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is story
The Anagarika Sugatananda
프란시스 스토리 지음
정승석 옮김
(BODHI LEAVES NO. B 15)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명상이라는 정신수행은 어떠한 계통의 종교에서나 볼 수 있다.
기독교의 기도는 일종의 사념적 명상법2)이며,
힌두교에서 행하는 `게송'이나 `진언'의 암송은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영감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들 명상체계의 대부분은 명상의 목적과 명상의 부수물들을 혼동하고 있다.
즉 때로는 즉각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특별한 심령현상을
명상의 목적으로 여기는 나머지 반 몽환상태에서 경험하는 환시나 환청을
명상훈련의 최종성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닦는 명상방식에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아직도 대부분의 인류는 마음이란 것이 어떤 기능을 하며
그 힘이 어느 정도까지 미치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영매의 상태에 이르는 자기 최면과 직접적 인식에 이르는
정신정화 과정을 일반인들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후자야말로 불교에서 구하는 정신집중의 참된 목적이다.
기독교도는 그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성자들을 보게 되고, 또 대화도 한다.
힌두교도는 만신전의 신들의 화현을 목도한다. 모두가 그런 식이다.
한 예로 벵갈 지방의 신비가인 라마크리슈나 빠라마항사는 기독교를
그의 명상주제로 취하자,
전에는 그렇듯 선명하게 나타나던 힌두교 신들의 화현 모습 대신에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종교의 신비가들이 각자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환영을 보고 환청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명상은 기껏해야 평소 잠재의식 깊숙이
엎드려 있던 관념을 의식의 표면에 떠올려
객관화시킨 데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최면술의 경우, 피술자가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 용이하게 최면가의 암시에 걸린다.
이때 이 최면 상태의 사람을 잘 관찰해보면, 피술자가 시술자에게
복종적일수록 시술자는 능력껏 솜씨를 발휘해 자기가 겪어보고 싶은
경험을 그를 통해 마음대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명상에는 전혀 색다른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하겠다.
즉 영매능력을 더 발전시켜 피술자로 하여금 다른 차원의 존재를,
예를 들어 천상계나 불행한 유령들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을
실제로 보고 듣도록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욕계천상(欲界天上)3)이나 아수라 세계4)는 우리 인간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므로 용이하게 접근해 올 수 있으며,
이 사실이 곧 서양 심리주의의 영적 현상을 올바로 설명해주는 해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불교 명상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명상의 부수물로서 발생하기는 하나 이는 불교 수행의 올바른 목적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반드시 극복해야 할 장애인 것이다.
예수를 본 기독교인이나 성스런 크리슈나와 얘기를 나눈 힌두교인은
자신의 종교생활의 목적이 이루어졌다하여 대단히 만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부처의 환영을 보는 경우,
자기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관념이 구상화(具象化)되기에
이르렀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당신이 열반에 드신 후에는 어떤 신이나 인간도
더이상 당신을 볼 수 없다고 스스로 확언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의 명상 및 선정과 타종교의 명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명상과정에 들어가는 불교인은 이 차이를 잘 알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의식 가운데 선명하게 정립해 놓는다.
재생과 고통의 근본원인은 갈애와 결합하여 상호작용하는 무명이다.
이들 두 가지 원인은 악순환을 이룬다.
한편으론 무지로 인해 관념들이 생기고 다시 관념에서 욕망이 생긴다.
원래 이 현상계는 정작 우리가 해석하여 갖다붙인 의미말고는
그 이상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 해석이 무명에 의해 조건지워질 경우
우리는 전도(顚倒)5)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식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 때문에 우리는
무상(無常)한 것을 변함없는 것[常]으로,
괴로운 것[苦]을 즐거움[樂]의 원천으로,
실체가 아닌 것[無我]을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我]로 뒤바꿔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여섯 개의 인식통로[六根], 즉 눈·귀·코·혀·몸·의식을 통해 얻는
일체의 감각적 경험에 대해 그릇된 해석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근래에 물리학이 발달하면서 밝혀진 물리적 세계의 실상은
종래 우리가 육근을 통해 감각적으로 인식해오던 세계와는 매우 다른 점이 많고,
오히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습에 가까워져 가고 있어서
우리는 새삼 불교진리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감관이다.
