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인간의 탐구

별관신사 2014. 8. 16. 04:13

인간의 탐구-시달림 당한 마음-전통적 접근-존경할 만함의 함정-인간과 개인-실존의
싸움-인간의
본바탕-책임-진실-자기 변모-정력 낭비-권위로부터의 자유@]


인간은 여러 세기 동안 줄곧 자기 자신 이상의 어떤 것, 물질적복지 이상의 어떤 것을 찾아
왔다-즉 우리가 진리나 신 혹은 실재라고 부르는 어떤 것, 어떤 무시간적 상태, 다시 말해서
환경이나 생각 혹은 인간의 타락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아 왔다.

인간은 줄곧 물어 왔다-이건 도대체 무엇인가?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는 삶의
엄청난 혼란, 잔인성, 저항, 종교의 끝없는 분열, 이데올로기와 국민적 감정(국적) 등을 보면서
깊은 좌절감을 느끼며 묻는다-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넘어서 뭐가 있는가?
그리고 그가 줄곧 찾았던 수많은 이름의 이름없는 것을 찾지 못하자 그는 신앙을 길렀다-어떤
구세주 혹은 관념에 대한 신앙-그리고 반드시 폭력을 초래하는 신앙을.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란 사회-그것이
공산주의 사회이든 아니면 이른바 자유 사회이든간에-에 따른 행동 규범을 세우려고 한다.
가령 우리가 힌두교도이든 회교도이든 기독교도이든 혹은 그 어디에 속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

전통의 일부로서의 행동 기준을 받아 들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 혹은 그릇된
행동인지, 무엇이 옳은 혹은 그릇된 생각인지 말해 주는 사람을 찾으며, 이러한 모범을 따라
우리의 행동과 생각은 기계적이 되고 우리의 반응은 자동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들 속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는 우리의 선생들에 의해, 권위자들에 의해, 책들과 성인들에 의해
숟갈로 떠먹여지듯 양육되었다. 우리는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저 언덕들


산 너머, 그리고 지구의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그러고는 그들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만족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말에 의지해서 살며 우리의 삶이 경박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얻어 들은 것으로 사는 헌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바에 따라 살았고, 우리의

의도나 성정에 의해 이끌려왔으며 여러 조건들과 환경에 의해 받아들여지도록 강요되어 왔다.
우리는 온갖
영향의 결과이며, 우리 속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발견한 게 아무것도 없다. 독창적이고 원래대로이며 명징한 게 아무것도 없다.
신학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들어왔다-즉
우리가 어떤 의식을 행하고, 무슨 기도나 염불을 되풀이 하고, 어떤 모범을 따르고, 욕망을

억제하고, 생각을 통어하고, 정열을 승화시키고, 탐욕과 성욕에서의 탐닉을 억제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마음과 몸의 충분한 시달림이 있은 뒤에, 이 보잘 것 없는 삶을 넘어서 뭔가를

발견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 세기동안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이 해온 일인 바,
그들은 그러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격리되거나, 사막이나 산 혹은 동굴 같은 데로
가거나, 혹은 걸식을 하며 이 마을 저 마을로 방랑을 하거나, 아니면 수도원 같은 집단 속에

들어가 기성의 어떤 모범에 순응하고자 한다. 그러나 억지로 시달린 마음, 찢어진 마음, 즉 모든
혼란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 다시 말해서 바깥 세계를 거부하고 훈련과 순응을 통해서
무디어진 그런 마음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 찾아 헤맸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 자신의

일그러짐(의곡)을 따라 발견하게 될 따름이다.

그래서 이 불안하고 죄 많고 무서우며 경쟁적인 실존을 넘어서 뭔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접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통적인
접근 방법은 둘레(주변)로부터 안으로 향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시간을 바치고 수련과

포기(단념)를 통해서 점차 그 내면의 꽃, 그 내적 아름다움과 사랑에 이르는
것인데-이것은 사실상 우리를 좁고 왜소하고 가짜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일을 다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조금씩 조금씩 벗겨내고, 시간을 들이고, 내일 하리라, 내생에

하리라는 것이다-그러다가 마침내 중심에 이르렀을 때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는데 왜냐하면 마음은 이미 무능력하고 무디고 무감각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관찰하고 나서 어떤 사람은, 그러면 도대체 다른 접근 방법은 없는가고

자문한다-즉 중심으로부터 폭발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세상은 전통적 접근방법을 받아들이고 따른다.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무질서의
일차적인 원인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약속된 리얼리티를 찾는데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쾌적한 정신 생활을 보증할 어떤 사람을 기계적으로 따른다. 비록 우리들 대부분이
정치적 횡포와 독재에 반대하지만, 속으로는 권위와 폭정을 수락하고, 우리의 마음과
생활 방식을 뒤틀어 일그러뜨리는 자를 수락하는 것은 가장 이상한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소위 정신적 권위, 모든 식전과 의식과 독단을, 지적으로가 아니라 참으로
거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홀로 서 있으며 그리고 이미 사회와의 갈등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존경할 만한 인간이기를 그친다. 존경할 만한 인간은

그 무한하고 잴 수 없는 실재에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바야흐로 완전히 그릇된 어떤 것-전통적 접근-을 거부함으로써 출발을 했는데,
그러나 당신이 만일

한갓 반작용으로서 그렇게 했다면 당신은 당신이 걸려들게 될 또하나의 틀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이거부는 아주 훌륭한 생각이라고 머리 속으로만 말하면서
그것에 관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그것의 어리석음과 미숙함을 이해한 까닭에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는 까닭에 엄청난 이해력과 총명으로서 그걸
거부한다면, 당신은 당신 주위에 어지러운 교란을 낳을 터이지만, 그러나 당신은 존경할

만함 respectability의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더 이상
찾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될 터이다. 그것이 알아야할 첫번째 것이다-즉 찾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당신이 찾을 때 당신은 다만 진열장 구경을 할 따름이다.


신이나 진리나 실재, 혹은 그걸 무어라고 부르든지간에 그러한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은 결코 책이나 성직자나 철학자 혹은 구세주들에 의해 해답을 얻을 수 없다. 당신
자신 이외의 누구도 그리고 어떤 것도 대답할 수 없으며, 바로 이 점이 당신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미숙함은 오직 자신에 대한 전적인 무지에 있다. 당신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그러면 당신 자신, 개체인 당신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인간과 개인은 다르다. 개인은

국지적 실재로서, 특별한 나라에서 살며, 특수한 문화, 특별한 사회, 특별한 종교에 속해
있다. 인간은 국지적 실재가 아니다. 그는 어디에나 있다. 만일 개인이 광막한 영역의 한
특수한 구석에서만 행동한다면, 그의 행동은 전체와 완전히 관계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좀더 큰 것 속에서는 작은 것이 있지만, 보다 작은 것 속에는 보다 큰 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의 작은 신들과 작은 전통에 만족하면서 제한되고 가련하고 좌절된

작은 실재인데 비해, 인간은 세계의 전체적 행복, 전체적 불행 그리고 전체적 혼란에 마음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