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우리 자신에 관한 앎-단순성과 겸손-제약

별관신사 2014. 8. 24. 05:07

당신이 당신 자신에 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 단지 나나 다른
사람이 당신한테 그게 중요하다고 말해줬기 때문이라면, 우리 사이의 의사소통은 끝장이
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들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데 동의한다면, 당신과 나는 아주 각별한 관계를 갖게 되며,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주의 깊고 총명한 질문을 가지고 더불어 탐험을 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즉 나는 나 자신을 권위로 내세우지 않는다. 나는

당신에게 가르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실재에 이르는 아무런 새로운 철학도, 새로운
체계도, 새로운 길도 없다. 진리로 가는 길 이외에 실재에 이르는 길이란 없다. 모든 권위는
가장 파괴적이며 나쁜 것이다. 지도자는 추종자를 파괴하고 추종자는 지도자를 파괴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선생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당신 자신의 생도가 되어야 한다. 당신은
인간이 가치 있고 필요하다고 받아들인 모든 것을 질문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따르지 않으면 당신은 매우 외롭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외로우라. 왜 당신은 외로운 것을 두려워하는가? 그 이유은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자신과 대면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당신이 공허하고, 무디고, 바보스럽고, 추하고,
죄 있고, 불안하다는 사실-즉 왜소하고, 겉 꾸미고, 들은 풍월로 사는 중고의 실재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찾는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를 세상의 다른 것들로부터 고립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불건강한 과정이 아니다. 이 세계의 인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날의 문제들에

얽매여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개인과 집단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는 않는다. 그것은 실재하는 사실이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에 다름 아닌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니 이부분과 전체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말자.
나는 나 자신의 자아의 전체 범위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의식이다.
그리고 마음이 이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을 넘어설 때만 나는 나 자신에게 온전한 빛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인가? 여기 내가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나 자신을 탐구하고, 자신을 관찰하며, 내 속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것인가? 나는 자신을 관계 속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삶이 관계이기
때문이다. 구석에 앉아서 자기에 관해 명상하는 건 쓸데 없는 노릇이다. 나는 나 혼자 있을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 사물들, 생각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내적 사물과

마찬가지로 바깥의 사물 및 사람들과의 관계를 탐구해야만 나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모든 다른 형태의 이해는 단지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추상 속에서는 자기를 탐구할 수 없다.
나는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현존 혹은 현실성 속에서 나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즉 내가 바라는 바의 나가 아니라 지금 있는 바의 나를 탐구하지 않은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