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의 부정이 요구됨이 아니라 합리적 의식에 대한
개성의 종속으로 요구된다.
그렇다. 인간이 그 합리적 의식의 요구를 느끼지 않고 그저 자아의
요구만을 느끼고 있다는 단언(斷言)은 우리들이 그것을 세게 하기 위해서
있는 이성을 모조리 이용해 온 우리들의 동물적 욕망이 우리들을
지배하고, 우리들로부터 우리들의 참된 인생을 가리워버렸다는 단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성한 악덕의 잡초가 참된 생활의 움돋이를 억눌러
무찔러 버린 형극이다.
개인의 최고 완성은 그 개성의 세련된 요구의 다면적(多面的) 발달이다.
대중의 행복은 저들에게 많은 요구가 있고 저들이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데에 있다. 인간의 행복은 그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이 다른 사람들의 스승으로서 여겨지는 사람들에 의하여 서슴지
않고 인정되어 왔으며, 또 현재도 인정되고 있는 이 때에, 이 세상에 어찌
그 이외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가르침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어찌 합리적 의식의 요구는
느끼지 않고, 그저 개인적 요구만을 느낀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 그들에게 그들의 이성이 남은 것 없이 그들의 육욕 증대(肉慾增大)를
위해서 지양되어 있거늘 어찌 이성의 요구를 느낄 수 있을까? 또 그러한
육욕이 그들의 전체 생활을 삼켜버리고 있거늘 어찌 그 요구를 부정할 수
있을까?
「개성을 부정함은 불가능하다」라고 이들은 흔히 고의적으로 문제를
변경시키려고 애써서, 개성은 이성에 따르는 것이라는 관념 대신에 개성의
부정이라는 관념을 바꾸어 놓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자연스럽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불가능하다」그러나 아무도 개성의 부정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인간에게 개성은 동물아에 대한 호흡, 혈액순환과 같은
것이다. 동물만이 어찌 혈액의 순환이 부정될 수 있었으리! 그러한 것은
입밖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그와 마찬 가지로 합리적 인간에게도 개성의
부정이라든가 하는 것은 입밖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개성은 합리적
인간에게는 혈액이 그의 동물아의 생존에 필수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명에 불가결한 조건이다.
개성은 동물아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요구라도 제출할 수 없으며, 또
제출하고 있지도 않다. 이들 요구를 제출하는 것은 그릇된 방향으로
지향된 이성, 즉 생활의 지도도 아니고 그 계발도 아니며, 개성의 육욕
조발(肉慾 早發)을 위해서 지향된 이성이다.
동물아의 요구는 항상 충족되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먹겠다든가,
무엇을 입겠다든가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요구는 인간이 만약 합리적 생활을 보내고 있다면 새나 꽃에
보장되어 있듯이 인간에게도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분별
있는 인간이라면 누가 개성의 안전에 의해서 생존의 불행을 덜 수
있다고들 믿는 자가 있을까?
인간의 생존 불행은 개성이라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개성의
생존이 인생이며 행복이라고 인식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인간의 모순이나, 분열이나, 고통이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그가 그저 자기의 눈으로부터 이성의 요구를 가리우기
위해서 끝없는 개성의 요구를 무한히 세게 하며 더하려고 이성의 힘을
이용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개성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생존하고 있는 모든 생활 조건과
마찬가지로 부정할 수도 없고, 또 그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조건을 인정 그 자체라고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인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은 주어진 생활조건을 이용할 수 있고 또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인생의 목적으로서 보는 일은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는 안된다. 개성을 부정함이 아니라 자아의 행복을 부정해서 자아를
인생으로 알지 않게 하는 일, 즉 이것이 본디의 단일(單一)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또 그것에 대한 희구가 인간생활의 요소로 되어있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할 일이다.
아득한 옛적부터 개성 속에 자기의 생활을 인식하는 일은 생활의
절멸이며, 개성의 행복 부정이야말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 하는
가르침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에 의해서 되풀이 설교 되어온 터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 무엇이냐? 그것은 불교(佛敎)다」라고
이것에 대해서 현대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열반(涅槃)이다. 그것은 기둥 꼭대기에 올라서는 일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했을 때 현대 사람들은 그들의 아주 교묘(巧妙)한
방법으로 만인이 다 알고 있는 일이고 누구에게도 감출 수 없는 일, 즉
개인적인 생활은 볼행이고 아무런 의의조차도 갖지 못하는 일이라 함을
갈파(喝破])해 버린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다. 열반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들이 이 말로써 수십 억의 인간에게 인정받아 왔으며, 또 현재도
인정되고 있는 모든 일, 우리들의 그 누구도 마음속에서는 샅샅이 알고
있는 일체의 일, 즉 개성의 목적을 위한 생활을 해롭고 무의미한 것이다.
