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사랑의 감정은 자기 생명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별관신사 2014. 3. 9. 06:58

모든 사람은, 사랑의 감정 속에는 무엇인가 특수한 것이 있어 인생의
일체 모순을 해결하고 인간에게 참된 행복과 그것에 대한 희구 속에 그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그러한 행복을 주는 것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감정은 극히 드물게만 나타나지 않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길게 계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결과 한층 더 나쁜 고통이 오는 일이
있지 않느냐?」라고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말한다.

이외 같은 자들에게는 사랑이 합리적 의식에서 생각되다시피 인생의
유일하고 정당한 표현으로 여겨지지 않고, 그저 인생에 있는 숱한 여러
가지 우연한 일들 중의 그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 여겨진다. 즉

인간이 살아 있을 동안에 부딪힐 무수한 기분 중의 그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인간은 때로 사치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과학이나 예술에 마음이 쏠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직무 명예 이득에

마음이 끌리고, 때로는 그 누구를 사랑해 보기도 한다. 사랑의 느낌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
우발적인 기분으로 인간이 일생 중에 부딪히는 다른 모든 기분과

마찬가지로 그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때때로 사랑은 생명의 올바른 흐름을 파괴하는
불규칙하고 외로운 기분이라는 단정을 책에서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뜰 때 올빼미가 느끼는 것과도 흡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상태는 일종의 특별한 것이고,

다른 모든 기분에서보다는 더욱 중대한 그 무엇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상태도 그들에게는 다른 모든 상태와 마찬가지로

불행하고, 속기 쉬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 .........그러나 누구를?
일시적인 것이라면 보람없다.

그렇다고 영원히 사랑하기란 더욱 불가능하다. ....」
이러한 말은 틀림없이, 사랑에는 인생의 불행에 대한 구제와 참된
행복과 비슷한 오직 하나의 그 무엇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막연한

의식을 표현하고 있음과 동시에,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사랑이 구제의 규법일 수 없다는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어 보라. 사랑은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저 그

누구를 사랑할 때에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만이
행복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없으므로 자연히
사랑에서의 구제도 없을 터이고, 사랑도 역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기만이며, 고통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동물적 생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도 배우고 남에게도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을 그렇게 해석한다. 아니 그 밖에는 따로이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우리들 모두가 어느덧 사랑이라는 말에
얽매어 있다는 개념(槪念)에조차 합당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 사랑을 받는 자에게 행복을 주는 선량한 활동이
아니다. 인생을 동물아의 생활로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사랑은 흔히 어머니가 자기의 어린 아기의 행복을 위해서, 굶주리고 있는

남의 아기를 젖혀두고 그 아기의 모친의 젖을 빼앗아서 까지라도 자기
자식의 양육에 애쓰는 감정과 같은 것이며, 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의
생활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굶주린 사람들로부터 마지막 한 조각의

빵마저도 빼앗으려고 애쓰는 감정과 같은 것이고, 또 그것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녀를 유혹하면서 그 사랑 때문에 자기도 괴로워하고,
그녀도 괴롭히고, 질투 때문에 자기도 그녀도 멸망케하는 감정과 같은

것이며, 또 더우기 그것은, 어떤 남자가 사랑 때문에 여자에게 매질하는
감정과 같은 것이다. 어떤 당파들이 자기 당파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당파에 해를 주는 것과 같은 감정이며,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그 일로 말미암아 주위의 사람들에게 슬픔이나
괴로움을 주는 것과 같은 감정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조국에
대한 모욕을 참을 수 없게 하여 피차의 전사자(戰死者)

부상자(負傷者)로써 싸움터를 덮어버리게 하는 감정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동물아의 행복에서 인생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활동은 그 표현이 고통일 뿐더러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할 정도의 곤란을 야기(惹起)시키는 것이다. 「사랑은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경험하는

선호(選好)나 편애(偏愛)라는 직접의 감정에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이것이 참된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랑에 관한 모든 논의는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그들의 의견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한 가지
일에 있다. 즉 사랑에 관해서 논의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은 그저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이성을 이용할 개인적 생활의 행복을 부정해

버린 사람들에게 한해서 만이 그런 것이고,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물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은 논의하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은 그네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에 몸을 맡기기

