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먼저 나는 삶에 있어서의 당신의 기본적이고

별관신사 2015. 8. 1. 02:29

먼저 나는 삶에 있어서의 당신의 기본적이고 영속적인 관심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모든
비뚤어진 대답은 옆으로 제쳐놓고 이 문제를 똑바로 정직하게 다룰 때,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아는가?

그것은 당신 자신 아닌가? 어떻든 이것이, 우리가 진실하게 대답할 때, 대개 하는 대답이다.
나는 나의 발전, 나의 직업, 내 가족, 내가 사는 작은 구석, 더 나은 자리를 얻는 것, 더 큰
명망, 더 강한 권력, 다른 사람들에 대한 더 많은 지배 등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가 우선 갖고 있는 관심이라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논리적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내>가 우선 아닌가?
어떤 사람은 우리 자신들에게 우선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적절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이 퍽 드물다는 것을 제외하면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만일 우리가 인정을 하면, 우리는 어느 편이냐 하면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니 그게 그렇다는 것이다-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우선 관심을 갖고

있으며, 여러 이념적, 전통적 이유 때문에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생각하는
바는 대중이 틀린다. 왜 그것의 그릇됨이라는 요인을 도입하는가? 그건 하나의

관념이요, 개념이다. 엄연한 사실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영속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아마 당신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것보다는 남을 돕는 것이 더 만족스럽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자리염려이다. 만일 남을 돕는 것이
당신에게 더 큰 만족감을 준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왜 이념적 개념을 그 속에 끌어들이는가? 왜 2중의 생각을 하는가? 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만족이다-그게 성이든, 남을 돕는 것이든 아니면 성자나 과학자 혹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든지간에>라고 말 못하는가? 그것은 같은 과정이 아닌가? 교묘하고 명백한
여러 가지 방법의 만족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원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주 대단하게 만족시켜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궁극적인 만족은 자기실현이라는 개인 특유의 관념이다. 우리가 정말 찾는 것은 전혀 불만족이
없는 만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