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자르 그라시안.

그라시안의 첫번째 회상

별관신사 2014. 8. 19. 07:50

내 생애의 끝에 서서.
l658년 8월 시일 이날은 내가 58세가 되는 날이다.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는
나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지금까지 내 생애에서 일어난 증요한 일들을 기록하는

것을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내가 비록 지금부터 고통에 가득 찬 내 인생을
쓰려고 하지만 사실 누가 읽어 준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신은 나의 회고록을
적절한 사람에게 맡겨 보살피 주시리라고 믿는다. 내 건강 상태는 악화되고

있으며 남아 있는 내 인생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마 몇 개월 정도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영원히 잠들기 전에 누구나 그렇듯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무언가
쓸모있는 것을 세상에 남기고 싶을 뿐이다.

나는 '생존을 위한 핵심적 관건은 보신술이다.'라는 말로서 이 글이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길 빈다. 인생은 쯔임없는 투쟁 이다. 특히 세상에서
재물을 쌓으려는 사람들, 그들이 마음 속에 새겨 두어야 할 것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이 세상은 환상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톨릭 교회에 몸을 담고 있다. 교회 자체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교회의 내부에는 나를 파멸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주교가 있다. 추기경 세고비아 몬트로 주교이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나에 대한
복수심을 가슴에 품어왔다. 남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이런 일을 신께서 모른
체하고 계신 줄 아는 모양이다. 나는 일생 동안 민중들에게 설교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지만,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못한 채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나는 설교도 할 수 없고, 나의 글은 금서로 지정되어 마술에 걸린 듯
사라져 버렸다. 주교가 내 책을 소지한 사람에게 타락죄를 적용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만일 이 처벌이 나의 의지를 꺾어 버릴 심산이었다면 그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리라.

나는 내 인생의 발자취와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본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 인사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에 대해 회고한다.
사제들의 임무를 '성인과 같이 관용을 베푸는 일.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생존

전략의 일환임에 틀림이 없다. 그떻지 않고서는 출세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발적으로 수도회에 들어왔고. 진심으로 교회의 권위에 복종해 왔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선량한 교인들을 구박하는 사이비 사제들을 고발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 교도로서 불복종죄에 해당되는지
묻고 싶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그 죄로 여러 번 문초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연 내 양심을 거역할 수 있을까? 마음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확신에 찬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신의 목소리인
것이다. 나는 장님도 아니며 내 마음은 돌처럼 차지 않다. 예수회 형제들은

교회에 충성을 맹세하고도 왜곡되고 의심스러운 교리를 거침없이 설파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경외하는 교구민들에게 목청높여 천벌을 경고하고 있다.
'자기 마음대로 가고 싶은 길을 가면 악마의 밥이 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호소한다.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신은 무엇이 바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밝혀 주기 위해 이 교회를 선택하셨다!'

나는 괴로운 심정으로 이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올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허용하지 않는 발언을 하고 말았다. 만일 형제들이 전하는 말이
진실이라면 신은 왜 우리들 개개인에게 고유한 '마음'이란 것을 주셨겠는가?

내가 추구해 온 것은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고, 이를 열심히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그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이러한 진실의 탐구가
나를 초월한 그 어느 누구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확신한다.

예수회 안에는 대규모적인 포교 활동으로 전 세계를 그리스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그것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될 수도 엾는 일을 약속한다면 단순한

위선자에 불과하다. 교육 현실이 가진 자에게만 혜택을 주게 되어 있고 교회의
가르침이 수신 생활만을 강조한다면. 우수한 자질을 자손들에게 전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해진다. 도대체 주교가 왜 나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상스럽게도 내 생애에서 단 한 번밖에 그를 본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책상에는 언제나 주교로부터 온 경고장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떻게까지 주교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한 시기심일까? 아니면 좋은
생각에서일까? 실제로 그가 나를 교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단지 망상일 뿐이다. 나는 정규 훈련을 받은 예수회원이고 더구나 영신

