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윤리학)

쾌락

별관신사 2014. 5. 27. 06:42

쾌락과 고통의 고구(考究)는 우리가 반드시 고찰해야만 할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덕과 악덕은 고통 및 쾌락에 관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은 쾌락을 수반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쾌락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존

재한다. 즉, 어떤 이들은 선과 쾌락은 같은 것이 아니므로, 어떤 쾌락이나 선이 아니다 -그 자체에 있어서나 또는 수반적으로나- 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약간의 쾌락은 좋은 것이지만 대부분의 쾌락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셋째로 모든 쾌락이 선이기는 하지만 쾌락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일 수는 없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쾌락은 선이 아니고, 또 최고선도 아니라는 귀결이 반드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쾌락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선이다. 설사 어떤 쾌락이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어떤 쾌락이 최고선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마치 인식 가운데에는 나쁜 인식도 있으나 어떤 인식은 최고선이

될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쾌락이 선이 아니라고 하면 행복한 사람이 즐거운(즉, 쾌락 있는)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쾌락이 선이 아니고 행복한 사람이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는 수도 있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그에게 쾌락이 필요하겠는가? 쾌락이 선도 악도 아니

라면, 고통도 역시 선도 악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고통을 피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만일 선한 사람의 활동이 더 즐거운 것이 아니라면, 그의 생활 역시 다른 어느 사람의 생활보다도 더 즐거운 것이 못 될 것이다.

육체적인 여러 가지 선에는 지나침이 있을 수 있고, 또 나쁜 사람은 필수적인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나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그것을 추구함으로써 나쁘다(누구나 어느 모로는 맛있는 음식이나 술이나 성교를 좋아하지만, 누구나가 알맞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의 경

우에는 사정이 이와 반대이다. 왜냐하면 그는 고통의 과도를 피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이면 덮어놓고 피하기 때문이다. 사실 쾌락의 과도에 반대되는 것은 고통만이 아닌데, 이런 과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도 쾌락의 과도가 아니면 고통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육체적 쾌락이 가장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쾌락이 고통을 몰아내며 격렬한 것으로서 다른 쾌락에서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짐승들과 어린 아이들은 좋지 않은 종류의 쾌락을 추구하고, 사려있는 사람은 이런 것들로부터 조

용히 해탈하여 고통 없는 상태에 이르기를 추구한다. 즉 짐승들과 어린 아이들이 추구하는 쾌락은 욕정과 쾌락이 따르는 쾌락, 즉 육체적 쾌락(바로 이 쾌락이 그런 성질을 띤 것이기에 말이다)과 과도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로 방종한 사람으로 하여금 방종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들이다. 이런 까닭에 절제 있는 사람은 이런 쾌락을 피한다. 그는 또한 자기 나름의 쾌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윤리학)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  (0) 2014.05.28
우애(친애)와 친구  (0) 2014.05.28
자제와 자제하지 못함  (0) 2014.05.26
이성  (0) 2014.05.25
지혜  (0) 2014.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