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인간은 여러 세기 동안 줄곧 자기 자신 이상의 어떤 것.

별관신사 2015. 6. 17. 16:02

인간은 여러 세기 동안 줄곧 자기 자신 이상의 어떤 것, 물질적복지 이상의 어떤 것을 찾아
왔다-즉 우리가 진리나 신 혹은 실재라고 부르는 어떤 것, 어떤 무시간적 상태, 다시 말해서
환경이나 생각 혹은 인간의 타락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아 왔다.

인간은 줄곧 물어 왔다-이건 도대체 무엇인가?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는 삶의
엄청난 혼란, 잔인성, 저항, 종교의 끝없는 분열, 이데올로기와 국민적 감정(국적) 등을 보면서
깊은 좌절감을 느끼며 묻는다-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넘어서 뭐가 있는가?

그리고 그가 줄곧 찾았던 수많은 이름의 이름없는 것을 찾지 못하자 그는 신앙을 길렀다-어떤
구세주 혹은 관념에 대한 신앙-그리고 반드시 폭력을 초래하는 신앙을.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란 사회-그것이

공산주의 사회이든 아니면 이른바 자유 사회이든간에-에 따른 행동 규범을 세우려고 한다.
가령 우리가 힌두교도이든 회교도이든 기독교도이든 혹은 그 어디에 속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
전통의 일부로서의 행동 기준을 받아 들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 혹은 그릇된

행동인지, 무엇이 옳은 혹은 그릇된 생각인지 말해 주는 사람을 찾으며, 이러한 모범을 따라
우리의 행동과 생각은 기계적이 되고 우리의 반응은 자동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들 속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는 우리의 선생들에 의해, 권위자들에 의해, 책들과 성인들에 의해
숟갈로 떠먹여지듯 양육되었다. 우리는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저 언덕들과산 너머, 그리고 지구의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그러고는 그들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만족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말에 의지해서 살며 우리의 삶이 경박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얻어 들은 것으로 사는 헌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바에 따라 살았고, 우리의
의도나 성정에 의해 이끌려왔으며 여러 조건들과 환경에 의해 받아들여지도록 강요되어 왔다.

우리는 온갖영향의 결과이며, 우리 속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발견한 게 아무것도 없다. 독창적이고 원래대로이며 명징한 게 아무것도 없다.
신학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들어왔다-즉

우리가 어떤 의식을 행하고, 무슨 기도나 염불을 되풀이 하고, 어떤 모범을 따르고, 욕망을
억제하고, 생각을 통어하고, 정열을 승화시키고, 탐욕과 성욕에서의 탐닉을 억제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마음과 몸의 충분한 시달림이 있은 뒤에, 이 보잘 것 없는 삶을 넘어서 뭔가를

발견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 세기동안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이 해온 일인 바,
그들은 그러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격리되거나, 사막이나 산 혹은 동굴 같은 데로
가거나, 혹은 걸식을 하며 이 마을 저 마을로 방랑을 하거나, 아니면 수도원 같은 집단 속에

들어가 기성의 어떤 모범에 순응하고자 한다. 그러나 억지로 시달린 마음, 찢어진 마음, 즉 모든
혼란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 다시 말해서 바깥 세계를 거부하고 훈련과 순응을 통해서
무디어진 그런 마음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 찾아 헤맸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 자신의
일그러짐(의곡)을 따라 발견하게 될 따름이다.

크리슈나무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