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인생은 세계에 대한 관계이다. 삶의 운동은 새로운 그리고

별관신사 2014. 3. 16. 06:56

인생은 세계에 대한 관계이다. 삶의 운동은 새로운 그리고
높은 관계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길이다.


우리들은 인생을 세계에 대한 어떤 관계로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들은 자기 내부의 생명을 이렇게 해석함과 동시에 다른 존재에
있어서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자기 내부의 생명을 이해함은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관계로서만이 아니라, 이성에 대한 동물아의 종속을 더욱더 크게 하는
일과 사랑의 표현 정도를 더욱 크게 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건설하는 일로 서다. 우리들이 자기 신상에서 보는 육체적 생존의 피할
수 없는 절멸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현재 있는 세계에 대한 관계가
불편의 것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우리들은 다른 관계를 건설하지 않으면

아니됨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의 건설, 즉 삶의 운동은
죽음의 관념을 절멸시킨다. 죽음이 나타남은 그저 자기의 생활을 세계에
대한 합리적 관계의 설정과 그 관계를 보다 큰 사랑 속에 나타냄으로써

자기의 생활을 인식하지 않고 이전과 같은 관계 속에, 즉 그가 날 때부터
품고 있는 어느 것을 사랑하고 어느 것을 미워한다는 정도의 관계 속에
머물려 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만 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계에 대해서 전과 같은
관계에 머무르고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품고 있던 것과 같은 사랑의
정도에 머물 때 그는 그 정지를 느끼고, 그의 앞에 비로소 죽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죽음은 그저 일러한 자들에게만 보이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생존은 그저 하나의 끊임없는 죽음이다. 그에게는 죽음이

미래의 것으로 보이고 두려울 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유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점점 감소되어 가는 동물적 생활의 온갖 현상
속에 보이고 두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유년시절에서 청춘기에

이르기까지의 생존의 진행은 언뜻 보면 힘의 일시적 증대인 양으로 보이나
실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같은 사지(四肢)의 끊임없는
경화(硬化), 생활력의 쇠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쉴새없이 눈앞에 죽음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무엇도 그를 죽음에서
구해 주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의 경우는 나날이 또 시간마다 나쁜
쪽으로만 나가고, 그 무엇도 그것을 잘해 줄 수 없다. 세계에 대한 그

특수한 관계, 어떤 것에 대한 사랑과 다른 것에 대한 미움이 이러한
사람에게는 그저 그 생존의 한 조건으로서만이 생각된다. 그리고 인생의
유일한 문제가―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건설, 사랑의 확대 등은

그에게는 쓸데없는 일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의 전 생애는 오로지
불가능한 일 속에―피할 수 없는 생명력의 감소, 그 경화와 쇠퇴 및
노년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헛수고 속에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가 현재의 자기 생활 속으로 그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를
가져왔음을 알고, 자기가 어떤 것을 사랑하고 다른 것을 미워함은

그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과거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또 그의
생존 속에 그에 의해서 가져온 어떤 것을 사랑하고 다른 것을 미워하는 이
마음이야말로 그의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 이것은 그의 생명의 우연적

특성이 아니라 이 하나만이 삶의 운동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운동과 사랑의 증대 속에 자기의 생활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생활에서의 자기의 과거를 되돌아볼 때,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의 의식의 연쇄(連鎖)로부터 세계에 대한 자기의 관계가 변화했음을
인정하고, 이성의 법칙에 대한 종속이 증가했음을 알고, 사랑의 힘과

영역이 끊임없이 개인적 생존의 쇠약에는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에
반비례해서 더욱더 많은 행복을 주면서 증대해 왔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과거에서 그 생명을 취하고 항상

그칠 새 없는 성장을 의식하면서 이것을 보지 못할 미래로 안락한 기분이
되어, 아니 기쁨조차 가지고 들고 나가는 것이다.
사람은 말한다. 질병 노년 쇠약 어린이로 되돌아감은 인간의 생명 혹은

의식의 절멸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사람에게 대해서
그럴까? 나는 전설에 의한 노년에서 어린이로 되돌아간 사도 요한을
상상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그저 「형제여 서로 사랑하라!」고만

말했다는 것이다. 간신히 움직이는 백 살난 노인이 눈에 눈물이 글썽해서
쉴새없이 그저 같은 두 마디의 말―「서로 사랑하라!」 이것만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동물적 생존은 겨우 스쳐갈

뿐이고, 그것은 쉴새없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에서 먹히고, 육체적
인간의 생존 속으로는 이미 들어오지 못할 새로운 산존재에게 먹혀버린
것이다.

인생을 참되게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질병이나
노년에 의해 그 생명이 쇠퇴함을 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고뇌(苦惱)하는
것은 마치 빛을 향해서 걷는 사람이 빛으로 다가감에 따라서 자기의

그림자가 적어짐을 보고 고뇌하는 것과 매일반이다. 또 육체가
멸망된다고 해서 자기 생명의 절멸을 믿는 것은, 가득찬 빛 속으로
들어감과 더불어 물체의 그림자가 사라짐을 보고 물체 그 자체의 소멸이

확실한 징조라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그저 너무 오랫동안 물체의 그림자만을 보았기 때문에 마침내
그 그림자를 물체 그것으로 생각하게 된 사람뿐이다.

자기를 공간적 시간적 생존에 있어서의 반영(反映)에 의해서가 아니고,
세계에 의해서 성장하는 사랑의 관계에 의해서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공간적 시간적 조건의 그림자의 소멸은 그저 빛의 보다 큰

비율의 징조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 생활을 그것으로써 이 생존으로의
첫걸음을 내딛고, 이 생활 속에서 사랑의 증가에 의해서 발달되어 온
세계에 대한 어떤 특수한 관계로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절멸을

믿는 일은 마치 눈에 보이는 세계의 외적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대해서 그의 어머니가 그를 양배추 잎사귀 밑에서 주워온 것이라든지,
그의 육체가 갑자기 어디론지 날아가버리고 뒤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든지 함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