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지적 과정이 아니다. 당신 자신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과 당신 자신에 관해 아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인데,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에 관해 쌓은 지식은 언제나 과거의 것이며
그리고 과거의 짐을 지고 있는 마음은 슬픈 마음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에 관해서 아는
일은 언어나 기술 혹은 과학을 배우는 것과 다르다-이런 것들을 알려면 축적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한다는 게 불합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심리적인
영역에서 보자면, 당신 자신에 관해서 아는 일은 언제나 현재 속에서의 일이고 지식은
언제나 과거 속에 있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이 과거속에서 살고 과거에
만족하듯이, 지식은 우리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박식한 사람,
영리한 사람, 능란한 사람을 숭앙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항상 배우고, 매순간
배우고, 관찰하고 들음으로써 배우고, 보고 행함으로써 배운다면, 배운다는 것은 과거가 없는
끊임없는 운동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에 관해서 점진적으로, 자꾸 더 보태가며, 조금씩 배울 거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얻은 지식을 통해서 탐구하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대단한 감수성을 함축한다.
어떤 관념(생각)이 있는 자리엔 감수성이 없는데, 관념이란 과거의 것이며, 그럼에도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은 더 이상 민첩하지도, 유연하지도, 주의 깊지도 않다.
우리들 대부분은 육체적으로 조차도 민감하지 못하다. 우리는 과식하고, 올바른 규정식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며, 담배를 지나치게 피우고 과음함으로써 우리의 몸은 뚱뚱해지고 무감각하게
된다-유기체 자체의 주의력의 질이 둔감해지는 것이다. 유기체 자체가 둔감하고 무겁다면
어떻게 민첩하고, 민감하고, 맑은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와서
닿는 것들에 대해서는 민감할는지 모르지만, 삶의 모든 함축된 뜻에 대해 완전히
민감하기 위해서는 유기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전적인 운동이다.
어떤 것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그것과 살아야 하고, 그것을 관찰해야 하고, 그것의 내용을
모두 알아야 하고, 그것의 본질, 구조, 운동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함께
살아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정적 상태가 아니라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과 더불어 살려면 당신의
마음 역시 살아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만일 마음이 의견들, 판단들, 그리고
가치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을 수 없다.
당신 자신의 머리와 가슴의 운동, 당신의 전존재의 운동을 관찰하려면 당신은 자유로운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말하자면 동의나 반대를 하지 않고, 논쟁에서 어떤 편에 서지
않고, 단지 말로만 싸우지 않고, 이해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좇아야 한다-그리고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강물의 아름다움을 보고 나무 사이로 부는 미풍을
듣는 법을 아는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보고 듣는 법을 대부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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