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는 일은 합리적 존재로서는 할 수 없다.
그것은 할 수 없음은 모든 길이 그에게 막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물아가 이끌리는 일체의 목적은 분명히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식은 다른 목적을 보여준다. 이 목적은 도달할 수
있을 뿐더러 인간의 합리적 의식에 충분한 만족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세속의 그릇된 가르침의 영향에 의해서 인간에게는 이들
목적들이 그의 개성과 어긋나는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에 키워져서, 발달되어 과장된 개성의 육욕을 가진 인간은
그 합리적 자아(自我) 속에 아무리 자기를 인정하려고 애써도, 그 자아
속에는 그가 자기의 동물아 속에 느끼고 있는 것 같은 삶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합리적 자아는 생활을 관조(觀照)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스스로 생활하지도 않고 삶에 대한 그리움도 없다. 합리적
자아는 삶에 대한 희구를 느끼지 않으나, 동물적 자아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오직 한가지 일, 삶으로부터의 회피(回避)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현대의 부정적 철학 (쇼펜하우어나 할트만)은 극히 성실성 없고, 양심이
없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들은 삶을 부정하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나올 가능성을 이용하려 하지 않고 여전히 그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또 인생을 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고, 그로부터 벗어나온
자살자들은 이 문제를 지극히 성실하게 해결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살이야말로 현대 인간 생활의 불합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염세철학가(厭世哲學家)나 가장 평범한 자살자의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동물적 자아가 있다. 그것에는 삶에 대한 끌리움이 있다.
이 자아는 이 끌이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족을 얻을 수는 없다. 또
다른 자아인 합리적 자아가 있다. 그것에는 삶에 대한 아무런 끌리움도
없다. 그것은 그저 모든 그릇된 삶의 기쁨이나 동물적 자아의 정열을
비판적으로 관조(觀照)할 따름이고, 그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다.
첫째번 것에 몸을 맡긴다고 하자. 우리들은 자기가 불합리한 생활을
하고 불행쪽으로 나가고 점점 깊숙히 그들 속으로 떨어져 들어감을 볼
것이다. 둘째번 것은 합리적 자아에 몸을 맡긴다고 하자. 우리들 속에는
삶에 대한 끌리움이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려고 생각하는 오직 한 가지 일 때문에,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어리석고 불가능함을 볼 것이다. 물론 합리적 의식을 위해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할 필요도 없고, 그러한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원체(原體)―신(神)―를 섬길 것인가, 그러나 무엇
때문에 신에게는? 만약 신이 계신다고 하면, 내가 아니라도 다른
봉사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담! 싫증을 느끼지 않을 동안은 이러한 인생의 유희도 보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싫증이 나기만 하면 도피하는 일, 스스로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야말로 솔로몬 이전, 불타 이전에 인류가 도달한 모순
투성이의 인생관이다. 더구나 현대의 사이비 지도자들은 인류를
거기로까지 후퇴시키려 하고 있다.
개성의 요구는 불합리의 정점에까지 다다르고 있다. 각성된 이성은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개성의 요구는 매우 증대되어 인간의
의식을 가리워버렸으므로, 그에게는 이성이 모든 생활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그는 그 삶의 의식에서 그의 이성이 부정하는
것을 모조리 빼앗아내 버린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같이 느낄 것이다.
그러나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그리고 어두움은 그것을 가리울 수
없는 것이다.
진리의 가르침은 이 딜레마를 ―무의미한 존재냐, 그 부정이냐를 ―알고
그것을 해결하고 있다.
항상 행복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불리워지던 진리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인간들이 그 동물아 때문에 찾고 있는 거짓된 행복 대신에
그들이 언젠가는 어디서든지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항상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실제적 행복을 가질 것을 보여주었다.
이 행복은 비단 단순히 추리에서 끄집어낸 그 무엇이 아니라, 어디에서
찾아내야 할 것도 아니고, 또 언젠가 어디서 얻어진다고 약속된 것 같은
행복도 아니다. 그것은 타락되지 않은 인간의 마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직접 그 쪽으로 이끌리는 인간에게는 가장 인연이 깊은 행복인
것이다.
대체로 인간은 극히 천진난만한 아기 아절부터, 인생에는 동물아의 행복
이외에 또 하나 그것보다 한층 더 높은, 동물아의 육욕 만족에 무관할
뿐더러, 동물아의 행복을 부정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커지는
것 같은 행복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인생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이 감정을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감정이 「사랑」이다.
인생이란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동물아의 활동이다. 이성이란 인간의
동물아가 그 행복을 위해서 따라가야 할 법칙이다. 사랑이란 인간의
유일한 합리적 활동이다.
어쨌든 동물아는 행복 쪽으로 끌리기 쉽다. 이성은 인간에게 개인적
행복이 잘못임을 가르쳐서 하나의 길을 남겨준다. 이 길에서의 활동이
사랑이다.
인간의 동물아는 행복을 요구한다. 합리적 의식은 인간에게 서로
싸우는 모든 존재의 불행을 보여주고, 그에게 동물아에 대한 행복이 있을
수 없음을 가르치고 인간에게 허용된 유일한 행복에는 다른 존재와의
투쟁도 없으며, 행복의 중단이나 포만이나 죽음의 환상이나 공포 따위의
것은 더욱더 없어야 할 것임을 가르쳐준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 자물쇠에만 맞게끔 만들어진 열쇠처럼, 자기의 영혼
속에 이성의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그에게 보여주는 그 행복을
그에게 가져다주는 감정으로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비단
그때까지의 인생의 모순을 해결할 뿐더러, 마치 그 모순 속에 인생
현현(顯現)의 가능을 찾아내고 있기조차 한 것 같이 여겨진다.
동물아는 자기의 목적 때문에 인간의 개성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그를 이끌어서 다른 존재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존재를
내주게 하도록 하려한다.
동물아는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 고통의 경감이야말로 사랑 활동의
주요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물아는 행복을 향해서 노력하면서도
숨 한번 쉴 때마다 최대의 악, 그 환상이 개성의 모든 행복을 파괴해
버리는 죽음 쪽으로 향해간다. 그런데 사랑은 감정은 이 공포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육체적
존재라고 하는 대단한 희생 쪽으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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