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침은 아무런 합리적 설명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항상 뭇
사람의 행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지침이라
함은 인간 사회 생활의 습관이며, 이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 강해지면
질수록 생활의 뜻에 대한 이해가 사람들에게 덜해지는 것이다. 이 지침은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못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와 곳에 따라서
가장 복잡하게 되기 쉬운 사물이나 행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인에게 있어 양친의 위패(位牌)에 드리는 촛불인 것이다.
그것은 마호멧트 교도에게는 명소 고적(名所古蹟)에 대한 순례이지만,
그것이 인도인에게는 어느 정해진 기도(祈禱)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군인에게는 군기(軍旗)에 대한 충성과 군복(軍服)에 대한 명예이며,
사교인(社交人)에 대해서는 결투(決鬪)이며, 산(山) 사람에 대해서는
근친(近親) 원수 갚기인 것이다. 그것은 일정한 날에 대한 일정한
음식물이며, 자기의 자식에 대한 어떤 종류의 교육이다. 그것은
방문(訪問)이고 주택에 대한 일정한 장식이고, 장례 출산 결혼 등에 대한
일정한 축제이다. 그것은 모든 생활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건과 행위의
무한량이다. 그것은 예의 습관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 아니 가장 흔히는
의무, 신성한 의무라고까지도 이름 붙여지는 그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리새파나 학자들의 인생에 대한
설명 이외에 이 지침에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 가든지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의 주위에서 가슴에 벅찬 신념과 외견적 장엄성을
지니고 이러한 일들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자기의
생활에 대해서 아무런 합리적인 해석을 갖지 않은 채 자기도 같은 일을
시작할 뿐더러, 그러한 일에 합리적인 뜻을 주려고 애쓴다. 그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설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일들은 합리적인 뜻을 가지고 있고, 가령 그러한 의미의 설명이
자기에게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스스로 타이른다. 그런데 그 이외의 사람들조차 대부분은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갖지 않고도 그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저들이 그러한 일을 행하고 있음은, 그저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일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있기만 하고, 그 실책은 저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하여
사람들은 본심에서가 아니라, 서로 남을 속이면서 아무런 합리적 설명이
없는 일을 실행하는데 더욱 젖어갈 뿐더러, 그러한 일종의 신비스러운,
저들 자신들도 알 수 없는 의미를 붙이는데 젖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하고 있는 일의 뜻을 저들이 이해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이러한 일이 저들 자신에게 의심스러우면 의심스러울수록 저들이 더욱더
그것을 중대시하고 더욱 장엄하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해서
돈 있는 자도 가난한 자도, 주위 사람들이 하는 일을 오로지 실행하면서
그토록 오랜 옛적부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실행되고, 저들에
의해서 이토록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일이 참된 과업이 아닐 리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자기들의 의무,
신성한 의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설령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더라도, 남들은―그것도 저들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일은 잘 모르는데―알고
있다고 억지로 믿으려고 애쓰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나가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생을 받아 이승에 태어나서 생장한다. 그리고 주위의
존경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명예 있는 백발 노인들까지도 끼어 있다.
인생이라고 불리우는 이 생존의 혼잡을 보고 이 무의미한 혼잡이야말로
인생이며, 따로 인생이라곤 없다고 확신하고는, 그 문 앞에서 서로
밀치다가는 가버린다. 이와 같이하여 아직 한번도 사람의 집회(集會)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입구에서 밀치고 떠밀면서 법석대는 군중을 보고서도
그것을 집회라고 앞질러 생각하고는 출입문 앞에서 조금 밀치다가는 아픈
옆구리를 부둥켜 안고, 자기는 집회에 갔다 왔다는 확신을 품고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산을 깍아내고, 세계를 날아다닌다. 전기 현미경 전화 전쟁
의회 자선 사업 당파 싸움 대학 학회, 박물관...... 이것이야말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역 전쟁 교통 과학 예술 등에 수반되는 시끄럽고, 착잡하고,
떠들석하는 인간의 활동 전부는 대부분이 그저 인생의 문간에 모여있는
어리석은 군중의 잡답(雜踏)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지침이라
함은 인간 사회 생활의 습관이며, 이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 강해지면
질수록 생활의 뜻에 대한 이해가 사람들에게 덜해지는 것이다. 이 지침은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못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와 곳에 따라서
가장 복잡하게 되기 쉬운 사물이나 행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인에게 있어 양친의 위패(位牌)에 드리는 촛불인 것이다.
