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개성의 요구와 합리적 의식의 요구는 양립(兩立)되기 어려운 것 같이 생각된다.

별관신사 2013. 6. 29. 05:55

개성의 요구와 합리적 의식의 요구는 양립(兩立)되기 어려운 것 같이 생각된다.

이성도, 고찰도, 역사도, 내적 감정도,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인생관의
진실성을 인간에게 확신시키고야 마는 것 같이 생각된다. 더구나 현세의
가르침에 의해서 자라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합리적 의식과 그의 감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이 그의 생활의 법칙이 될 수 없는 것 같이
생각된다.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과 싸워서는 안된다. 향락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고통을 피해서는 안된다.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청이다. 이것은 전 생명의 부정이나 다름없다. 내가 나의
개성의 요구를 느끼고, 이성에 의해서 그 요구가 옳음을 알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 개성을 부정해야 할까?」 현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더구나 여기에 주의해야 할 현상이 있다. 마음이 단순하고, 비판력을
활동시키는 일이 적은 노동계급의 사람들은, 거의 전부 개성의 요구를
굳게 지키는 일이 없이 항상 자기 내부에 개성의 요구와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 요구를 느끼고 있다. 그런데 합리적 의식의 완전한 부정과 특히
그러한 요구들의 합리성 파괴와 개성의 권리 보호는 그저 비판력이 발달된
돈 많은 상류 사람들 사이에 많다는 사실이다.

교육을 받는 나약한 유한인은 항상 개성에 절대 불가침(不可侵)의
권리가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그런데 굶주린 자는 인간에게 음식이
필요하다는 따위의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러한 일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어서 증명도 논박도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먹기만 할뿐이다.

이 사실은 단순한 사람, 소위 무교육자, 인생을 노동에 바치고 있는
자는 그 이성을 해치지 않은 채 완전한 순결과 힘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일방으로는 그 전 생애를 단순히 무의미한 헛된 일에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생각해서 안될 일을 생각하는 데만 소비하고 있는
자들은 그 이성을 여지없이 헤쳐버리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는

이성이 아예 자유를 잃어버리고만 것이다. 그의 이성은 이성에 적합치
못한 문제, 즉 개인적 요구의 고찰이나, 그 발달의 증대나,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의 연구에 의해서 차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개성의 요구를 느끼고 있다. 따라서 이 요구는
옳다」고 세속의 가르침에 의해서 양육된 소위 교양인들은 말한다.

그들은 자기의 개성의 요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의 생활은 모두 개인적 행복의 상상적 증대에 지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성의 행복은 그들에게 그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일에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이성이 지향되고 있는 개인적
존재의 모든 조건을 개성의 요구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식된

이와 같은 요구는 이성으로 지향된 요구―항상 이 의식의 결과로서
무제한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확대되어 마지않는
요구를 충족시켜 가는 일은 그들로부터 그들의 참된 생활의 요구를
가로막는 것이다.

소위 사회학은 인간의 요구에 관한 학설을 그 연구의 기초로서 두고
있다. 그러나 그때 그는 그 학설에 편리하지 못한 사정, 즉 인간에게는
자살하는 자, 혹은 굶어 죽으려는 자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아무런 욕망을
가지지 않을 경우도 있고, 글자 그대로 욕망이 무한할 경우도 있다는
사정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동물적 인간 존재의 요구는 그 존재의 면(面)의 수만큼 있는 것이지만,
그 면이야말로 원의 반경과 같이 무수하다. 먹을 것, 마실 것, 호흡 작용,
모든 근육 및 신경 운동의 요구, 노동 휴식 만족 가정생활이 요구, 과학
예술 종교 및 그들의 다종 다양스러운 요구, 이들 모든 관계에서의 어린이
젊은이 남자 노인 처녀 여자 노파의 요구, 중국인 파리인 노서아인

라프란트인의 요구, 민족의 관습이나 질병 등에 적용하는 요구.......
해가 질 때까지 헤아려도 인간의 개인적 생활 요구의 모든 것을 모조리
셀 수는 없을 것이다. 생존의 모든 조건은 요구일 수 있다. 더구나 생존의
조건은 무수하다.

그러나 요구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저 의식된 조건뿐이다. 그러나 일단
의식되자마자 그 본래의 의의를 잃고, 항상 그들 쪽으로 지향된 이성이
그들에게 주는 과장적 의의를 갖게 되고, 그것에 의해서 참된 생활을
가리워버리는 것이다.

요구라고 불리우는 것, 즉 인간의 동물적 존재의 조건은 어떠한
형태라도 만들 수 있는 팽창 능력이 있는 작은 공에 비유할 수 있다. 모든
작은 공은 서로 같으며, 그 각각이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그들이

팽창되지 않는 한 서로 방해하는 일이 없다. 모든 요구도 마찬가지로
같으며 제각기의 위치를 지키고 그것들이 의식되지 않는 한 병적으로
감각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적은 공이 팽창하기 시작하자 곧 다른 것이
차지하고 있는 보다 넓은 장소를 차지하리만큼 팽창해서 다른 것을

압박하고 자기도 비좁아서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요구도
또한 이것과 마찬가지다. 합리적 의식이 그 하나에 지향되자, 곧 의식된
그 요구는 모든 생활을 차지해 버리고, 인간의 존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