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의식의 요구의 확인
「그러나 그것은 삶이 아니다.」 교란(攪亂)되어 갈피를 못 잡는 사람의
의식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삶의 거부(拒否)이며,
자살이다.」―「나는 그 따위 일은 조금도 모른다」라고 합리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인생이란 그러한 것이고, 그 이외의 인생은
없고, 또 있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러한 생활이
인간에게도, 전 세계에 대해서도, 인생이며 행복인 줄 알고 있다. 더우기
나의 지난날의 세계관에 따르면, 나의 생활도, 모든 생물의 생활도,
악이며 무의미한 것이었으나, 이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심어진 이성의 법칙이 실현됨을 알고 있다. 또 나는 무한으로까지
증대되어 나갈 수 있는 각 존재의 생활의 최대에 의해서 그저 만인에 대한
각자의 봉사하는 법칙, 따라서 각자에 대한 만인의 봉사라는 법칙에
행복은 달성되는 것이다.」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적인 법칙은 될 수 있어도 실제의 법칙이 될 수는
없다」라고 교란되어 갈팡질팡하는 사람의 의식은 대답한다.「현재 남들은
그들 자신 이상으로 나를 사랑해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도 나 자신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열락을 저버리고 고통을
감수(甘受)할 수는 없다. 나는 이성의 법칙에는 별로 볼 일이 없다. 나는
나를 위해서 향락을 바라고 나를 위해서 고통을 일부러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오늘날 생물 상호간의 투쟁이 이루어졌으니, 만약 나 한 사람이
투쟁하지 않았다면 남들이 나를 억눌러 없애 버렸을 것이다. 만인의 최대
행복이 가령 어떠한 방법으로 달성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격이다. 현재 내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실제적 최대
행복이다.」이렇게 그릇된 의식은 말할 것이다.
「나는 그 따위 일은 아무 것도 모른다」라고 합리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대가 그저 그대의 향락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대
자신이 그것을 취하지도 않고, 남이 그대에게 줄 때에만 비로소 그대를
위해서 행복이 되리라는 것과, 그대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잡을
때에는 그대의 향락은 현재 그러하듯이 포만이 되고, 고통이 되리라는
것뿐이다.
그대는 또 남이 그대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때만이 실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지금처럼 상상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손을 대어 자기의 생명을 빼앗아 버리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또 개인적 생활, 만인이 나 혼자만을 사랑해 주고, 나는 나
자신만을 사랑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열락을 내가 얻고,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나만이 벗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같은 생활은 가장 크고 또
끊임없는 고통임을 알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남과 싸우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도 역시 더욱 나를 미워하고, 더욱더 심하게 나와
싸우게 될 것이다. 내가 고통에 대해서 몸을 방어하면 할수록 죽음은
더욱더 두려운 것이 될 것이다.
또 나는 인간이 무엇을 해보든, 그가 자기의 생명의 법칙에 적응해서
생활하지 않는 한 행복을 받을 수 없으리라 함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의 법칙이란 싸움이 아니고 도리어 만물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상호봉사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생명은 그저 나 자신의 개성 속에만 존재함을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 나의 생명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 따위를 나는 모른다」하고 합리적 의식은 말한다.「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나의 세계의 생활이 전에는 사악(邪惡)하고 무의미한 것으로만이
생각되던 생활이 지금은 내가 나 자신 속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은 이성의
법칙에 따름으로써 동일한 행복을 향해서 살아 나가는 한 개의 합리적이고
완전한 생활인 것같이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내게서는 불가능하다」라고 헤매는 의식은 말한다.
동시에 이 불가능한 일 그 자체를 하려하지 않는 자가 없고, 이 불가능한
일 그 자체에 있어서 자기 생활의 가장 좋은 행복을 상상하지 않으려는
자가 없는 것이다.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 자기의 행복을 생각함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자기 의외의 다른 존재의 행복이 자기의 행복으로 된
상태를 모르는 자는 없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일도 하고 고통도 받고
하는 일 속에 행복을 생각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인간은 한번
자비(慈悲)의 감정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개인적 열락같은 것은
그에게서는 졸지간(猝地間)에 의의를 잃고, 그의 생활력은 남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노력과 고통으로 옳아가버린다. 그리하여 고통도 노력도
그에게 행복이 되는 것이다.「남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인간은 일단 이 감정을 알게 되면 죽음이
보이지 않게 되고, 두렵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그에게 허용된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되게 되는 것이다.