때문에 도저히 그것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표현은 논의없이, 즉 풀기 어려운 문제의 해결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내 자식 내 벗 내 아내 내 조국을 다른 모든 자식 벗
아내 조국보다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착한 일을 하려고 원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또 그밖에는 이해할 길
없는 것이다. 현재 나는 내 자식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고 있다. 즉 내 자식 아내 조국에 대해서 남의 자식 아내 조국에

대한 이상의 행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내 자식이나 아내나
조국만을 사랑한다는 일은 결코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동시에 자식 아내 조국 및 일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 사랑에 의해서 각각 다른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서
원하는 행복의 여러 조건은 모두 극히 밀접하게 서로 매여저 있으므로
사랑하는 자 한 사람을 위해서 하는 그의 사랑의 모든 활동은 다만 남을

위해서 하는 그의 활동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게까지도 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야말로 문제가 생긴다. 어떠한 사랑의 이름 아래서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 어떤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사랑을 희생시킬
것인가? 누구를 더욱 사랑하고 누구에게 보다 많은 선(善)을 행할
것인가? 아내에게 자식에게 아내와 자식에게 벗에게? 아내나 자식들이나

친구에게 대한 사랑을 다치지 않고 사랑하는 조국에 봉사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끝으로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필요하게 되는 자기의
개성을 어느 정도까지 희생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남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나는 어느 정도까지 내
일신에 관해서 마음을 괴롭힐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는 모두 소위
그들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해부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극히 간단한

것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해결은 극히 어려운 문제 인 것이다.
그리하여 옛적에 교법자(敎法者)의 한 사람이 예수에게 이것과 같은

문제, 즉 가까운 자란 누구냐? 라는 물음을 던졌던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매우 쉬운 것 같이 생각됨은
그저 인생의 참된 조건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 같은 신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선택된 사람들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다른 자에
대해서 어떤 자를 선택하는 일이 참된 사랑으로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이 아니다. 그들은 보통 생존하는 모든 것이 항상
직접적 의미에서나 비유적 의미에 있어서 서로 뜯어먹으면서 서로 남에게
의지해서 생활하고 있다는 생존조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이성 있는 존재로서 이 사실을 알고 또 보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들
일체의 육체적 행복은 그저 남을 다침으로써만이 다른 한편의 존재가
얻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상의 미신이나 과학적 미신이, 아무리 모든 만인에게 흡족하게 될
미래의 황금시대에 관해서 사람들에게 설교한다 한들, 이성 있는 사람은
그의 시간적 및 공간적 존재의 법칙이 일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일인

내지 만인에 대한 각자의 투쟁이라 함을 보고 또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세계의 생활을 형성하고 있는 생물의 이해관계에 얽힌 혼잡과 투쟁

속에서는,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듯이 선택된
사람을 사랑해 나감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비록 선택된 사람을
사랑한다하더라도 결코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라도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는 것이어서
사랑이란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일치하고 있듯이

남의 행복으로 지향된 활동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맨 처음에 가장 강한
사랑의 요구가 나타나고, 다음에는 약한 요구가 나타나는 것처럼 이
활동은 어떤 일정한 순서를 밟아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요구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아무런 순서도 없이 쉴새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령
여기에 내가 조금 사랑하는 굶주린 노인이 찾아와서,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자식들이 저녁으로 둔밥을 졸라댄다고 하자. 어찌 내가 현재의

적은 사랑의 요구와 미래의 큰 사랑의 요구를 저울질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이 교법사(敎法師)에 의해서 예수에게 던져진 것이다.
「가까운 자라 함은 누구냐?」 사실 누구에게 어떠한 정도로 봉사할

것인가를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은가? 사람들에게? 조국에?
조국인가 나의 벗에게인가? 나의 벗에게 인가 나의 아내에게 인가? 나의
아내에게 인가? 나의 아버지에게 인가? 나의 아버지에게 인가 나의

자식에게 인가? 나의 자식에 인가? 나 자신에게 인가? (요구될
경우에는 언제나 남에게 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첫째로 이것은 모두 사랑의 요구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완전히 서로

얽혀 있으므로 어떤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은 다른 요구를 만족시킬 가능을
남에게서 빼앗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장래에 나의 자식을
위해서 그 구걸되는 옷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얼어 죽어 가는 아이에게

