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기원전 14세기 중엽에 이집트를 다스렸던 왕이다.
즉위할 때의 이름은 아멘 호테프4세였으나 태양신 아톤을
숭배하는 일신교를 창시하면서 아톤신의 마음에 드는자를
뜻하는 아크나톤으로 개명했다. 아크나톤을 나타내는
조각상들은 오늘날까지 보전된것이 드물다.
그것들을 보면 아크나톤의 신체적 특징은 후리후리한 키
길쭉한 얼굴 가늘고 긴 눈 차분한 눈매 도톰한 입술 뽀죡한
턱 관모양의 수염등으로 나타난다. 파라오들의 전통적인
조각상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어떤 조각상에는 아크나톤의 옆에 왕비 네페르티티가
파라오의 관을 쓴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아크나톤이
왕비에게 자기와 대등한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크나톤의 개혁의지는 어쩌면 네페르티티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크나톤은 신관들의 과도한 권력을 축소
하고 이집트 사람들의 낡은 전통을 혁파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이집트의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던
숫양의 머리의 아멘라를 신들의 왕이라는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게 했다.
이것은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넘어가는 종교혁명인 동시에
아멘라를 숭배하는 신관들을 권력에서 배제하기 위한
정치개혁이기도 했다. 이크나톤은 아멘 신의 도시이자
신관들의 아성인 테베를 벗어나기 위해 오늘날의 텔 아마르나
에 아케트 아톤 즉 아톤의 지평선이라는 새 수도를 건설했다.
아톤이라는 말은 빛과 열기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정의 또는
우주에 가득퍼져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뜻하기도 한다.
아크나톤은 누비아 인과 히브리인을 관직에 등용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썻다.
아톤은 어쩌면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던 신의 호칭가운데
하나인 아도나이가 변한 아돈에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새 소를 꾸미는데 참여한 예술가들은 아크나톤의 뜻을
받들어 사실주의 작풍을 개척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일상적 삶이나 가정생활을 작품들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주로 전쟁이나 종교에서 소재를 취했던 기존의
예술과는 아주 다른 양식이였다. 아크나톤은 신에게 바치는
신전도 짓게 했다. 이 신전은 중심축으로 들어온 햇살이
건물내부를 환히 비추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가 재위하던 시절 이집트왕국은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에서
터키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다기 이민족들의 침범이 잦아지면서 영토가 조금씩
잘려 나갔다. 하지만 아크나톤은 전쟁을 싫어하는왕이였다.
그의 궁궐에서 발견된 이른바 아마르문서에서는 비블로스의
제후 리브하다가 그에게 보낸 서신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서신들에 따르면 리브하다는 비블로스가 아무르족의 공격을
받고있다면서 여러차례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크나톤은
수도를 건설하고 왕국을 다스리는 일에 전념하느라고 그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아리아인의 일파인 히타이트족이 북부의
도시들을 공격했을 때도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마스와
카데시와 카트나가 침락자의 수중에 들어가고 나서야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하지만 이미 때를 놓친 뒤였다.
아몬의 신관들은 군사분야의 그런 실패를 빌미로 아크나톤의
일신교를 이단으로 몰았다. 급기야는 한 장군의 주도아래 군사
정변이 일어났고 아크나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왕비 네페르티티는 아멘라를 주신으로 삼는 다신교로 다시
개종해야 했다. 새 수도는 폐허가 되었고 이단적인 파라오를
나타낸 그림과 조각상은 거의 파괴되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