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客,
渙兮若?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澹兮其若海,
?兮若無止.]
옛날의 도를 터득한 선비는 미묘하고 통달했으며,
그의 심오한 경지를 잘 알 수가 없다.
잘 알 수가 없으므로, 억지로 다음같이 형용한다.
신중하게 망설이는 품은 마치 겨울에 강을 건너듯하고,
근신하고 경계하는 품은 마치 사방에서 엿보는 듯하고,
엄숙하고 장중한 몸가짐은 마치 자신이 빈객이나 된듯,
돈후하고 순박한 품은 마치 조탁하지 않은 원목 같고,
넓게 트이고 허정한 품은 마치 깊은 산골짜기 같고,
혼연하고 한결같은 품은 마치 혼탁한 물 같다.
[염담하고 조용한 품은 깊은 바다 같고,
표일하고 자유로운 품은 막히는 데가 없는 듯하다.]
敦能濁以靜之徐淸,
敦能安以動之徐生.
누가 능히 혼탁하고 동탕하는 것을 조용히 멈추어
점차로 맑게 할 수가 있으랴!
누가 능히 안정되고 허정한 것을 생동시켜서 점차로
살아나게 할 수가 있으랴!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而新成.
이러한 무위자연의 도를 몸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보름달같이 스스로 차고자 하지 않는다.
오직 스스로 차고자 하지 않으므로, 능히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이루어질 수가 있다.
도를 터득한 사람, 즉 도사(道士)의 품을 그렸다.
이러한 풍도는 장자(莊子)나 회남자(淮南子)가 말한
진인(眞人)과 비슷하다.
노자가 이상으로 삼은 성인 즉 <도를 터득하여 잘
해나가는 사람>은 바로 미묘현통(微妙玄通)하여
속세의 사람들이 쉽게 알고 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억지로 표현하면 여러 가지로 그려낼 수가
있다고 하여 앞에서와 같이 묘사했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현상세계에 살면서 현상세계를
초월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도아 더불어 <무위이
무불위 (無爲而 無不爲)>라 하겠다.
그러나 속인들은 형기(形氣)가 때묻어 더럽고,
이욕(利欲)에 심지(心志)가 엉키어 꽉 막혔다.
장자가 말했다. <기욕이 깊은 사람은 천기가 얕다
(嗜欲深者天機淺).
노자는 도의 체득자를 마지막으로 <누가 능히 혼탁한
것을 안정시켜 맑게 할 수가 있을 것이며, 누가 능히
조용히 안정된 것을 활동시켜 서서히 살아나게
할 수가 있으랴>고 하여 동탕하는 탁(濁) 즉
혼란과 난동을 허정(虛靜)으로 청정(淸正)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정과 정체를 끝없는 유동(流動)으로
생명을 부여해준다고 했다. 이런 경지는 바로
만물을 소리없이 <생육화성>하는 자연이다.
노자의 이상적 선비는 바로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차고자 하지 않는다.
하늘같이 언제나 텅 비어 있다. 텅 비어 있으므로
아무리 낡고 오래되어도 다시 새로운 생명을 이룩할
수가 있다. 즉 유한한 현상계를 초월한 무한한
영생자(永生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