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들―바리새의 무리들은「이 불행한 인생은 무엇 때문이냐?」하는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인생은 불행하다. 항상
그랬으며 또 그래야 할 것이다. 인생의 행복은 인생의 현재에는 없다.
생활에 이르기까지의 과거와 생활이 끝난 뒤의 미래에 있을
따름이다.」그리고 바라문교도들도, 불교도들도, 유교도들도,
유태교도들도, 기독교적 바리새파도 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의
생활은 악이다. 이 악의 설명은 과거에 속한다. 세계와 인간의 출현에
있다. 현세악의 속죄(贖罪)는 내세(來世)에 있다. 무덤 저 편에 있다. 이
현세아닌 내세의 생활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들이 가르치는 가르침을 믿고, 우리들이 명하는 의식을
실행하는 일이라고.
그런데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그와 같은 행복을 위해서 사는 바리새인 자신의 생활을 보며 그 설명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그 해답의 뜻을 깊이 캐묻지도 않고, 애당초
그들은 믿지도 않고 학자들에게 달려간다.
「우리들이 동물생활에서 오는 이외의 생활에 관한 모든 가르침은 무학
무지의 결과이다 」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너의 생활의 합리성에
관한 너의 의문은, 말하자면 쓸데없는 공상이다. 구주(救主)의 생활,
지구의 생활, 인간의 생활, 동물의 생활, 식물의 생활은 모두 제각기의
법칙이 있으므로 우리들은 그것을 연구해서 우주의 기원, 인간의 기원,
동식물의 기원, 그 밖에 만물의 기원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들이 또
장차의 세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태양은 어떻게 식어질까
하는 따위의 일에서, 인간이나 모든 동식물의 과거는 무엇이었으며, 장차
어찌될 것인가 함도 연구하고 있다. 우리들은 만물이 우리들이 말하는
대로의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도, 증명할 수도 있다. 우리들의
연구는 그 뿐만이 아니고 인간의 행복 증진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러나 너의 생활과 너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대해서 우리들은 네가
우리들이 아니라도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즉 너는 살고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잘 사는 것이 좋다. 이외에는 새삼스럽게 한마디도 덧붙일
것이 없다.」
이와 같이하여 그의 의문에 대해서 바리새파로부터도 학자로부터도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한 회의자(懷疑者)는 자기 개성의 충동(衝動)
이외에는 생활상 아무런 지침도 없는, 지금까지 있는 대로의 처지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회의자 중의 어떤 자들은 파스칼의 의견에 따라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체 바리새파의 사람들이 그들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위협하고 있는 일은 정말일까?」이렇게 생각하고서
그들은 틈을 타서 바리새파의 지시를 모조리 실천해 본다. (별로 손해는
없다. 자칫하면 큰 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학자의 의견을 좇아서 당장에 현세 이외의 모든 생활과 일체의 종교적
의식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혼자만이 아니다.
옛적부터 모두들 이렇게 살아왔으며 현재에 살아있기도 하다. 이러나
저러나 될 대로 밖에는 되지 않는 법이야.」―그리하여 이 차이는 어느
편에든지 아무런 우월도 주지 않는다. 전자도 후자도 다같이 현재의 생활
의의에 관해서는 전혀 아무런 해석조차도 갖지 못한 채로 남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인간의 생활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 자리에 들기까지 행위의
연속이다. 인간은 매일 그에게 가능한 여러 가지 행위 속에서 그가 하는
일을 끊임없이 골라야 한다. 더구나 천국생활의 신비를 설명해 주는
바리새파의 가르침도,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연구해서 저들 미래의 운명에
관한 결론을 주는 학자들의 가르침도, 다같이 그러한 행위의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행위의 선택에 일정한 지침을 갖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는 수 없이 이성(理性)의
판단을 떠나서 인류 개개의 사회에 항상 존재해 왔으며, 또 현재 존재하고
있는 생활의 외적 지침에 따르게 된다.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인생은 불행하다. 항상
그랬으며 또 그래야 할 것이다. 인생의 행복은 인생의 현재에는 없다.
생활에 이르기까지의 과거와 생활이 끝난 뒤의 미래에 있을
따름이다.」그리고 바라문교도들도, 불교도들도, 유교도들도,
유태교도들도, 기독교적 바리새파도 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의
생활은 악이다. 이 악의 설명은 과거에 속한다. 세계와 인간의 출현에
있다. 현세악의 속죄(贖罪)는 내세(來世)에 있다. 무덤 저 편에 있다. 이
현세아닌 내세의 생활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들이 가르치는 가르침을 믿고, 우리들이 명하는 의식을
실행하는 일이라고.
그런데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그와 같은 행복을 위해서 사는 바리새인 자신의 생활을 보며 그 설명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그 해답의 뜻을 깊이 캐묻지도 않고, 애당초
그들은 믿지도 않고 학자들에게 달려간다.
「우리들이 동물생활에서 오는 이외의 생활에 관한 모든 가르침은 무학
무지의 결과이다 」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너의 생활의 합리성에
관한 너의 의문은, 말하자면 쓸데없는 공상이다. 구주(救主)의 생활,
지구의 생활, 인간의 생활, 동물의 생활, 식물의 생활은 모두 제각기의
법칙이 있으므로 우리들은 그것을 연구해서 우주의 기원, 인간의 기원,
동식물의 기원, 그 밖에 만물의 기원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들이 또
장차의 세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태양은 어떻게 식어질까
하는 따위의 일에서, 인간이나 모든 동식물의 과거는 무엇이었으며, 장차
어찌될 것인가 함도 연구하고 있다. 우리들은 만물이 우리들이 말하는
대로의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도, 증명할 수도 있다. 우리들의
연구는 그 뿐만이 아니고 인간의 행복 증진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러나 너의 생활과 너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대해서 우리들은 네가
우리들이 아니라도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즉 너는 살고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잘 사는 것이 좋다. 이외에는 새삼스럽게 한마디도 덧붙일
것이 없다.」
이와 같이하여 그의 의문에 대해서 바리새파로부터도 학자로부터도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한 회의자(懷疑者)는 자기 개성의 충동(衝動)
이외에는 생활상 아무런 지침도 없는, 지금까지 있는 대로의 처지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회의자 중의 어떤 자들은 파스칼의 의견에 따라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체 바리새파의 사람들이 그들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위협하고 있는 일은 정말일까?」이렇게 생각하고서
그들은 틈을 타서 바리새파의 지시를 모조리 실천해 본다. (별로 손해는
없다. 자칫하면 큰 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학자의 의견을 좇아서 당장에 현세 이외의 모든 생활과 일체의 종교적
의식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혼자만이 아니다.
옛적부터 모두들 이렇게 살아왔으며 현재에 살아있기도 하다. 이러나
저러나 될 대로 밖에는 되지 않는 법이야.」―그리하여 이 차이는 어느
편에든지 아무런 우월도 주지 않는다. 전자도 후자도 다같이 현재의 생활
의의에 관해서는 전혀 아무런 해석조차도 갖지 못한 채로 남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인간의 생활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 자리에 들기까지 행위의
연속이다. 인간은 매일 그에게 가능한 여러 가지 행위 속에서 그가 하는
일을 끊임없이 골라야 한다. 더구나 천국생활의 신비를 설명해 주는
바리새파의 가르침도,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연구해서 저들 미래의 운명에
관한 결론을 주는 학자들의 가르침도, 다같이 그러한 행위의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행위의 선택에 일정한 지침을 갖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는 수 없이 이성(理性)의
판단을 떠나서 인류 개개의 사회에 항상 존재해 왔으며, 또 현재 존재하고
있는 생활의 외적 지침에 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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