입혀주지 않아도 괜찮다면, 또 나의 장래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른 사랑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이치다.
조국에 대한 사랑, 선택된 직업에 대한 사랑, 만인에 대한 사랑 등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사람이 장래의 가장 큰
사랑의 요구를 명분으로 해서 현재의 작은 사랑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람도 아무리 전력을 다해서 그것으로 원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미래를 내세워 현재의 요구를 거절해야 좋을지 계산할 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으므로 자연히 언제나 자기에게 유쾌한 사랑의

표시를 선택하는 것, 즉 사랑이라는 명분에서가 아니라 자기 개성의
이름에게 행동하는 것이 된다. 만약 인간이 장래의 보다 큰 다른 사랑의
출현을 구실로 현재의 가장 적은 사랑의 요구를 억누르는 것을 옳다고

결정한다면, 그는 자신이나 남을 속여서 자기 일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셈이 된다.
장래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그저 현재에서의 활동이다.

현재에서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자는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이다.
이와 마찬가지 일이 생활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들의 인생관에서도
생기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고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동물로서 생존하고 인생에 관해서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동물적 생존이 올바르고 행복스러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동물이라면, 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것, 즉 자기의 새끼 늑대를
사랑하고, 자기의 양떼만을 사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자기들이
자기의 새끼늑대를 사랑하고, 자기의 양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늑대도 역시 자기들의 새끼 늑대를 사랑하고 다른
양떼들도 자기들의 무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현재 있는 그들의 의식 정도에서 가능한 사랑이며

생활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이 있는 존재이므로 다른 존재도 역시 그 자식이나
동족에 대해서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 따라서 이들 사랑의 감정은

자연히 서로 충돌하게 되고, 행복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랑의 관념과는
아예 상반되는 무슨 일을 야기시킬 것임에 틀림없음을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동믈적인 어찌할 도리가 없는 감정을
시인(是認)하거나 강조하는 데만 아니라, 자기의 이성을 이용해서 이
감정에 유달리 중요성을 준다면, 이 감정은 선량하지 않을 뿐더러

인간에게서 가장 몹쓸, 가장 두려운 동물적인 것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옛적부터 알려져온 진리다.) 그리고 복음서(福音書)에
씌어져 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너희들 내부의 불이 꺼지면 그

어둠은 얼마나 크랴!」 만약 인간 속에 자기와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오늘날 인간 사이에 있는 약 99%는
그들이 찬양해서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짓된 감정―동물의 생활이 인간의

생활과 비슷한 정도의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랑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 행복의 어떤 조건을 다른 조건보다 낫다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의 아내나, 자식이나, 벗을
사랑한다고 할 경우에는, 그는 그저 그의 생활상 처의 존재, 자식의 존재,
벗의 존재가 그의 개인 생활의 행복을 더해 줌을 말함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선호(選好)의 관계는 마치 생존의 인생에 대한
관계와 매일 반이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서 생존이

인생이라고 불리우듯이, 이러한 자들에 의해서 개인적 생존의 어떤 조건을
다른 조건보다 낫다고 하는 일이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일정한 존재, 예컨대 자기 자신에 대한 선호든가 혹은

일정한 직업, 다시 말하면 과학이라든가 예술에 대한 선호를 우리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이러한
선호의 감정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인간의 동물적 생활의 모든

복잡성을 구성하는 것이어서 사랑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감정은 사랑의 주요한 특징, 즉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결과로 하는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호의 출현이 맹렬함은 그저 동물아의 정력(精力)을 보여주는
데 불과하다.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좋아한다는 정열이 그릇된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것이고, 사실은 우리들이 참된 사랑을

접목(接木)해서 그 과일을 얻을 수 있는 야생(野生)의 어린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목(臺木)은 사과나무가 아니므로 열매를 맺지 않고,
설령 맺는다 하더라도 맛있는 사과 대신에 쓴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이

그러한 정열은 사랑이 아니므로 사람들을 착하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층 더 많은 악을 주는 것이다. 이 까닭으로 해서 과학에 대한, 예술에
대한, 조국에 대한 사랑에까지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그토록 찬양되고 있는 부인에 대한, 자식에 대한, 벗에 대한 사랑도
동물적 생활의 어떤 조건을 일시적으로 다른 조건보다 좋아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고, 세계 최대의 악을 가져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