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나는 변하기를 바란다, 방법을 가르쳐 달라

별관신사 2014. 10. 8. 05:04

<나는 변하기를 바란다, 방법을 가르쳐 달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일견 매우 진지하고
열성 있게 보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 속에 질서를 가져다 줄 권위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가 내적 질서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밖으로부터 부과된

질서는 언제나 무질서를 낳는다. 당신은 이와 같은 진실을 지적으로 알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실제로 적용해서 당신의 마음이 더 이상 어떤 권위도 마련하지 않을
수 있는지-말하자면 책의 권위, 선생, 아내나 남편, 부모, 친구 또는 사회 등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지?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떤 판에 박은 방식의 틀안에서
기능해왔기 때문인데, 그 방식은 이데올로기나 권위가 된다. 그러나 당신이 <나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새로운 권위를 설정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당신은

귄위와 영원히 결별한다.
위의 문제를 다시 한번 분명히 얘기해보자. 나는 내가 내존재의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전통에도 의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전통은 이렇게 엄청난 게으름과 수락과 순종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나는 변화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그리고 무엇에도 도움을 바랄 수 없다-가령 어떤 선생, 어떤 신, 어떤 신념,
어떤 체계, 어떤 외적 압력이나 영향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음엔

어떤 일이 생기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모든 권위를 거부할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이

여러 세기 동안 지녀오던 그릇된 것을 거부할 때, 당신이 어떤 종류의 짐도 벗어던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은 더 많은 힘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는가? 당신은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추진력, 더 큰 강도와 생명력을 갖는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 짐을 벗어 던지지 않은 것이며, 귄위의 죽은 무게를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벗어 던졌고 그 속에서는 전혀 두려움-실수에 대한 두려움, 옳은 일

혹은 나쁜 일을 하는데 대한 두려움-이 없는 그런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면, 그 에너지
자체가 변화 아니겠는가? 우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면서도 그것을 공포 때문에
무산시켜버리는데 그러나 모든 형태의 공포를 던져버리므로서 그런 에너지가 생기면, 그

에너지 자체가 근본적인 내적 혁명을 낳는다. 당신은 그것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당신은 혼자 남게 되며, 이것이, 이 모든 것에 관해 아주 진지한 한 사람이
존재하는 실상이다. 그리고 당신은 더 이상 누구한테도 혹은 어떤 것에게도 도움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이미 발견을 위해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자유가 있으면
에너지가 있다. 또 자유가 있으면 그것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다. 자유는 저항과
완전히 다르다. 자유가 있을 때 거기엔 잘한다든가 못한다는 따위의 일이 없다. 당신은

자유로우며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거기엔 공포가 없으며, 두려움
없는 마음은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이 있으면 그것은 그것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