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지금 이 순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별관신사 2014. 11. 1. 03:48

내가 여기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현재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고 있고, 아무도 나를 위협하지 않으며 나에게서 뭔가를
빼앗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너머에는 마음의 심층이 있어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장차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있는 또 과거의 어떤 것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과거와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시간을 과거와 미래로
갈라 놓았다. 생각이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

혹은 <장래를 위해 준비해. 미래는 너한테 위험할는지도 몰라. 너는 지금 뭔가를 가졌지만
그걸 잃을 수도 있어. 너는 내일 죽을는지도 모르고, 네 마누라는 도망갈는지도 모르며, 네
직업을 잃을는지도 몰라. 너는 유명해지지 않을는지도 몰라. 너는 외로울는지도 몰라. 너는

내일이 확실하기를 바라고 있어.>
그러면 당신 자신의 독특한 공포를 생각해 보라. 그걸 바라보라. 그것에 대한 당신의 반응을
관찰하라. 당신은 아무런 도피의 움직임 없이, 정당화, 비난, 억압의 움직임 없이 그걸 바라볼

수 있는가? 당신은 그 공포의 원인이 되는 말 없이 그 공포를 바라볼 수 있는가? 예컨대
당신은 죽음의 공포를 일으키는 말 없이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가? 마치 사랑이라는 말이
그것 자체의 떨림, 그것 자체의 이미지를 갖고 있듯이 말 자체가 어떤 떨림을 가져온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죽음에 관해서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이미지, 당신이 본 수많은 죽음의
기억과 당신 스스로를 그 사건들에 연관시키는 것-즉 공포를 낳는 것은 이미지가 아닌가?
아니면 당신은 종말을 낳는 이미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이르는 것을 정말

두려워하는가? 죽음이라는 말이 당신의 공포의 원인인가 아니면 실제의 종말이 원인인가?
만일 당신의 공포가 말이나 기억 때문이라면 그건 전혀 공포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 보자-당신은 2년 전에 병을 앓았고, 그 병의 고통으로 기억은 남아 있으며,

그 기억은 이렇게 말한다. <조심해. 다시는 앓지 않도록.> 그래서 기억이 그 연상들과 함께
공포를 낳는데, 그러나 이건 전혀 공포가 아닌 것이, 실은 그 순간의 당신은 건강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생각이-생각이란 언제나 낡은 것인데, 왜냐하면 생각은 기억의 반응이고

기억은 언제나 낡은 것이기 때문이다-시간 속에서, 당신이 두렵다는 느낌-실제 사실이
아닌-을 낳는다. 실제 사실은 당신이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으로서 마음에 남아
있는 체험이 <조심해, 또 병 걸리지 않도록>이라는 생각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한 가지의 공포를 낳는다는 걸 안다. 그러나 도대체 생각을 떠나서
공포가 있는가? 공포는 언제나 생각의 결과라면, 어떤 다른 형태의 공포가 있는가?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즉 시간 속에서, 내일이나 모레 일어날 어떤 것을 두려워한다. 지금 있는

것과 앞으로 있을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생각은 그 상태를 체험했다-즉 죽음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은 <나는 죽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생각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낳는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떤 공포가 있는가?

공포는 생각의 결과인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이란 언제나 옛것이기 때문에, 공포는 언제나
옛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새로운 생각이란 없다. 새롭다는 걸 알면, 그것은 이미 옛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낡은 것의 되풀이이다-즉 미래 속으로 투사했었던 생각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생각은 공포에 책임이 있다. 그래서 당신은 스스로 그걸 알 수 있다.
당신이 어떤 것과 즉각적으로 마주칠 때 거기엔 공포가 없다. 생각이 스며들 때에만 공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