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어떤 지위를 갖기를
갈망한다. 사회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존경할 만한 지위에 있는 시민은 아주 정중하게
취급되고, 반면에 아무 지위도 없는 사람은 천대 받는다. 세상 사람은 누구나, 사회 속에서든
가정에서든 어떤 지위를 원하고 또는 신의 오른 팔 위에 앉기를 원하며, 그리고 이 지위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건 아무 지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단상에 앉지 않으면 안된다. 속으로 우리는 불행과 비참의
소용돌이이며 그렇기 때문에 바깥으로 대단한 인물로 여겨지는 것은 아주 만족스러운 일이다.
이 지위, 위세, 권력을 얻으려는 갈망, 사회에 의해 뛰어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갈망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바램이며, 이 지배에의 욕구는 공격의 한 형태이다. 자기의
성자다움에 비추어 어떤 지위를 찾는 성자는 농가의 마당에서 부리로 쪼고 있는 닭과
마찬가지로 공격적이다. 그러면 이 공격성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건 공포이다. 그렇지 않은가?
공포는 삶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중의 하나이다. 공포에 붙잡힌 마음은 혼란 속에, 갈등
속에 살며, 따라서 난폭하고, 뒤틀리고, 공격적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그것 자체의 사고의
틀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며, 이것이 위선을 키운다. 우리가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한,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고 모든 종류의 신을 만들어내는 일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어둠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듯이, 두려움을 낳는 경쟁적 교육을 받으면서 썩고 우매한 사회에서 살
때, 우리는 모두 어떤 종류의 공포에 눌려 있게 되며, 그리고 공포는 우리의 나날을
비뚤어지고 뒤틀리고 무디게 하는 무서운 것이다.
육체적 공포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동물들로부터 물려받은 반응이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심리적 공포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뿌리 깊은 심리적 공포를 이해하면
동물적 공포와 맞설 수 있는데 비해, 동물적 공포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공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것에 관해서 두려워한다. 추상적인 공포란 없으며, 공포는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공포를 아는가-직업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 충분한
음식과 돈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이웃과 대중이 당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성공 못하면 어쩌나, 사회에서의 지위를 잃으면 어쩌나, 조롱당하고 경멸당하면
어쩌나-고통과 병에 대한 공포, 지배에 대한, 사랑이 무언지 모르거나 사랑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내나 아이들을 잃는 것에 대한, 죽음에 대한, 죽음과도 같은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지독한 권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신앙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이 모든 것과 그외의 수많은
공포들-당신은 당신 자신만의 공포를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들 공포에 관해 흔히 무엇을
하는가?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거나-그렇지 않은가-그것들을 은폐하기 위한 관념들과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러나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그것을 증가시키는 것일 따름이다.
공포의 주요 원인중의 하나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직면하기를 원치 않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공포 자체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포를 없애기 위해 발전시켜온 도피의
네트워크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마음이-여기에는 두뇌도 포함되는데-공포를
극복하려 하고, 그걸 억누르려 하고, 길들이려 하고, 통어하려 하고, 어떤 다른 개념들로
번역하려 한다면, 거기엔 알력이 있고 갈등이 있으며, 그리고 이 갈등은 정력 낭비이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공포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공포 자체로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 공포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지 내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삶을 영위해간다. 나는 어떤 패턴 속에서 생각한다. 나는 어떤 믿음과
도그마를 갖고 있으며 그 속에 내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실존의 패턴이 방해 받는
걸 원치 않는다. 방해 받지 않기를 바라는 까닭은 그 방해가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를 낳기
때문이며 그리고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내진다면, 내가 향해서 가고 있는 바 사물의 상태를 상당히 확실한 것으로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뇌세포들은 어떤 양식을 만들어 냈으며 그 뇌세포들은 불확실할는지도
모를 다른 양식 만들기를 거부한다. 확실한 것으로부터 불확실한 것에로 가는 운동이 내가
말하는 공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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