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참된 사랑은 개인적 행복 부정의 결과다.

별관신사 2014. 3. 10. 03:33

참된 사랑은 오직 동물아의 행복을 부정함으로써만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이 자기로서는 동물아의 행복 따위는

없다고 깨달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의 생명의
액즙(液汁)은 모조리 이미 동물 아닌 야생의 어린 나무 줄기의 모든 힘을
받아서 번성한 참된 사랑의 높고 아담한 접지(接枝)에 옮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사랑의 접목이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다시피
그는 말했다. 「이 접목, 즉 그의 사랑은 과일을 맺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나무 가지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조리 잘려버려지라고.」

「자기의 목숨을 보전(保全)하려는 자는 이것을 잃고, 나를 의해서 그
목숨을 잃는 자는 그것을 보전하리라」고 함을 이해했을 뿐더러,
생명으로써 그것을 이해한 자만이―즉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망치고, 이 세상에서의 자기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한 삶에서
그것을 보전한다는 것을 이해한 자만이―오직 그자만이 참된 사랑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보다 너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못한
자니라. 나보다 너의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도 나에게는 합당치
못하니라. 너희가 만약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너희는 너희의 적을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사람들이 개인성(個人性)을 부정함은 흔히 생각되고 있듯이 아버지나,

자식이나, 아내나, 벗이나, 선량하고 사랑할만한 자들에 대한 사랑의
결과가 아니고, 오직, 개인적 생존의 무의미함에 대한 의식, 개인적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의식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적

생활을 부정한 결과 참된 사랑을 인식하고, 처 자식 벗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다른 존재를 자기의 동물아 보다 낫다고 하는 선정(選定)이다.

같은 개성의 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개성에 가까운 이익을 잊는 것,
그것은 소위 말하는 사랑, 자기 희생으로까지 성장되지 않은 경우에 흔히
일어나는 일로서, 자기의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 어떤 존재를 다른 것

이상으로 낫다고 하는 선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활동적인
사랑이 되기 전에는 일정한 상태로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사랑의 시초,
그 근원은 흔히 생각되고 있듯이 이성을 흐리게 하는 따위 감정의

격발(激發)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이고 밝은, 따라서 침착한 기쁨에 찬
아이들이나 이성적인 사람들에 있어 독특한 상태다.
이 상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호감(好感)의 상태다. 그것은

어린이에게는 척생적(天生的)으로 갖춰져 있는 것이지만, 어른에게는 그저
개인적 행복을 부정할 경우에만 비로소 생기고, 그 부부의 정도에 따라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들을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이라도 괜찮다. 나는 아무 것도 소용없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말과 함께 우리들은 몇 번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상태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단 한번이라도 사람들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품고 있는 순간에,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게 해 봄이 좋다. 「나는 어떻든 괜찮다. 나는 아무 곳도
소용없다」고. 그리고 비록 잠깐만이라도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도록 해 봄이 좋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부터
얼마나 강렬하게, 여태껏 갇혀 있던 미망인에 대한 호감이 용솟음쳐
나오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사실 다른 존재를 자기 이상으로 낫다고 보는 선정이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 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양(量)은 분수(分數)의 양과도 같다. 그 분자(分子)는

남에게 대한 우리들의 편애(偏愛)라든가 동정이라든가 하는 우리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분모(分母) 쪽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어서, 이것은 내가 나의 동물아에 주는 의미 여하에 따라서 내

손으로 무한히 더할 수도 있고, 또 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 관해서 또 그 단계에 관한 오늘날의 세속의 판단은 분모를
엄두밖에 두고 분자에만 의한 분수량에 관한 판단이다.

참된 사랑은 항상 그 근처에 개인적 행복의 부정과 거기서 생기는
만인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오직 이 일반적 호감 위에야말로 어떤
사람들―친척이든, 남에 대한 것이든 간에 참된 사랑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만이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주고, 동물아와
합리적 의식과의 외견상으로만 모순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 근처에 개성의 부정이 없는 그 결과로서―만인에 대한 호감이 없는

그 사랑은 그저 동물적 생활에 불과하고, 이 가공적(架空的)이며 사랑이
없는 생활과 동등하든가 혹은 그 이상의 불행, 그 이상의 불합리에 부딪힐
것이다. 사랑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정열적인 감정은 생존 투쟁을

제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성을 쾌락의 추구(追求)로부터
해방시키지도 못하며, 죽음에서 구해 주지도 못하고, 오로지 인생을
어둡게 하고, 투쟁을 격심케 하고, 자기를 위한 또 남을 위한 쾌락에

갈망을 더하고, 자기와 남을 위해서 더욱더 죽음의 공포를 크게 할
따름이다.
자기의 생활을 동물아의 생존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의 생활과는 전혀 상반되는 활동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오로지 동물적 생존의 행복 속에서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무엇보다도 첫째로 행복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설사 진실하게 사랑의 활동에
헌신하고자 생각하더라도 그가 인생을 알고 인생에 대한 그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사랑을 할 상태가 되지못할 것이다. 그 생활을

동물적 자아의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는 그 생애를 재산을 통해 얻고,
그것을 모으므로써 자기의 동물적 행복의 수단을 더하기에
급급(汲汲)하고, 남들을 자기의 동물적 행복에 봉사케 하고, 이러한

행복을 자기의 개인적 행복에 더욱 많이 필요했던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가 자기의 생활을 자기 손으로 하지 않고 남들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거늘 어찌 자기의 생명을 줄 수 있을까? 더욱 그에게 그

이상으로 어려운 것은 자기가 선택한 사람들 중의 누구에게 그 저축된
행복을 분배하고, 누구에게 봉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기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생활의

행복을 위해서 남에게서 빼앗고 있는 쓸데없는 것을 버리고 다음에는 또
한가지 불가능한 일, 즉 사람들 중에서 누구에게 자기의 생명을 바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는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전에 우선

자기를 희생시키고, 선(善)을 하기 전에 우선 미워하기, 즉 악(惡)을
그만두고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서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함을 그만두어야 한다.

개인적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따라서 이 거짓된 행복에 대해서
마음을 괴롭히지 말고, 그럼으로써 자기 내부에서 인간의 특유한 개인에
대한 호감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사람들에게만이 항상 자신과 남을

만족시키는 사랑의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생활의 행복은
마치 식물의 행복이 빗 속에 있듯이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무엇에도 가리워지지 않은 식물이 자기는 어느 방향으로 성장함이 좋을까,

빛은 좋은 것인지 어떤지, 더욱 다른 좋은 빛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따위는 물을 소도 없으며, 또 묻지도 않고,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유일한 빛을 받아 그쪽으로 자라나가는 것과도 같이, 개인적 행복을

부정한 사람은 남들로부터 얻은 것들 중에서 무엇을? 사랑하는 존재
중에서 누구에게 주어야 하느냐는 것, 현재 요구하고 있는 사랑이
사랑으로서 더 나은 사랑이 따로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오직 그의 손이 닿는 사랑, 그의 앞에 있는 사랑에 자기를 바치고, 자기의
생존을 바치고 있다. 오직 이러한 사랑만이 인간의 합리적 천성에 충분한
만족을 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