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같은 살아 있는 것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비범하게 민감하고 섬세한 마음과 가슴,
아무 결론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공포의 모든 움직임을 좇을 수 있는 마음이 요청된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그걸 보고 그것과 함께 산다면-그리고 공포의 전구조를 아는 데는 하루 종일
걸리는 게 아니라 1초 또는 1분쯤 걸린다고 할 수 있다-만일 당신이 그것과 더불어 그다지도
완전하게 사는 나머지 다음과 같은 질문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해 보자-<공포와 함께 사는 그
실체는 누구인가? 공포를 관찰하고, 공포의 주요 사실에 대해서 알뿐만 아니라 공포의 여러
형태의 움직임 전부를 보는 자는 누구인가? 관찰자는, 그 자신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축적한 죽은 실체, 정적 존재이며, 공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고 있는 자는
바로 그 죽은 자인가? 관찰자는 과거의 것인가 아니면 그는 살아있는 것인가?>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나에게 대답하지 말고 당신 자신에게 대답하라. 관찰자인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죽은 자인가 아니면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살아 있는 자인가? 왜냐하면
관찰자 속에는 그 두 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공포를 원치 않는 검열관이다. 즉 관찰자는 공포에 관한 그의 경험의 총체이다.
그러므로 관찰자는 그가 공포라고 부르는 것과 분리돼 있다. 그 둘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래서 그는 끝없이 그걸 극복하려 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며, 그리하여 그 자신과
공포 사이에 끊임없는 싸움이 있다-그렇게 정력 낭비인 싸움이.
당신이 관찰할 때, 당신은 관찰자가 아무런 타당성도 알맹이도 없는 관념과 기억의 뭉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며, 한편 공포는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은 추상으로서 어떤
사실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것은 물론 그럴 수 없는 일이다-을 안다. 그러나 <나는
두렵다>고 말하는 관찰자는 공포인 관찰물과 사실상 무엇이 다른가? 관찰자가 공포이며
그리고 이것이 깨달아질 때, 공포를 제거하기위해 노력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의 에너지 낭비가
없고, 또 관찰자와 관찰물 사이의 시공의 간격이 사라진다. 당신이 공포와 동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일부임을 알 때-즉 당신이 공포임을 알 때-당신은 그것에 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공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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