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당신이 자기 자신을 아주 깊이 보았을 때

별관신사 2015. 7. 25. 18:56


당신이 자기 자신을 아주 깊이 보았을 때 당신은 더욱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더 깊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는 비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비교하면서
생각한다-깊고 얕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등등. 우리는 언제나 저울질하고 비교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얕다든가 깊다는 것 같은 상태가 있을까? 내가 <내 마음은 얕고, 작고,
좁고, 제한돼 있다>고 말할 때, 나는 그런 걸 모두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내가 당신의
마음-즉 보다 더 총명하고, 더 능력 있고, 더 지적이며, 더 기민한 당신의 마음과 내

마음을 비교했기 때문이다. 비교하지 않고 나의 작음을 알 수 있을까? 내가 배고플 때, 나는
이 배고픔은 하나의 관념이며, 기억이다.
만일 내가 항상 너와 대비해서 저울질하고, 너와 같이 되려고 싸운다면, 나는 내가 나

자신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환영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어떤 형태의
비교이든지 간에 그것은 더 큰 망상과 더 큰 불행으로 이끌 뿐이라는 점을 이해했을 때, 다시
말해서 마치 내가 나 자신을 분석하고, 자신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조금씩 보태고, 혹은 나와

나 바깥의 어떤 것-그것이 국가이든 구세주이든 아니면 이데올로기이든-을 동일시할 때,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오직 더 큰 순응과 따라서 더 큰 갈등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알 때,
나는 그것(비교)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그러면 내 마음은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래야 내 마음은 더 이상 더듬고, 찾고, 묻지 않는다. 이것은
내 마음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만족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런 마음이라야 환영을
갖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그런 마음은 그리하여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갈 수가 있다.

우리가 보통 살고 있는 차원, 괴로움인 나날의 삶, 쾌락과 공포는 마음을 제약하고, 마음의
본질을 제한하는 것이며, 그러한 고통과 쾌락 및 공포가 사라졌을 때(이것은 당신이 더 이상
기쁨을 갖지 않는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기쁨은 쾌락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마음은

갈등 없고, <다름>의 느낌이 없는 다른 차원에서 기능한다.
말로는 이 정도 밖에 할 수 없다-그 너머에 있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말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진술하고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어떤 말이나

설명도 문을 열지는 못한다. 문을 열어줄 것은 나날의 앎과 주의력이다-즉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걷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앎이 그것이다.
그것은 방을 소제하고 정돈해 두는 것과 같다. 방을 정돈해 두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중요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방은 정돈되어 있겠지만 그러나 정돈은
문이나 창을 열지 않을 것이다. 문을 여는 것은 당신의 의욕이나 욕망이 아니다. 당신은 필경
타자를 초대할 수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방을 정돈해 두는 것일 따름이며, 이것은

그것 자체로서 미덕이요, 그것이 가져올 바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제 정신으로,
이성적으로, 질서있게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당신이 다행하다면, 창은 열려서 미풍이
들어올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상태는 당신 스스로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그것을 주시하되
만들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편 들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음으로써-이것은
선택하지 않고 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선택 없는 앎으로 해서

혹시 문은 열릴는지 모르고 또 갈등도 시간도 없는 그 차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