이성 있는 사람은, 만약 자기 행복에 대한 희구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와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가능성을 마음 속에서 인정한다면 그의
생활은 지금까지의 불합리와 불행 대신에 합리적이고 행복스러운 것으로
되리라 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는 또 남과 다른 존재 속에 이와
같은 생활 관념을 인정함과 동시에, 일찌기 부조리(不條理)하고 참혹하게
생각되던 전 세계의 생활이 뜻밖에 인간만이 희구할 수 있는 고상한
합리적 행복으로 된다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즉 무의미
무목적(無目的) 대신에 합리적 의의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생활을
목적으로 이와 같은 사람에게 생각되는 것은 전 세계 존재의 한없는
광명(光明)됨과의 결합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이 결합을 목표로 해서
나가고, 이 결합에 있어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음에는 모든 존재가 점점
많은 이성의 법칙에 따름으로써, 마침내 인생의 행복은 각 존재의 자기
일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법칙에 토대(土臺)를
두고, 남들의 행복에 대한 각 존재의 희구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임을(오늘날은 인간에게만 이해되어 있는 일을) 이해하게 되리라.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자기 일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와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라도 인정한다면, 인간은
이처럼 자기의 개성을 부정해 나가는 것과 활동의 목적을 자기로부터 점점
다른 존재로 옮겨가는 일이 인류 및 인류에 가장 가까운 생물의 진보
운동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인간은 역사에 있어서도
일반의 생활 운동이 생물 상호의 생존 투쟁의 격화(激化)이니, 증대에
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불화(不和)의 감소, 쟁투의 완화(緩和)에 있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인생의 운동은 그저 이성에 따름으로써 세계가
적의(敵意)와 불화로부터 점점 조화와 결합으로 다가가는 일에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번에 인간은
여태껏 서로 물어뜯고 하던 사람들이 그러기를 그만 두고, 포로(捕虜)가
자기의 자식들마저도 죽이던 사람들이 그러함을 그만두고, 살륙(殺戮)을
자랑으로 알던 군인들이 그것을 뽐내기를 그만두고, 노예제도의
창시자(創始者)가 그것을 폐기(廢棄)하고, 동물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동물을 기르기 시작하고, 죽이는 일을 덜하고, 동물의 고기 대신에
달걀이나 젖을 식용으로 하게 되고, 식물의 세계에서까지도 그 절멸을
적게 하려 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또 인류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남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생존을 희생시키고 있는 모범적 사실을 인정한다. 인간은 또 그가 오직
이성의 요구에 의해서 인정한데 지나지 않던 그 일이 실지로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인류의 과거생활에 의해서 확증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또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성보다도, 역사보다도, 더욱
힘세고, 확실히 같은 사실을 전혀 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처럼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를 직접적인 행복으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하고, 이성이
그에게 지시하고, 사랑이 그의 마음에 표현하는 것 같은 활동으로
끌어당기는 그의 마음의 동향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 아니다.」 교란(攪亂)되어 갈피를 못 잡는 사람의
의식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삶의 거부(拒否)이며,
자살이다.」―「나는 그 따위 일은 조금도 모른다」라고 합리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인생이란 그러한 것이고, 그 이외의 인생은
없고, 또 있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러한 생활이
인간에게도, 전 세계에 대해서도, 인생이며 행복인 줄 알고 있다. 더우기
나의 지난날의 세계관에 따르면, 나의 생활도, 모든 생물의 생활도,
악이며 무의미한 것이었으나, 이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심어진 이성의 법칙이 실현됨을 알고 있다. 또 나는 무한으로까지
증대되어 나갈 수 있는 각 존재의 생활의 최대에 의해서 그저 만인에 대한
각자의 봉사하는 법칙, 따라서 각자에 대한 만인의 봉사라는 법칙에
행복은 달성되는 것이다.」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적인 법칙은 될 수 있어도 실제의 법칙이 될 수는
없다」라고 교란되어 갈팡질팡하는 사람의 의식은 대답한다.「현재 남들은
그들 자신 이상으로 나를 사랑해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도 나 자신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열락을 저버리고 고통을
감수(甘受)할 수는 없다. 나는 이성의 법칙에는 별로 볼 일이 없다. 나는
나를 위해서 향락을 바라고 나를 위해서 고통을 일부러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오늘날 생물 상호간의 투쟁이 이루어졌으니, 만약 나 한 사람이
투쟁하지 않았다면 남들이 나를 억눌러 없애 버렸을 것이다. 만인의 최대
행복이 가령 어떠한 방법으로 달성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격이다. 현재 내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실제적 최대
행복이다.」이렇게 그릇된 의식은 말할 것이다.
「나는 그 따위 일은 아무 것도 모른다」라고 합리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대가 그저 그대의 향락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대
자신이 그것을 취하지도 않고, 남이 그대에게 줄 때에만 비로소 그대를
위해서 행복이 되리라는 것과, 그대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잡을
때에는 그대의 향락은 현재 그러하듯이 포만이 되고, 고통이 되리라는
것뿐이다.
