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나는 내가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

별관신사 2015. 9. 20. 08:17

나는 내가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스스로 안다-예컨대 나를 자극하는 청중이 그것이다.
나는 많은 청중한테 강연을 하므로써 그들로부터 일종의 에너지를 끌어 낸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내 말에 동의하든 반대하든지간에, 그 청중한테 의존한다. 그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더 나에게 활력을 준다. 만일 그들이 동의하면 그것(활력)은 매우 얕고 텅빈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한테 강연하는 게 아주 자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청중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안다. 그러면 왜 그런가? 왜 나는 의존하는가? 왜냐하면 나 자신 속에서
나는 얕으며, 나 자신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 자신 속에 항상 넘치고, 풍부하고,
활력 있고, 움직이며, 살아 있는 원천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의존한다.

나는 그 원인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 원인의 발견이 나를 의존으로부터 자유롭게 할것인가? 그 원인의 발견은 다만
지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분명히 내 마음을 그것의 의존성으로부터 해방하지 않는다.

어떤 관념을 단순히 지적으로 수락하는 것이나,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감정적 묵인은,
자극을 주게 될 어떤 것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마음을 의존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은 자극과 의존의 전구조를 아는 것이며 그 의존이 어떻게 마음을 어리석고, 둔하고,

활발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의 전부를 보는 것만이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그래서 나는 전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걸 따져보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어떤 특별한 관점이나 소중히 여기는 독특한 체험으로부터 삶을 볼 때, 또는 내가 모은 어떤

독특한 지식으로부터 삶을 볼 때-위의 것들이 나의 배경이며 또 <나>인데-나는 전적으로 볼
수 없다. 나는 내 의존의 원인을 지적으로, 말로, 분석을 통해서 발견했지만, 그러나 생각이
탐색한 것은 무엇이든지 단편적일 것임에 틀림 없으며, 따라서 생각이 끼어들지 않을 때에만

나는 어떤 것을 전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야만 나는 나의 의존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즉 나는 있는 것을 정말 본다. 나는
좋고 싫고 없이 그걸 본다-나는 그 의존을 제거하고자 원하지도 않으며, 그것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걸 관찰하며, 그리고 그러한 관찰이 있으면 나는 그림의
조각이 아니라 그림 전부를 볼 수 있고, 또 마음이 그림 전부를 볼 때 자유가 있다. 그래서
나는 단편화가 있을 때 에너지의 분산이 있음을 알아냈다. 나는 에너지의 분산의 바로 그

원인을 발견했다.
만일 당신이 모방하고, 권위를 받아들이고, 사제한테 의존하고, 의식, 도그마, 당 혹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면 에너지의 낭비가 없으리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어떤

이데올로기-그것이 좋든 나쁘든 또는 그것이 신성하든 신성하지 않든-를 따르고 수락하는
것은 조각난 행동이요 따라서 갈등의 원인이며, 그리고 <있어야 하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분열이 있는 한 필연적으로 갈등이 있게 마련이고, 또 어떤 갈등이든 그것은 에너지의

분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