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만일 당신이 폭력의 중지를 원하고, 전쟁의 중단을 원한다면, 당신은 얼마나 많은
활력을 그것에 줄 수 있고 얼마나 많은 당신 자신을 줄 수 있는가? 당신의 아이들이 살해되고
당신의 아들들이 군대에 가서 싸우다가 살해되는 게 당신한테 중요하지 않은가? 걱정이
안되는가? 세상에 그게 당신의 관심거리가 아니라면 무엇이 관심거리인가? 당신의 돈을
지키는 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거? 환각제를 먹는 거? 당신 속에 있는 이 폭력이 당신의
아이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걸 당신은 모르는가? 아니면 당신은 그걸 다만 어떤 추상으로
보는가?
그건 그렇고, 만일 당신이 흥미가 있다면, 발견하기 위해 당신의 온 마음을 바쳐 유의해라.
다만 뒷전에 물러앉아서 <어디, 그것에 대한 모든 걸 우리한테 말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비난이나 정당화가 들어 있는 눈으로는 분노도 폭력도 볼 수
없으며, 또 폭력이 당신에게 화급한 문제가 아니라면 당신은 그 두가지(비난과 정당화)를
제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우선 배워야 한다-분노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하고
남편 보는 법을 알아야 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치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당신이 왜 객관적이지 못한지를 알아야 하며, 당신이 왜 비난하거나
변명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이 비난하거나 정당화하는 이유가 그것들(비난과
정당화)이 당신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회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하고,
독일인, 인도인, 니그로, 미국인이라는 제약과 그 제약으로 인해 무디어진 마음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근본적인 걸 알고 발견하기 위해서 당신은 깊이 들어가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이 둔한 도구, 무딘 도구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그 도구를 예리하게 하는 일인데, 도구란 곧 마음이다-그
모든 정당화와 비난에 의해 둔하게 된 마음, 당신의 마음이 바늘처럼 예리하고 다이어몬드처럼
단단할 때에만 당신은 깊이 파고 들 수 있다.
뒷전에 물러 앉아 <어떻게 나는 그런 마음을 얻을 수 있나?>하고 묻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당신은 마치 당신이 다음 끼니를 원하듯이 그걸 원해야 하며, 또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무디고 어리석게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당신은
볼 수 있고, 탐구할 수 있고, 뚫고 들어갈 수 있고 그래서 아마 모든 문제를 완전히 아는
상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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