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

贊 玄

별관신사 2014. 7. 19. 06:15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夷)라 하고,
귀로 들어도 들을 수가 없으므로 희(希)하 하고,
손으로 쳐도 칠 수가 없으므로 미(微)라 한다.
도는 이들 셋으로는 구명할 수가 없는 것이며, 이들
셋을 합쳐서 하나로 한 것이다.

其上不?,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도는 위에서 밝게 나타나지 않지만 아래에서는
어둡지 않고, 한정없이 퍼지고 작용하여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도는 결국 다시 무의 상태로 복귀 한다.
그러므로 도를 형상(形狀)없는 형상이라 하고 또
물체 없는 형상(形象)이라고도 한다.
즉 도를 <황홀>한 것이라 하겠다.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도는 앞에서 마주보아도 그 머리나 시작을 볼 수가 없고,
뒤쫓아 보아도 꼬리나 끝을 볼 수가 없다.

執古之道, 以御令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도는 예부터의 모든 진리를 파악해가지고 오늘의
현상세계를 주재하고 있다.
또 도는 우주의 근원을 알고 있으므로 모든 도리의
근본이라고 부른다.



제1장과 제 25장과 같이 도의 본체를 설명하는 대표적 말이다.
도는 인간의 감각적 인지를 초월한 존재다. 따라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또 만져볼 수도 없는 형이상적 실존체다.
따라서 이를 <이 · 희 · 미(夷希微)>라고 이름지어 표상한다.
그러나 도의 실체는 사람의 명칭과는 일치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로 이들 셋으로 구명될 수는 없다. 굳이 구명하자면
이들 셋을 혼합하여 하나로 만든 존재, 즉 이들 셋의
혼연일체다.

도는 이렇듯 혼돈하고 걷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세계에는 어디나 나타나고 끝없이 작용한다.
따라서 <도는 위에서 밝게 나타나지 않지만 아래에서는

어둡지 않고, 한정없이 퍼지고 작용하여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라고 한다. 그러나 도는 항상 무에 복귀한다. 그러기에 도는
한마디로 <황홀>하다고 하겠다.

또 도는 우주와 더불어 무궁무진한 존재이며 또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는 태고 때부터 모든 진리와 도리를 파악하고 모든
현상계를 주재하는 주재자이기도 하다. 동시에 도만이 모든
기원을 알고 있다. 따라서 도를 모든 도리의 근본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는 결국 무형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도는 우주를 영구히 주재할 수가 있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그리스도교의 신과 같다. 다만 노자의 경우
그것을 인격적 존재로 보지 않은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노자는 <도는 결국 다시 무의 상태로 복귀한다>라 했다.

이것은 도가 항상 무에 복귀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람이 신에게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노자는 유나 삶에서 도는 것을 보지 않고 무나 죽음에서
내다보고자 한다. 유나 삶은 유한하다. 그러므로 아주 클
수도 업고 영원하게 뻗을 수도 없다. 무나 죽음은 무한하다.
따라서 끝없이 뻗고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높이는 영생, 하늘에서의 영원한 삶과
일맥 통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은 현실적 유를
천당에서 연장시켜 영생하고자 하지만, 노자의 경우는
현세적 유를 부정하고 그와 대립되는 무에서 영생을 얻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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