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이 그들의 그릇된 인생관에 의해서
제한된 삶의 일부분을 인생으로 알고 있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들은 육체의 죽음에 직면해서 시간 속에 나타나는 의식의 열과
육체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기의 특수한 자아의 상실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나의 이 특수한 자아는 나의 출생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므로,
어떤 시간적 의식의 중단이 모든 시간적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을
절멸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사실 육체를 결합시켜서 유지하고 있는 것, 즉 시간적
생명의 의식을 절멸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매일 수면을 취할 때마다
쉴새없이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문제는 육체의 죽음이
모든 연속적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 즉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를 절멸시키는 것인지 어쩐지 하는 한가지 일에 있다. 그런데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모든 연속적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가 우리들의 육체적 생존과 더불어 생겨 나온
것이므로, 그것과 더불어 사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의 의식을 기초로 해서 고찰해 보고, 나는 나의 모든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것, 그것은―어떤 것에 대한 민감(敏感)과 다른 것에
대한 냉담(冷淡)이고, 그 결과 나의 내부에 하나는 남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버리는 것이지만, ―즉 선에 대한 나의 사랑과 악에 대한 미움의
비율이지만―특히 나를 형성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는
어떤 외적 원인의 산물이 아니라, 나의 생활의 다른 모든 현상의 근본적
원인임을 보는 것이다.
또 관찰을 기초로 해서 고찰할 때는, 최초 나에게는 나의 자아의
특수성의 원인이 나의 양친과 나와 나의 양친에게 영향을 주는 조건과의
특수성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더욱
추리를 해나간다면 나는 만약 나의 특수한 자아가 나의 양친과 양친에게
영향을 주었던 조건과의 특수성에 있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모두 나의
조상의 특수성 및 조상들의 생존 조건 속에 있는 것이 되고, 이와
같이하여 한없이, 즉 시간과 공간밖에 있음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특수한 자아는 공간과 시간밖에 생긴 것, 즉 내가 의식하고
있는 것, 그것임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그저 내게 기억되고 있는 이 모든 의식과, 나에게
기억되고 있는 생활에 선행하는 의식과 (플라톤이 말하듯이 또 우리들
모두가 자기 내부에 느끼고 있듯이) 결합하는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의 초(超) 시간적 초(超) 공간적 기초 속에만―이것 속, 이 기초 속,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 속에만―저 특수한 자아, 나의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멸망해 버릴까 두려워하는 저 특수한 자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이것만이, 즉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 인간의 특수한
자아인 그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항상 과거에 있어서도 현재에 있어서도
존재하는 것이며, 중단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어떤 시간 내의 의식의
열(列) 뿐임을 이해해 둠이 필요하다. 이것은 육체의 죽음에 따르는
시간적으로 최후인 의식의 절멸은 날마다의 수면에 있어서와 같이 참된
인간적 자아를 멸망시킬 수는 없는 것이라 함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다.
첫째로 수면 중에는 죽음의 경우와 꼭 같은 일, 즉 시간적 의식의 중단이
생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잠자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느냐? 인간이 잠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은―의식의 절멸은 죽음의
경우와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그는 잠들었어도 언제나 제대로 잠이
깨였으니까 이번도 틀림없이 깰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판단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첫 번 잠이 깰 수 있었으나 천한
번째는 깨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아무도 이런 식의 판단을 내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러한 판단은 그의 마음을 안심시키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의 그 참된 자아는 시간밖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시간 속에 나타나는 그의 의식의 중단은 그의 생활을 파괴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까닭임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옛날 이야기에 있듯이 한꺼번에 천년이나 잠들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두 시간 잘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한 기분으로 잠
잘 것이다. 시간적이 아닌 참된 생명의 의식으로서 시간의 간격은 백만
년이나, 여덟 시간이나 거의 마찬 가지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생명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는 절멸한다. 오늘의 의식은 절멸한다.
그러나 자기 육체에 변화가 하나의 시간적 의식이 다른 의식으로 바뀌는
일에도, 인간은 이미 익숙해져도 괜찮을 때가 아닌가? 생각컨대 이러한
변화들은 인간이 철이 들 무렵부터 시작되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육체 변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들 변화가 빨리 오기를 원하고 성장해서 어른이
되기를 원하고, 회복되기를 원하는 일이 아주 빈번하다. 인간은 하나의
붉은 고기 덩어리였다. 그리고 그의 의식은 모조리 밥통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던 그가 이젠 수염을 기른 이성 있는 신사이거나
자라난 자식을 귀여워하는 부인이다. 육체에 있어서도, 의식에 있어서도
예전과 비슷한 것은 조금도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인간은 그를 지금의
상태로 이끈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환영한다.
그러면서도 다음에 닥쳐올 변화에 그 무엇이 두려운 것이 있을까?
절멸인가? 그러나 보라! 이들 모든 변화가 생기는 것,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참된 생활의 의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육체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넘어서 시간을 넘은 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하면 비록 그 무엇이든 시간적 혹은
공간적 변화가 그것을 넘은 곳에 있음을 절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그 생활의 사소하고 무의미한 단편에만 주목하고, 그 전체를
보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이 사소한 자기가 선택한 단편을 놓칠세라
애쓰고 있다. 이 일은 자신을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미치광이가 내던져지자「어머니」하고 외치고는 그 자리에서 숨이
넘어갔다는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생명을 가지기 위해서 인간은 공간과
시간 사이에 나타나는 그 하나의 작은 부분만이 아니라 생명 전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명 전체를 파악하는 저에게는 그 이상으로
더욱 많이 주어지지만, 그 작은 한 부분만을 취하는 자는 이미 그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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