우리가 즐거움의 대상을 소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추구하고 있는 것은,
기실은 신기루를 동경한 나머지 헛그림자를 좇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알고 보면 무상이며, 고이며, 무아이다.
즉 덧없는 것이고, 고통과 결부된 것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추구는 또다시 새로운 무상, 고, 무아의 원인이 될 따름이다.
즉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둘 수밖에 없다.
또 그런 환상을 좇고 있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로 무상하고 고통에 얽매여 있으며,
어떤 일관된 자아원칙도 없다는 점은 매한가지다.
따라서 우리가 욕구를 좇고 있는 것은 꼭 그림자가 그림자를 좇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불교의 명상목적은 이런 진리의 실상을 단순히 지적(知的)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무명과 갈애를 실제로 종식시킴으로써
무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보다 원대한 데에 있다.
이와 같이 궁극적 완성에 이바지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명상이라면
-그 효과는 바로 명상자의 인격됨됨이와 인생전반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 분명히 명상 체계자체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그것을 쓰는 방법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하다.
명상을 통해 빛을 보았다거나, 환영을 지니게 되었다거나,
또는 황홀경을 맛보았다 해서 명상의 목적이 성취된 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들쯤은 불교 명상의 목적을 참되게 이해하고 있는 불교인에겐
너무나 평범한 것이어서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경험들에는 실제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위험은 정신병리학을 연구해본 학도라면 누구든지 잘 알고 있는 그런 것이다.
참된 불교 명상의 목적과 그 방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정념의 수행법에 관한 경, 즉 <대념처경(大念處經)>6)속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육체와 마음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육체의 움직임과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를
주의깊게 살피는 능력을 키워야만 한다.
그렇게 노력하다보면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이 육체와 정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가지고 `자아'라고 그릇되이 여기지 않게 되고,
있는 그대로 여실(如實)히 그것들을 바라보게 된다.
즉 육체의 움직임을 사대(四大 : 地·水·火·風)의 결합이
물리적 인과법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게 되며,
또한 정신적 움직임도 외부자극에 반응하여 생하고 멸하는
의식의 끊임없는 흐름의 상태로 바라보게 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활동을 마치 자신과 하등 관계도 없는
별개의 현상의 질서인 것처럼 완전히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만일 자아란 관념[有身見] 7 )이 없다면 이기적인 태도나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과연 어디서부터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만약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취하는 버릇이
별로 줄어들지 않은 채 여전하다면 그 사람의 명상수행은
실패한 것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나무의 가치는 과일로 평가되듯이 사람은 그 행위로 평가된다.
달리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이 점은 특히 불교 심리학에서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인간을 행위 그 자체로 보기 때문이다.
가장 진실한 의미로 말한다면 이들 행위 때문에,
아니 이들 행위가 나타내는 업인(業因)과 과보의 연속 때문에
우리는 한 생애의 모든 단계를 통해, 또 심지어 금생과 내생을 이어서까지
어떤 동일체가 지속하는 것처럼 주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주의깊게 살핌으로써 우리는 자아란 미망을
깨뜨릴 수 있게 되며 나아가서는 외부적 대상에 대한
갈애와 집착까지도 끊을 수 있다.
그리하여 궁극에 가서는 갈애하는 `자아'도 갈애되는 대상도 없게끔 된다.
이와 같은 공부는 길고도 힘드는 것이며, 세속에서 또 세속적인
근심에서부터 물러났을 때만 해낼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잠깐만 현실로부터 비켜서서 이 공부를 닦아도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다.
그래서 평범한 일상사에 있어서도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상당한 정도로 갖출 수 있게 된다.
일단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일이야말로
명료한 사유를 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봄으로서 우리는 개인적 편견이나 그 밖의 어떤 다른 편견도
가지지 않고 당면한 상황을 신속히 파악하여,
용기있고 신중하게 이에 대처할 수 있게끔 된다.
그러나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작 중요한 선물은 오히려 정신집중이란 귀중한 선물일 것이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의 점에 계속 고정시킬 수 있는
능력[心一境性, Ekaggatā]인데
이 능력이야말로 공부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훌륭한 비결이다.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다. 마음은 마치 바람처럼 이리저리 끊임없이 헤맨다.
꼭 길들이지 않은 말과도 같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이 우주에 그보다 더 강력한 도구는 달리 없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자야말로 삼계(三界)8)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정복하면 첫째, 공포가 사라진다.