그대는 또 남이 그대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때만이 실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지금처럼 상상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손을 대어 자기의 생명을 빼앗아 버리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또 개인적 생활, 만인이 나 혼자만을 사랑해 주고, 나는 나
자신만을 사랑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열락을 내가 얻고,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나만이 벗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같은 생활은 가장 크고 또
끊임없는 고통임을 알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남과 싸우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도 역시 더욱 나를 미워하고, 더욱더 심하게 나와
싸우게 될 것이다. 내가 고통에 대해서 몸을 방어하면 할수록 죽음은
더욱더 두려운 것이 될 것이다.
또 나는 인간이 무엇을 해보든, 그가 자기의 생명의 법칙에 적응해서
생활하지 않는 한 행복을 받을 수 없으리라 함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의 법칙이란 싸움이 아니고 도리어 만물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상호봉사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생명은 그저 나 자신의 개성 속에만 존재함을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 나의 생명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 따위를 나는 모른다」하고 합리적 의식은 말한다.「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나의 세계의 생활이 전에는 사악(邪惡)하고 무의미한 것으로만이
생각되던 생활이 지금은 내가 나 자신 속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은 이성의
법칙에 따름으로써 동일한 행복을 향해서 살아 나가는 한 개의 합리적이고
완전한 생활인 것같이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내게서는 불가능하다」라고 헤매는 의식은 말한다.
동시에 이 불가능한 일 그 자체를 하려하지 않는 자가 없고, 이 불가능한
일 그 자체에 있어서 자기 생활의 가장 좋은 행복을 상상하지 않으려는
자가 없는 것이다.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 자기의 행복을 생각함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자기 의외의 다른 존재의 행복이 자기의 행복으로 된
상태를 모르는 자는 없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일도 하고 고통도 받고
하는 일 속에 행복을 생각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인간은 한번
자비(慈悲)의 감정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개인적 열락같은 것은
그에게서는 졸지간(猝地間)에 의의를 잃고, 그의 생활력은 남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노력과 고통으로 옳아가버린다. 그리하여 고통도 노력도
그에게 행복이 되는 것이다.「남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인간은 일단 이 감정을 알게 되면 죽음이
보이지 않게 되고, 두렵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그에게 허용된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되게 되는 것이다.
이성 있는 사람은, 만약 자기 행복에 대한 희구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와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가능성을 마음 속에서 인정한다면 그의
생활은 지금까지의 불합리와 불행 대신에 합리적이고 행복스러운 것으로
되리라 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는 또 남과 다른 존재 속에 이와
같은 생활 관념을 인정함과 동시에, 일찌기 부조리(不條理)하고 참혹하게
생각되던 전 세계의 생활이 뜻밖에 인간만이 희구할 수 있는 고상한
합리적 행복으로 된다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즉 무의미
무목적(無目的) 대신에 합리적 의의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생활을
목적으로 이와 같은 사람에게 생각되는 것은 전 세계 존재의 한없는
광명(光明)됨과의 결합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이 결합을 목표로 해서
나가고, 이 결합에 있어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음에는 모든 존재가 점점
많은 이성의 법칙에 따름으로써, 마침내 인생의 행복은 각 존재의 자기
일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법칙에 토대(土臺)를
두고, 남들의 행복에 대한 각 존재의 희구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임을(오늘날은 인간에게만 이해되어 있는 일을) 이해하게 되리라.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자기 일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와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라도 인정한다면, 인간은
이처럼 자기의 개성을 부정해 나가는 것과 활동의 목적을 자기로부터 점점
다른 존재로 옮겨가는 일이 인류 및 인류에 가장 가까운 생물의 진보
운동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인간은 역사에 있어서도
일반의 생활 운동이 생물 상호의 생존 투쟁의 격화(激化)이니, 증대에
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불화(不和)의 감소, 쟁투의 완화(緩和)에 있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인생의 운동은 그저 이성에 따름으로써 세계가
적의(敵意)와 불화로부터 점점 조화와 결합으로 다가가는 일에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번에 인간은
여태껏 서로 물어뜯고 하던 사람들이 그러기를 그만 두고, 포로(捕虜)가
자기의 자식들마저도 죽이던 사람들이 그러함을 그만두고, 살륙(殺戮)을
자랑으로 알던 군인들이 그것을 뽐내기를 그만두고, 노예제도의
창시자(創始者)가 그것을 폐기(廢棄)하고, 동물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동물을 기르기 시작하고, 죽이는 일을 덜하고, 동물의 고기 대신에
달걀이나 젖을 식용으로 하게 되고, 식물의 세계에서까지도 그 절멸을
적게 하려 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또 인류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남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생존을 희생시키고 있는 모범적 사실을 인정한다. 인간은 또 그가 오직
이성의 요구에 의해서 인정한데 지나지 않던 그 일이 실지로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인류의 과거생활에 의해서 확증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또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성보다도, 역사보다도, 더욱
힘세고, 확실히 같은 사실을 전혀 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처럼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를 직접적인 행복으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하고, 이성이
그에게 지시하고, 사랑이 그의 마음에 표현하는 것 같은 활동으로
끌어당기는 그의 마음의 동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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