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질문은.

별관신사 2015. 8. 10. 05:02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질문은, 마음이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에 살 수 있는가? 이다. 그것은
공포가 없는 마음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사고, 기억, 시간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는데 있어서 머리로만, 말로만 이해하지 않고

가슴으로, 마음으로, 내장으로 이해할 때, 당신은 공포로부터 자유로와질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마음은 공포를 낳는 법 없이 생각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은, 기억과 마찬가지로, 물론 나날의 삶에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거나

직업을 수행하는 등의 일을 위한 도구일 따름이다. 생각은 기억에 대한 반응인데 기억은 체험,
지식, 전통, 시간을 통해 쌓여온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기억의 배경으로부터 우리는
대응하며 이 대응이 생각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어떤 수준에서는 필수의 것이지만 생각이

쾌락뿐만 아니라 공포를 낳으면서 스스로를 심리적으로 미래와 과거로 투영할 때, 마음은
무디어지며 따라서 나태가 불가피해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묻는다. <왜, 왜, 왜 나는, 그러한 생각이 공포를 낳는지 알면서, 쾌락과

고통에 의거해 미래와 과거에 관해 생각하는가? 공포가 사라지기 위해 심리적으로 생각을
중단할 수 없는가?>
생각의 기능 중의 하나는 항상 무엇으로 점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계속 점유되어 있기를 바라며 그러므로써 우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비어 있는 걸 두려워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포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의식상으로 당신은 당신의 공포들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마음의 좀더 깊은 곳에서 당신은

그것들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숨겨져 있고 은밀한 공포들을 발견하려고
하는가? 공포란 의식적인 것과 잠재의식적인 것으로 나뉘는 것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전문가, 심리학자, 분석가들은 공포를 심리적인 것과 표피적인 것으로 나누었는데,

그러나 당신이 심리학자의 말이나 내가 말하는 것을 따른다면, 당신은 우리의 이론, 우리의
도그마, 우리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지, 당신 자신을 이해하는 게 아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프로이트나 융 또는 나에 의해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론은 도대체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물어야 할 것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이다-공포는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으로
나뉘는가? 아니면 당신이 다른 형태들로 번역하는 공포만이 있는가? 오직 하나의 욕망만이
있다-즉 욕망만이 있다. 당신이 욕망한다. 욕망의 대상들은 바뀌지만, 욕망은 언제나 똑같다.

이와 비슷하게 공포만이 있다. 당신은 여러 가지 일들을 두려워하지만 오직 하나의 공포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