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당신은 그걸 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우리는, 그 문제에 아주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정말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걸 할 수 없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사물을 간단히 설명해 치우거나 아니면 똑바로 보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당신이 전적으로 볼 때 당신은 당신의 전주의력, 전존재, 당신의 눈, 귀,
신경 등 당신의 모든 것을 주게 될 것이다-완전한 자기포기를 수반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공포의 여지도, 모순의 여지도 없을 것이며, 그리하여 아무 갈등도 없게 될 것이다.
주의 attention는 집중 concentration과 같은 게 아니다. 집중은 배제이다. 전적인
앎인 주의는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말하는 바에 관해서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환경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즉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색깔들, 사람들,
나무들의 생김새, 구름, 물의 운동에 대해 알지 못한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다지도 관심을 갖는 이유요, 우리 자신의 작고 보잘 것 없는 문제들, 자신의 생각,
자신의 쾌락, 추구하는 것 및 야심-위의 것들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거니와-에 대해 몹시 마음을 쓰는 이유로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앎에 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한다. 언젠가 인도에서 나는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고 있었다. 운전사가 운전을
하고 나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뒷자리에는 세 신사가 앎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면서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그 순간 운전사가 한눈을 팔다가 양 한 마리를 치었고,
세 신사는 그것도 모르고 토론을 계속하고 있었다-그들이 양 한 마리를 치어 죽였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주의력의 결핍을 지적하면서 그 얘기를 하자 그들은 그랬었던가
하면서 크게 놀랐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가 그와 같다. 우리는 외적 사물과 내적 사물에 대해 알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한 마리 새의 아름다움, 파리 한 마리, 나뭇잎 하나, 혹은 여러 복합성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당신은 당신의 주의력 전부-이것이 앎이다-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당신이 관심을 가질 때에만 당신은 당신의 모든 주의력을 기울일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신이 참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러면 당신을 발견하기 위해
당신의 온 마음을 기울인다.
그러한 앎은 방 안에서 뱀과 더불어 사는 것과 같다-즉 당신은 그것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하고, 그것이 내는 가장 작은 소리에 대해서도 아주 민감하다. 그런 주의력의 상태가
온힘 total energy이다-그런 앎 속에서 당신 자신의 전체성이 한 순간에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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