌가요. 아니면 샹카다(일원론을 신봉하던 힌두 신학자)나 부처 같은 이의 말씀이라는 걸
읽고는 믿음을 얻어서 이걸 진짜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요. 여러분 중 대부분은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믿습니다. 그래서 다른 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그 내용을 단순 명쾌하게 찾아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의식은 종교가 아니고, 신전에 간다는 것도 종교가 아니며, 믿음 역시 종교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믿음은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갈려 나왔고, 저희들끼리도 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힌두
교도에게는 적이 많습니다. 저희들끼리 바라문이니 비바라문이니,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래서 적대 의식과 분열과 파괴를 조장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종교일까요? 여러분이 정말 창을 말끔히 닦았다면-이것은 여러분이 의식의
참례를 그만 두었다는 뜻이며, 어떤 지도자나 구루를 따르는 일도 그만두었다는
뜻입니다.-여러분의 마음도 창처럼 말끔히 닦였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밖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밖이 카랑카랑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신상, 의식, 믿음, 상징,
모든 말씀, 만트람(신가)과 성구, 그리고 모든 형태의 두려움이 말끔하게 닦여 나갔다면,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참인 것, 시간을 초월한 것, 영원한 것뿐입니다. 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면 엄청난 통찰과 이해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경지는,
종교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매일매일 이 문제를 그 바닥까지 고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오직 이런 사람만이 참 종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입에
발린 말이나 지껄이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의 예배 용품, 그들이 몸에 걸치는 법의, 그들의
푸자, 그들이 울리는 종소리, 이 모든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미신에 다름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른바 종교라는 모든 것에 저항할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의 실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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