수련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힘이 미치는 데까지
사람들의 영흔을 풍부하게 하여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교의 잔꾀로
인해 나의 명예가 실추된 경위를 고발하고, 그 평가를 이 기록을 읽는 사람들의

판단에 맡기려고 한다.
주교의 분노는 내가 인생을 우화적으로 그린 세 권의 소설 '비판자'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비록

이 아름다운 세상이 타락과 악마의 손길에 의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지력과 연민의 정에 힘입어 자신의 가능성을 낙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헌데 이에 대해 세고비아 몬트로 주교는 어떻게 반응했나? 상부에

나를 모함하고 이단자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하였던 것이다.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이 무시무시한 죄를 피하기 위해 4일 동안 물과 빵만으로 단식을 하라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독과 굴종은 무서운 것이다. 나는 신에게 용서를 청했고, 이러한 형극의
길을 걷지 않고서는 내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 비참한 벌을 달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원한을 품은 주교는 사라고사 대학에서의 내 교수직을 박탈하였다. 또 내가
탄원서를 제출하자, 크게 분노한 주교는 이번에는 그라우스라는 벽지로 나를
유배시켰다. 그곳은 황량한 빈민촌으로 문화와 활기를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나의 신념과 저술활동, 그리고 진리를 듣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발표하는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이미 발표된 내
작품을 베끼는 일까지도 엄하게 금지 되었다.

신이여! 아마도 저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가 봅니다.
아마도 내 신앙에는 무언가 빠진 것이 있나 봅니다. 만일 그러지 않다면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내게 이처럼 커다란 시련을 주시나이까? 주교는 다른 어떤

종파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로 마지막 복수를 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높은 지위에 있는 친구들, 그토록 친철을 베풀어 주었던 필립
4세까지도 나를 변호해 주지 않았다. 친구들은 궁지에 몰린 나를 두려워하기만

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은 건져낼 수 없다는 경귀를 새삼 깨닫게 해
줄 뿐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친구 대신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교구민인 브랑카 부부를 만나게 된 것을 신에게 감사드릴 뿐이다. 그들은 벌써

며칠째 나의 번거로움을 보살펴 주고 있다.
이 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그라우스의 쓸쓸한 수도원에서 처량한 신세가
되어 있는 나를 기적적으로 발견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스스럼없이 방 한 칸을

내주었다. 그들의 집은 기나긴 세월 동안 온갖 풍상을 겪은 낡은 주택으로, 내
방은 유독 더 허름하였다. 하지만 따뜻한 우정이 깃든 이 방에서 나는 저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끝없는 감사의 정을 품으면서..... 돌이켜 보면, 주교의

집요한 방해를 무릅쓰고 야밤에 촛불 앞에서 글을 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나에겐 이미 습관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희미한 곳에서 촛불
연기 때문에 눈병도 생겼고 밤이 깊어지면 쉽게 눈이 피로해졌다. '비판자'의

출간으로 인해 나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하지만 제일 가슴 아픈 일은
'계시'가 압수당했을 때였다. 거기에는 선과 악, 천박한 것과 고귀한 것을
포함해서 내가 일생 동안 관찰한 모든 것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책이 어느

지하실에서 썩고 있거나. 불에 타서 재로 변했을 생각을 하면 울화가 치민다.
그러나 아직도 내게는 기회가 남아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내 목소리가 세상 사람들 귀에 도달 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한 번 머릿 속에 기억된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조용한 방과 여기 있는
펜촉, 그리고 양피지는 내게 도움을 줄 것이다. 잃어 버린 '계시' 안에 수록된

'인생의 법칙'이 다시 한번 기록될 때까지 신은 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예측이 가능하다. 인생의 목표는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 능력이 강한 자에게는 인생의 도정에서 최악의 사태를

직면하더라도 이는 단순히 넘어가야 할 반드시 장애물에 불과하다.
내 몸 안에서는 창작열이 새롭게 몸부림치고 있다. 들어주신 신에게
감사하는 순간 다시금 잃어 버렸던 말들이 아주 쉽게 술술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