만약 이 해로움과 무의미에서 벗어나올 어떤 출구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틀임없이 개성의 행복을 부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갈파해 온
것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태반이 인생을 이처럼 해석해 왔으며, 또 현재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위대한 지식자들이 인생을 그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
그 밖에는 인생의 해석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은 조금도 그들을
어리둥절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생의 문제를 모조리 비록 충분히
만족스러운 방법으로는 해결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전화 가극 세균학
전등 폭약 등에 의해서 처리되고 있다는 것과 개인 생활의 행복
부정이라는 사상은, 그들에게는 고대 무지의 되돌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을 끝까지 믿어 마지않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불행한 사람들은, 열반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오로지 개인적
행복을 부정하려고 몇 년이나 외발로 서 있던 가장 야만스러운 인도 사람
편이 되어 모든 비교를 넘어서 훨씬 산 인간이라는 것, 즉 세계를 철도로
돌아다니고 전등 불 밑에서 그 야수적 상태를 세계에 폭로하거나 하는
현대 유럽 사회의 야수화된 인간들보다는 훨씬 더 산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 사람들은 개인적 생활과
합리적 생활 사이에 모순이 있음을 이해하고,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는데
까지 그것을 해결하고 있으나, 현대 문명 세계의 인간들은 이 모순을 이해
못했을 뿐더러, 그러한 모순이 있다 함을 믿기조차 안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인간의 자아의 생존이 아니라는 정의는, 모든 인류의 수천 년에
걸친 노작(勞作)의 결정이다. 이 정의는 인간(동물적이 아닌)의 그
정신계에 있어서 단순히 지구의 희전이나 중력의 법칙 따위와 동일할
뿐더러, 그것보다는 훨씬 더 의심할 바 없는 견실(堅實)한 진리로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분별 있는 사람 학자 무식자 노인 소아도 이 사실을
이해하고 또 알고 있다. 이 사실이 감춰져 있는 것은 오직 아프리카나
호주에 있는 가장 야만스러운 사람들이나 유럽의 여러 도시나 그 밖의
여러 곳에 살고 있는 바 야만으로 되돌아간 아무 걱정 없는 사람들
뿐이다.
이 진리는 인류의 재산으로 되었으니까 만약 그 종적(從的) 지식 기계학
대수학 천문학 등에서 뒷걸음질치고 있지 않는다면, 하물며 인생을
정의하는 근본적인 주요한 지식에 있어서 뒷걸음질 칠 턱이 없는 것이다.
인류가 수천 년간 생활에서 끄집어 내 온 것, 즉 개인 생활의 공허(空虛)
무의미함 불행함에 대한 천명을 잊어버리거나, 그 의식의 표현으로부터 말
살해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생을 개인적 생존으로 보는 고색창연한
야만의 견해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시도(試圖), 현대 유럽 세계의 소위
과학적이라는 것이 힘을 경주하고 있는 시도는 그저 인류의 합리적 의식의
발달을 한층 더 분명히 보여주는 데 그치고, 인류가 이미 어떻게 그 소년
시절의 의복으로부터 생장했는가를 명시해 줄 따름이다. 그리고 자기
포기(自己 抛棄)라는 철학상의 학설과 가공할 비율로 불어가는
자살(自殺)은, 이미 지나온 의식의 정도까지 인류를 후퇴시키는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 생존으로서의 인생은 인류가 이미 졸업한 것이며, 새삼스럽게
지금 그것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또 인간의 개인적
생존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들이
무엇을 쓰든, 무엇을 말하든, 무엇을 발견하든, 또 우리들의 개인 생활을
아무리 완전한 것으로 만들든 간에 개인적 행복의 가능에 대한 부정은
현대의 모든 합리적 인간에게 확고부동한 진리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회전한다.」이 문제는 갈릴레오나 코페르니 쿠스의
단정을 전복시키거나 새로운 푸토레미의 원(圓)을 생각해 내든가 하는
데에서 그것을 생각해 낼 수는 없다. 있는 것이 아니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서 이미 인류 전반의 의식으로 되어 있는 그러한 단정으로부터 그
이상의 결론을 끄집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바라문 교도나 불타나 노자나
솔로몬이나 스토아 학파나 기타 모든 참된 사상가들에 의해서 말해진
개인적 행복의 불가능성에 대한 단정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의
눈에서 이 단정을 가리우든가, 수단을 꾸며서 그것을 희피하든가 해서는
아니된다. 용감하게 명백히 그것을 시인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 위에
결론을 끌어내지 않으면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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