그것은 마호멧트 교도에게는 명소 고적(名所古蹟)에 대한 순례이지만,
그것이 인도인에게는 어느 정해진 기도(祈禱)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군인에게는 군기(軍旗)에 대한 충성과 군복(軍服)에 대한 명예이며,
사교인(社交人)에 대해서는 결투(決鬪)이며, 산(山) 사람에 대해서는
근친(近親) 원수 갚기인 것이다. 그것은 일정한 날에 대한 일정한
음식물이며, 자기의 자식에 대한 어떤 종류의 교육이다. 그것은
방문(訪問)이고 주택에 대한 일정한 장식이고, 장례 출산 결혼 등에 대한
일정한 축제이다. 그것은 모든 생활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건과 행위의
무한량이다. 그것은 예의 습관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 아니 가장 흔히는
의무, 신성한 의무라고까지도 이름 붙여지는 그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리새파나 학자들의 인생에 대한
설명 이외에 이 지침에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 가든지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의 주위에서 가슴에 벅찬 신념과 외견적 장엄성을
지니고 이러한 일들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자기의
생활에 대해서 아무런 합리적인 해석을 갖지 않은 채 자기도 같은 일을
시작할 뿐더러, 그러한 일에 합리적인 뜻을 주려고 애쓴다. 그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설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일들은 합리적인 뜻을 가지고 있고, 가령 그러한 의미의 설명이
자기에게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스스로 타이른다. 그런데 그 이외의 사람들조차 대부분은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갖지 않고도 그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저들이 그러한 일을 행하고 있음은, 그저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일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있기만 하고, 그 실책은 저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하여
사람들은 본심에서가 아니라, 서로 남을 속이면서 아무런 합리적 설명이
없는 일을 실행하는데 더욱 젖어갈 뿐더러, 그러한 일종의 신비스러운,
저들 자신들도 알 수 없는 의미를 붙이는데 젖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하고 있는 일의 뜻을 저들이 이해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이러한 일이 저들 자신에게 의심스러우면 의심스러울수록 저들이 더욱더
그것을 중대시하고 더욱 장엄하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해서
돈 있는 자도 가난한 자도, 주위 사람들이 하는 일을 오로지 실행하면서
그토록 오랜 옛적부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실행되고, 저들에
의해서 이토록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일이 참된 과업이 아닐 리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자기들의 의무,
신성한 의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설령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더라도, 남들은―그것도 저들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일은 잘 모르는데―알고
있다고 억지로 믿으려고 애쓰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나가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생을 받아 이승에 태어나서 생장한다. 그리고 주위의
존경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명예 있는 백발 노인들까지도 끼어 있다.
인생이라고 불리우는 이 생존의 혼잡을 보고 이 무의미한 혼잡이야말로
인생이며, 따로 인생이라곤 없다고 확신하고는, 그 문 앞에서 서로
밀치다가는 가버린다. 이와 같이하여 아직 한번도 사람의 집회(集會)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입구에서 밀치고 떠밀면서 법석대는 군중을 보고서도
그것을 집회라고 앞질러 생각하고는 출입문 앞에서 조금 밀치다가는 아픈
옆구리를 부둥켜 안고, 자기는 집회에 갔다 왔다는 확신을 품고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산을 깍아내고, 세계를 날아다닌다. 전기 현미경 전화 전쟁
의회 자선 사업 당파 싸움 대학 학회, 박물관...... 이것이야말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역 전쟁 교통 과학 예술 등에 수반되는 시끄럽고, 착잡하고,
떠들석하는 인간의 활동 전부는 대부분이 그저 인생의 문간에 모여있는
어리석은 군중의 잡답(雜踏)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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