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정돈된 사고

별관신사 2014. 3. 13. 06:27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습니다만, 혹시 우리들 대부분이 왜들 이렇게 단정하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지요? 왜 옷차림, 태도, 생각, 일하는 방법 같은 게 이렇게 단정치
못할까요? 왜 우리는 걸핏하면 시간을 어기고, 자주 남의 입장을 무시해 버리곤 하는 것이지요?

매사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옷차림, 우리들의 사고,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걸음걸이, 우리보다 운이 덜 좋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강요한 바도 없고 계획한 바도, 의도한 바도 없는데 무엇이 이 질서라는,

기묘한 것을 부여했을까요?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질서라고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내가 말하는 질서, 혹은 정돈된 상태란, 담담하게 앉아 있는 상태, 서둘지 않고찬찬히 먹는 상태, 느긋하면서도 정확한 상태, 생각이 맑되 그 미치는 범위가 넓은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삶에 이러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만일 우리가 교육을 통해 만사에 질서를 부여하는 요인을 찾아 낼 수 있다면 그것 참
굉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질서란 덕성에서만 생겨납니다. 여러분이 작은 일에는 물론 매사에 덕성스럽지 못하면
여러분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혼돈의 와중에 떨어지고 만다 그 말입니다.
덕성스럽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덕성스러우면 생각이 정확하고,

온 삶, 온 존재에 질서가 잡힙니다. 이것이 덕성의 기능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부러 덕성스러워 '보겠다'라고 애쓰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스스로를
친절하고, 능률적이고,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으로 훈련시킨다면, 남을 해코지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고, 선량한 인간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데 우리 정력을
소모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한 노력이 존경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나날이 지속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런 우리는 덕성스러운 사람일 수 없습니다.

꽃을 자세히 관찰해 본 적이 있는지요? 꽃잎 한 장 한 장이 그렇게 정확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도 꽃은 무척 부드럽고 냄새는 아주 향기롭습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질서 정연한 상태에 이르려고 노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생활이 정확해질 수는 있습니
다.

그러나 부드러울 수는 없습니다. 꽃의 예에서 보았듯이 부드러움이라는 것은, 부드러워지려고
애쓰지 않을 때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어려운 일은, 자의적인 노력 없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폭넓어지는 일입니다.

보셨지요? 질서 정연한 상태, 깔끔한 상태에 이르려는 노력은 별 힘을 쓰지 못합니다. 내가
일부러 내 방을 정돈하려고 한다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는 데 신경을 쓴다면, 발로 딛는 곳,
손을 대는 곳 등등 늘 나 자신의 행동을 관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르긴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이고 남들에게도 견딜 수 없이 지겨운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늘 무엇인가더 나은 존재를 획득하려는 사람, 생각을 늘 주의깊게 가다듬는 사람, 이것과 저것을 주도
면밀하게 재어서 생각하는 사람, 정말 피곤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아주 깔끔하고 분명한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말을 정확하게 골라 쓰는 사람, 늘 주의깊고 사려깊은 사람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삶의 창조적인 즐거움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뭡니까? 어떻게 하면 삶의 창조적인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느낌이 미치는

바가 폭넓고, 생각하는 바가 트여 있고, 그러면서도 그 삶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질서 정연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 문제는 이거 아닙니까? 내가 생각하기로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사람이
못 됩니다. 우리는 사물을 그렇게 강렬하게는 느끼지 못하고, 온 마음 온 정신을 완전하게 어떤

사물에 쏟아 넣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득, 꼬리가 탐스럽고, 털빛이 아름다운 빨간 다람쥐
두 마리를 보았던 생각이 나는군요. 이 두 마리의 다람쥐는 근 10분간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
쫓고 쫓기면서 나무를 오르내리고 있었어요. 삶의 즐거움에 겨워서 그러는 거지요. 하지만 사물

을깊이 생각하지 않는한, 우리 삶에 정열을 기울이지 않으면 여러분이나 나는 그런 즐거움을 알지못합니다. 정열이라고 해서, 대단한 선행을 하겠다거나 무엇을 개혁하겠다는 정열이 아닙니다.

그저 사물을 강렬하게 느끼고자 하는 정열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고, 우리 전존재에 전반적인
혁명이 일어나야 비로소 이런 활기찬 정열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느낌이 깊지 못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아는지요? 선생님이나 부모님에
게저항해 본 적이 있는지요? 단순히 싫어서 하는 저항이 아닙니다. 어떠어떠한 일이 싫다는

깊으면서도 강렬한 느낌 때문에 하는 저항이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일에 대해 깊고 강렬한
느낌을 경험했다면, 바로 이 느낌이 이상한 방법을 통해 여러분의 삶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질서 정연함, 깔끔함, 생각의 분명함 같은 것은 그 자체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이러한 것들은, 예민한 사람, 깊이 느끼는 사람, 완벽한 내적 혁명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몫을 합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자가 타고 가는 자동차의

먼지로 얼굴을 더럽힌 거지에 대해 강렬한 느낌을 경험한다면, 여러분이 매사에 감수성이
예민하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감수성과 포용력이 여러분의 삶에 질서를, 덕성을
부여합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교육자와 학생이 두루 이해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나라에 사는 우리 역시 주의깊지도 못하고
어떤 사물을 깊이 느끼려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지적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도 많이 들었고 이론도 많이
배워서, 말하자면 아주 영리하다는 의미에서 피상적이라는 지적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상당한 차원에 이르기까지 계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본질이나 그 의미는 별것
이아닙니다.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본질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관념의 작

용에의한 행동이 아닙니다.
강렬하게 느껴야 하는 까닭-정열 및 분노의 느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을
주시하고, 함께 하고, 이 안에서 진실을 찾아내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억압만 하려고 들면서, "화를 내지 말아야지. 격한 감정에 휩쓸리지 말아야지, 그건
나쁘니까." 이 따위 소리나 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점차 어떤 관념에 갇혀 천박해져 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굉장히 영리해질 수도 있고, 백과 사전적인 지식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고 강렬한 느낌이라는 생명력이 없으면 삶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는 향기
없는 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젊은 시절에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알아야 나이들어서 진짜 혁명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혁명아라고 해서 어떤 이념이나
이론이나 서적을 선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의 혁명아, 완전한 인간의 길로 통하는

혁명아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과거에 오염될 소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의 마음은 참신하고 순수합니다. 따라서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의미를 놓칠 경우 여러분의 삶은 맥없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사회, 가족, 아내와 남편, 이론, 종교 혹은 정치 조직이 여러분은 압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시급하게 제대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의 선생님들이 여러분을 도와,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의 올가미를 풀어헤치게 하고,
여러분을 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기계가 아니라, 가슴에 노래를 간직한 인간, 따라서 행복하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키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