공포는 마음과 몸[名色; nāma-nūpa]9)을 `자아'와 결부시켜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리는 몸이나 마음에 가해지는 손상을 바로
자기자신에 가해지는 손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미망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오온(五蘊 ; 다섯 가지 요소의 무더기)10)의 작용이
바로 다름 아닌 인과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고 나면
그와 같은 미망은 사라지고 그 사람은 다시는
죽음이나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는 성공도 실패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칭찬에도 비난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덕을 해치는 행위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어떤 다른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떨어져 볼 수 있는[遠離] 힘을 키우면
그만큼 공덕을 해칠 가능성도 줄어든다.
불건전한 행동은 불건전한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이 청정해지고 무질서한 상태가 개선되면 악업은 더이상 축적되지 않는다.
그는 그릇된 행동을 두려워하게 되고 관대함[無貪], 자비로움[無瞋],
지혜로움[無癡]에 바탕을 둔 행위에서 점점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주해>
1) 명상 : 사전에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함. 고요히 사색에 잠김"이라 설명하고 있듯 명상이란 말은 사유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다만 그 깊이와 집중면에서 일반 사유와 구별될 뿐이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 말하는 바와나(bhāvāna)는 비록 meditation(명상) 으로 번역되긴 하지만 내용은 많이 달라서 사유를 좇아 다니지 않고 정신집중에 의해 직관적 통찰을 얻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사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영역 역시 정확을 기할 때는 meditation 대신에 mental development를 쓴다.본문으로
2) 사념적 명상법 : 생각을 좇는 명상법. 사유활동을 계속하면서 그 사유가 이끌어내는 바를 깊이 성찰하는 것.본문으로
3) 욕계천상 : 삼계(뒤의 주8 참조) 가운데 하나인 욕계에서 가장 높은 세계. 여기엔 사왕천, 도리천, 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의 여섯 하늘이 있다.본문으로
4) 아수라 세계 : 욕계 육도(천상계, 인간계, 아수라계, 축생계, 아귀계, 지옥계)의 하나.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들의 세계. 본문으로
5) 전도(顚倒, viparyāsa) : 올바른 이치에 반하여 뒤바뀐 것.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하는 입장. 인식[想]의 전도, 마음[心]의 전도, 견해[見]의 전도 중 어느 하나 때문에 무상한 것을 항상한 것으로, 고통인 것을 즐거움(또는 즐거움의 원천)으로,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는 것으로, 부정(不淨)한 것을 깨끗하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아는 네 가지 전도를 범한다. 영역은 perversion 또는 hallucination.본문으로
6) <대념처경(大念處經)>: <장부(長部)> 22.본문으로
7) 자아관념[有身見, sakkāyadiṭṭhi] : 오온이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것에 불과한 이 개체를 상주한다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본문으로
8) 삼계(三界) : 윤회세계를 이루는 욕계·색계·무색계의 세 세계.
1.욕계 :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는 오욕(五慾)의 세계(육도로 이루어짐).
2.색계 : 음욕과 식욕 등은 여의었으나 감관작용은 존재하고 있는 청정한 물질의 세계[색계 사선(四禪)에 의해 들어가는 세계].
3.무색계 : 물질을 여의는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사무색정(四無色定)에 의해 들어가는 세계].본문으로
9) 명색(名色, nāma-rūpa) : 마음과 육체, 정신과 물질. 원래 고(古)우파니샤드에서는 현상 세계의 명칭과 형태를 의미했으며, 불교에서도 가장 오래된 시구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후에는 명은 개인 존재의 정신적인 면, 색은 물질적인 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오온 전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씀.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는 4항으로 식(識)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또 육처(六處)를 조건짓는다.본문으로
10) 오온(五蘊, pañca-khandha) : 존재[有]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의 집합. 또는 집착 대상의 다섯 범주. ①물질 또는 신체의 요소[色蘊], ②느낌의 요소[受蘊], ③지각의 요소[想蘊], ④의지의 요소[行蘊], ⑤의식의 요소[識蘊].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므로 그냥 오온이라 부르고 아직 집착이 남아있는 범부와 사향, 삼과의 경우는 오취온(五取蘊, pañncāupādānakkhandā)이라 구분해 부르기도 함.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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