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

노자의삶과사상.

별관신사 2012. 11. 2. 01:48

제가 아는대로 노자의 무위자연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제 38 장 “상덕과 하덕”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상덕은 덕이라고 하지 않는지라 이로써 덕이 있으며, 하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지라 이로써 덕이 없다. 상덕은 무위이므로 작위가 없으며, 하덕은 유위이므로 작위가 있다. (생략)”

제가 알기에 덕(德)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마음으로 베푸는 선행(善行)이자 남을 이해하는 너그러운 포용력”을 의미합니다. 억지로 또는 인위적으로 덕을 베푸는 것은 올바른 덕이 아닙니다. 아무런 마음을 내지 않고 물과 같이 담담한 마음으로 덕을 베풀어야 그것이 진실된 덕입니다. 그러한 진실된 덕을 무위의 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상덕은 무위이고 하덕은 유위입니다. 상덕이란 높은 덕을 하덕이란 낮은 덕을 의미합니다. 이로움을 구하고자 남에게 덕을 베풀거나 남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마음을 내면서 덕을 베푸는 것을 인위적인 덕이라고 하여 하덕에 속하고 유위의 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아무 마음없이 무심(無心)한 마음의 상태로 베풀어야 하고 덕을 닦아야 합니다. 그것이 상덕이요 무위의 덕입니다. 하고자 하는 바를 없애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을 내서는 안되고 생각이 없이 베풀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불교에서는 삼매(三昧)에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삼매에 들지 않고서는 무위의 덕을 행할 수 없습니다. 노자는 이러한 불교의 삼매를 현묘의 도라고 이야기합니다. 도(道)란 밝고 밝아 더 이상 밝을 수 없을 정도로 밝은 상태를 의미하고 이렇게 밝은 상태에서 덕을 베푸는 것을 무위의 덕이라고 합니다. 무위라는 것은 행하고자하는 바를 마음으로라도 나타내지 않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구스타프 카를 융 박사에 의하면 무의식에 의한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불교의 유식학에 의하면 아뢰야식에 의핸 행위를 말합니다.

“나”라고 하는 주체가 탈각되고 무아(無我)적인 상태에서 행하는 베품과 덕이 바로 무위의 덕인 것입니다. 관념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초극하는 것이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말하는데, 노자는 이를 텅빔의 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듯 합니다. 텅빔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구절이 노자의 도덕경에 있습니다. 텅빔이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을 뜻합니다. 마음이 텅 비워지면 공체험을 하게 되고 그것이 해탈이요 삼매로 들어가며 무아를 얻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무위의 행을 하게 되고 참된 이타행과 보살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머무는 바 없이 내라는 불교의 금강경(金剛經) 구절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자의 무위사상은 어떠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은 상태에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집착을 일으키게 되고 끄달림과 치우침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자신이 베풀었다는 관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관념을 타파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고 도(道)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노자는 바른 도는 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불교의 교주이신 부처님께서는 도는 무량광이라고 설파하셨습니다. 노자는 무위를 주장하였고 부처님께서는 무아를 주창하셨습니다. 무위는 수행자의 행위의 규범이자 도리이지만 무아는 수행자의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까지가 아라한의 경지입니다. 노자가 얻은 경지는 보살과 정도이며 부처님은 보살과를 넘어서 불과를 증위하신 분입니다. 노자가 이세상에 성현이 있다면 바로 인도에 계시는 부처님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참고로 불교를 이해하면 전세계 모든 철학과 종교를 모두 통달할 수 있습니다. 노자의 무위사상은 바로 불교의 무아사상과 일맥상통하며 삼매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비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범부중생에게는 노자의 가르침은 한낮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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