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라즈니쉬와 그의명상글.

붓다는 억압도 없고 이상도 없는 삶의 길을 제시한다.

별관신사 2016. 5. 27. 13:00

그것이 그가 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는 천국에 대해 미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대가 매달릴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대로
부터 모든 것을 벗겨간다.  그대의 자아까지 벗겨간다. 그는 계속해서 벗겨가고

마침내 그대의 자아라는 개념 나 에고라는 개념까지 벗겨간다.  그리고 순수한
비어있음 만을 남겨둔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어주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취하는 법만을 안다.

우리는 계속해서 모든 것을 취한다. 나는 부인을 취한다. 나는 낮잠을 취한다.
나는 시험을 취한다. 이런 식으로 그대는 계속 취한다. 심지어 취할 수 없는
낮잠까지 취한다. 그대는 잠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잠은 그대가 자신을

내버릴 때만 온다. 그대는 심지어 부인 남편까지 취한다.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부인은 재산이 아니다. 집을 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떻게 부인이나
남편을 취한단 말인가? 언어는 우리의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우리는 내주는

법을 모른다. 어떻게 포기하는지 어떻게 놓는지를 모른다. 어떻게 모든 일이
그대로 일어나도록 방임하는지 모른다. 붓다는 모든 이상을 벗겨간다. 미래
전체를 앗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내어주기 힘든 마지막 것 까지 앗아

간다. 그는 그대의 자아까지 앗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순수한 비어있음 때묻지
않은 순결한 비어있음 만을 남겨둔다. 순결한 비어있음을 그는 니르바나 (열반)
라고 부른다. 니르바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다. 그대의 순수한 비어있음

이 곧 니르바나이다. 그대가 지금까지 긁어모은 모든 것을 버릴 때 더이상 아무
것도 쌓아두지 않을 때 더이상 인색하거나 집착하지 않을 때 그때에 돌연 비어
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그 공간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하꾸인은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붓다이다. 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비어있는 공산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그대는 온갖 잡동사니을 긁어 모았다. 그래서 그 비어 있는 공간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물건을 집안에 쌓아두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그때에 그대는 빈 공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공간이 남아
있지 않다. 마침내 집안에서 움직이기조차 어려워지는 날이 온다. 공간이
없기 때문에 사는 것 조차 어려워진다. 그러나 공간은 아무데로도 가지

않았다. 그대는 너무 많은 가구들을 쌓아 놓았다. 텔레비젼과 라디오 전축
피아노 그 밖의 온갖 물건들을 가득 들여 놓았다. 그러나 공간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그 공간은 가구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 공간은 단 한순간도 방을 떠난적이 없다. 그대 내면의 비어있는 공간
또한 마친가지 이다. 그대의 니르바나 그대의 무 또한 그와 다름없다.

    오쇼의 금강경 강의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